민들레 연대기 - 작가 : mage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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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상희는 아침에 늦잠을 잔 탓에 허겁지겁 시내전용의 모노레일에 올라탔다.
가방에 매달린 악세사리 인형이 덜렁거렸다.
통근차는 지상의 레일을 따라 천천히 달리다가 점점 상승하기 시작했다. 입체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된 모노레일들이 마천루들을 거미줄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맑은 날이면 그 가느다란 레일 위를 달리는 모노레일 열차들이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처럼 반짝거린다. 열차가 궤도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저시가지의 소음이 아득히 귓가에서 멀어졌다. 레일들은 방사상으로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굉장히 잘 계산된 방정식의 플롯이 그렇듯 레일의 유려한 곡선은 어찌 보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특히 저 통신공사건물 옆을 지나칠 때 그 뒤편에 깔린 레일들은 물방울이 퉁겨 오르는 분수 모양으로 배열되는데 상희는 통근길에서 그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거대한 건물의 유리벽이 일제히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아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전력공사의 거대한 첨탑 뒤로 섬세한 실낱같은 레일들이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변함없이 오늘도 멋진 풍경이다. 상희는 마음속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한국통신공사의 수많은 창문들 가운데 몇 군데에서는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답례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침마다 이 곳을 지나가니까. 그리고 이 장면을 다들 매일 볼 테니까.
한국통신공사는 금방 멀어져갔다.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상희는 부어오른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자그만 숨소리가 들릴 듯 말 듯 귓바퀴를 스쳐갔다. 플라이캠의 유체엔진소리였다. 상희는 손을 저어 플라이캠을 쫓았다.
“안돼. 지금 잠을 못자서 눈이 부어올랐단 말야.”
하지만 소용없었다. 상희는 통근차 안의 사람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어떤 남자가 빙긋 웃어보였다. 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건 사실이지만 벌써 삼년 째다. 이젠 많이 익숙해졌어. 플라이캠이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 걸 발견한 상희는 카메라를 향해 혀를 쑥 내밀었다. 아마 이 장면은 오늘의 탑기사가 될 것이다.
나노기술이 본격적으로 실용화되어 일상생활에서 응용되기 시작한 건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나노로봇이 개발된 건 훨씬 전이었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응용분야도 굉장히 제한되어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료기술에서 사용되었고 그 다음에는 군사 분야에서 나노로봇들이 응용되었다. 초창기의 나노머신이란 만드는 사람도 적고 쓰는 사람도 적어서 그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10년전 라그랑주 포인트에 무중력 생산시설이 건설되자 나노머신들의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다운되기 시작했다.
나노머신은 거의 분자단위에 가까운 정밀세공으로 만들기 때문에 중력과 공기, 세균이 제조공정에 치명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무균에다가 무중력, 초진공상태인 우주공간은 초소형 기계류의 제작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다. 태양으로부터 날아오는 방사선만 적절히 차단한다면 나노로봇의 제조에 방해가 될만한 요소는 없다.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동체가 될 베이스 기판에 포토에칭 기법으로 제조되는 나노로봇은 높은 순도의 실리콘 웨이퍼가 필요한 반도체와 달리 기판의 크기에 제한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하나의 라인에서 단 한번의 공정에 수천 대를 찍어낼 수 있다. 최대로 단순화된 조립공정의 경우 상하로 분리된 단 두 조각의 베이스를 결합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로봇이 만들어지므로 그 생산성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여하튼 나노로봇의 대량생산이 일반화되자 이젠 나노로봇이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군사나 의료 같은 전통적인 로봇응용분야는 물론이거니와 아이 보기에서부터 화장실 청소, 화재감시와 같은 일상사에까지 나노 로봇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회사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냈다.
나노 로봇으로 만들어진 플라이캠이라는 작은 카메라로 개인의 일상을 찍어서 방영해보자는 것이었다.
시청자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쌍방향 매스컴 때문에 획일적으로 방송을 송출하는 공중파 방송의 시청률이 급감한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그저 비슷한 형태의 방송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일 뿐이라고 처음에는 다들 생각했다.
그리고 더구나 그런 걸 허용하는 개인이 있을 리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영하는 대신 그 방영료의 일부분을 자신이 회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구나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촬영금지조항을 붙일 수도 있으니까 사생활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래지 않아 수천, 수만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하지만 지원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걸 모두 보는 건 아니다. 보드에 올려진 수만 건의 “일상공개”중 시청자가 보고 싶은 걸 골라서 해당 건에 대해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니까 지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일상”이라는 것이 돈을 낼 만큼 재미있고 또 흥미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신 공개자는 자기 일상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가격을 매길 수 있다. 거래는 제공자와 사용자 사이에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이고 회사는 단지 그 중개료만 챙기는 것이다. 요컨대 법적 책임 같은 건 사용자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해서 유래 없는 일상공개 붐이 일었다.
일상공개라고 해도 생활 전체를 공개하는 것과 일부를 공개하는 것에는 가격과 인기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같은 일상이라도 외모가 좀 보기 좋고 생활이 활기차고 재미있으면 더 인기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렇게 해서 이른바 “인기인”들이 탄생했다.
상희는 동아시아 채널에서 탑클래스였다.
매일 갱신되는 그녀의 조회수는 3억. 3억 명의 눈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요약판이 아닌 풀타임 스토리의 사용자만 해도 2천만 명에 달한다. 그녀는 이 플라이 캠의 수입만으로도 매일 9억원을 벌어들인다. 그녀의 일상은 보험과 법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그녀를 수행하는 플라이캠은 주요 구역에 대기 중인 것과 항상 그녀를 수행하는 것들을 모두 합해 340대. 유사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민간경호대가 플라이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24시간 호위하며 그녀가 사용하는 물건과 그녀가 읽은 책은 즉시 주요 매장에 간판상품으로 내걸린다. 그녀는 모든 일상을 공개하며 공식적으로는 한 남자의 여자친구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서울에 소재한 국립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로 부모를 잃은 고아이며 혼자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현대판 신데렐라로 잘 알려져있다.
그녀의 어눌한 말투와 서툰 화장은 이미 2년째 장기간 유행에 돌입했으며 그녀 때문에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인구가 4천 5백만 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생활하며 걸핏하면 남자친구와 싸운다. 수업을 빼먹을까봐 전전긍긍하고 변비 때문에 아침마다 우유를 마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스타다.
상희는 수업시간에 졸다가 침을 흘렸다. 그리고 누구 본사람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최소한 1억에서 2억 명의 사람들이 이 순간을 보았거나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일본에서 발간되는 내일 자 플라이캠 표지사진으로 이게 실릴지도 모른다.
“아. 씨. 왜 그랬지?”
이미 이미지가 구겨진지는 꽤 됐지만 그래도 최소한이란 게 있는 법이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아침에 그동안 미뤄둔 빨래와 집안청소를 처리하고 느긋하게 집을 나섰어야 하는 것인데 어젯밤,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녀석을 만나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취해 헤롱거리며 늦도록 거리를 쏘다녔던 것이다. 상희는 펜 끝을 입에 물고 멍청히 강의실 천정을 쳐다보았다. 마지막에 민속주집에 들어간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후회는 해서 무엇 하리.
교수님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걸 발견한 상희는 교수님께 영롱한 눈빛을 보내드렸다. 그런다고 교수님의 평가가 달라질리 없다는 건 물론 잘 알고 있다.
점심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식당에 갔다. 아침도 거른 탓에 친구들 밥까지 뺏어먹은 상희는 부른 배를 꾹 누르며 의자에 방만한 자세로 걸터앉았다.
한 남학생이 그녀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저, 혹시 상희 선배 아닙니까?”
상희는 상대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기억할만한 후배라고 해봐야 대여섯을 넘지 않는다. 상희는 난처할 때면 늘 하는 버릇대로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저... 전 이번에 입학한 신입생인데요. 상희씨가 이 학교에 다닌다는 걸 알고 여길 지원했거든요. 상희 선배 맞는 거죠?”
상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개는 이런 경우 그녀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끄러미 쳐다보면 혼자서 몇마디 하다가 미안해서 물러간다. 예전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이런 사람들과 마주쳤었다. 하지만 이젠 그녀의 팬들이 스스로 자제하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편이었다. 사실 방송 내규에 의해 일상공개자를 찾아가 대면하는 것을 일종의 스토킹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팬이랍시고 공연히 상대방을 찾아갔다가 고발당해서 난처한 꼴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상희가 대답이 없자 곁에 있던 현지가 냉큼 나섰다.
“아하. 그러세요. 그럼 상희 팬이네. 와 잘됐다. 그럼 우리 아이스크림 하나씩 돌리죠.”
조마조마한 모습으로 서있던 남학생은 현지의 말에 표정이 확 밝아졌다.
“상희씨 맞는 군요. 네! 네, 그럴께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말릴 겨를도 없이 남학생은 매점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친구들은 저희들끼리 키득거렸다. 상희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현지 너 뭐야! 왜 그랬어. 잘 알면서.”
“뭐 어때. 가끔인데.”
다른 친구들도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가끔이잖아.”
“그나저나 상희야. 어떡하니. 쟤 너 때문에 우리학교 온 거래.”
상희는 긴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할 수 없지 뭐. 한 둘도 아닌데. 안되겠다. 걔 돌아오기 전에 도망가야지.”
“가긴 어딜 가. 아이스크림 먹어야지.”
“맞아. 네가 없으면 우리도 못얻어먹잖아! 상희 잡아!”
남학생은 상기된 얼굴로 아이스크림 다섯 개를 사왔다.
몇시간쯤 뒤에 아마도 이 남학생은 “상사모”라는 의문의 단체에 소속된 의문의 남자들에게 붙들려 엄숙하고도 장구한 주의사항을 듣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의문에 단체에 자진 가입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주의사항이란 물론 우리 고귀한 여신님에게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제일계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방문 앞에 떨어져있는 잡지책을 주워들었다. 보아하니 훌리건들이 매일 그녀의 집앞에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물건 세례의 잔재인 듯싶었다. 대개는 그녀 주변에서 잠행하는 호위요원들이 깔끔하게 치워놓지만 가끔은 이렇게 놓치는 경우가 생긴다. 뭐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으니까.
상희는 잡지책을 옆구리에 끼고 손으로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석에 있던 고양이가 파란 불을 켜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상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급하게 나가느라 오렌지 밥을 안주고 간 것이 아닌가.
“오렌지! 이리와!”
노란색 고양이는 그녀를 슬슬 피했다.
“이게 이 씨!”
상희는 슬리퍼를 집어던지려다가 이미지 재고를 떠올리고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고양이가 냐옹거렸다. 형광안료로 염색시킨 고양이털은 어두컴컴한 방구석에서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희는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켰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자 고양이가 움찔거렸다.
“자! 나의 사랑스러운 고양군. 이리오렴.”
그러면서 발을 쿵쿵 구르며 다가가자 노란 고양이는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상희의 손에 와락 붙들렸다. 어느 잡지에서 읽은 거지만, 이 오렌지란 고양이 이름도 이제 흔해져서 밖에 나가보면 고양이란 고양이는 죄다 오렌지 아니면 바나나라고 했다.
상희는 고양이를 안은 채로 냉장고에서 고양이 밥을 꺼내 그릇에 쏟아주었다. 그리고 밥을 보고 간절한 눈초리를 보내는 고양이를 꽉 끌어안은 채 침대에서 뒹굴었다.
“벌이야. 조금 더 있다가 먹어. 주인님이 부르면 냉큼 달려와야지.”
상희는 잡지책을 왼손으로 뒤적거렸다.
소제목 : SH 리포트
내 용 : 그녀의 금주 동향
특기할 만한 사항 : 그녀의 최근 연애상황.
“오호. 이건 나도 몰랐던 건데?”
오렌지가 품에서 빠져나갔다. 상희는 내버려두고 잡지를 탐독했다. 그러고 보면 자기에 대한 잡지를 읽는 그녀의 모습이 또 잡지로 만들어질 테니 이건 조금 우스운 일이다.
결 론 : 그녀는 아직 남자친구와 헤어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그녀의 주변에는 대안이라 할만한 사람이 아직 없으므로 대쉬해 볼 생각이 있다면 지금이 적정기!
상희는 잡지를 휴지통에 쑤셔 넣었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가며 상희는 흠찟 기지개를 폈다.
“대쉬해 볼 생각이 있다면 지금이 적정기라.....”
상희는 낮에 느닷없이 말을 걸어온 신입생을 떠올렸다. 잡지를 보고 그랬던 걸까?
“이러는 데도 내가 공주병에 걸리지 않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상희는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화자찬했다. 오렌지가 그녀를 향해 냐옹거렸다.
상희는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하다만 숙제를 던져놓고 급히 나선 건 연건의 전화 때문이었다. 근 삼일만의 전화였다. 연건은 오래 사귄 그녀의 남자친구다. 오래 사귀었다는 말은 그를 만난 것이 그녀가 플라이캠을 시작하기 전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늘 가는 카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동안 올라가야하는 고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연건은 상희를 보고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화는 서먹했다.
“그리고 난, 네 돈 때문에 너하고 사귄다는 말 듣는 것도 이젠 지겨워.”
지난 삼일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이래서였을까. 이런 감정 때문에.
상희는 동그란 물자국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의 싸움이었다. 아마 묻는다면 힐끗거리는 저 옆자리의 남학생이 칠십이일 만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해줄지도 모른다. 정말로 언젠가 그런 적도 있었으니까.
언젠가 예전에 둘이서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연건이 물었다. 이봐 상희야 우리가 만난지 몇일이나 됐지? 그러자 유심히 보고 있던 옆자리의 남자가 오늘이 팔백 구십일째요,라고 말해주는 바람에 김빠진 적이 있었다.
연건은 상희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상희도 일부러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건 말하자면 가끔 뜯어내지 않으면 안돼는 오래된 상처의 딱지 같은 것이다. 흉터가 남을 것이고 아프겠지만 그것에 손을 대고 싶은 유혹을 이겨낸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물론 그런 상처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결말을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그저 늘 있는 크고 작은 생채기처럼 그렇게 다치고 아물어가는 거니까.
“잘 알잖아. 오빠. 나 플라이캠으로 들어오는 돈 전부다 프리라인 코스모스에 기부하는 거. 나 이 일 시작하고 나서 그 돈 만져본 적도 없어.”
“그래. 알아.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냔 말이야.”
그는 일정한 톤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리고 표정은 담담한 척, 아무 일 없는 척 가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희가, 그리고 시청자들이 잘 아는 연건은 그렇게 강한 남자가 아니다. 감정을 억누르는데 조금 익숙할 뿐이다. 그래서 뒤돌아서서 괴로워하는 그런 보통의 남자애일 뿐이다.
“넌 너무 유명해. 그래서 힘들어. 그래. 이번만 말하면 한 백 번째쯤 되겠구나. 이런 말 하는 것도.”
상희는 담담히 연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희야. 어제 너 동창 만났지. 그래서 늦게 집에 들어갔고. 그리곤 씻지도 않고 곯아떨어져서 잠들었어. 하루에 단돈 삼십 원만 있으며 누구나 너의 일상을 구석구석 훔쳐볼 수 있어. 심지어 나조차도. 나도 네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면 습관적으로 플라이캠에 접속하게 돼. 전 세계에 너랑 남자친구라고 떠벌려진 나조차도 그렇단 말야. 물론....물론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 아냐. 난 그저.....”
그는 말을 멈추었다. 이런 저런 말들이 그의 눈동자에 스쳐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들을 읽어낼 수 없었다. 상희는 커피 잔에 손을 뻗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연건은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희는 눈길을 돌려 카페 밖을 쳐다보았다. 야경이 아름다운 이 고층의 카페는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상희는 익숙한 도시의 광경을 오랫동안 꼼꼼히 뜯어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카운터 뒤에 서있던 여자가 문을 나서는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언제부터인가 이 카페 주인은 그녀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연건은 손을 들어 보일 듯 말 듯 인사하고 멀어져갔다. 상희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다가 묵묵히 돌아섰다. 그녀를 바래다주지 않게 된 건 그녀의 곁에 항상 보디가드들이 따라다닌다는 걸 그가 알게 된 뒤부터였을 것이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상희는 가로수에 등을 기댔다. 날벌레들이 날아들어 플라이캠과 뒤섞였다. 어느 것이 플라이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상희는 손끝으로 눈가를 찍어냈다. 깜빡거리며 젖은 눈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상희는 맞은 편 건물의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오늘 하루 동안 집계된 “상희”의 조회수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4억 2천 7백만 회. 그 경이로운 숫자의 뒤편에 눈물짓는 “상희”의 모습이 막 지나가고 있었다. 4억 명의 눈길이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고 소리 없이 한숨지었다. 상희는 늘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게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지금처럼.
가로등 빛이 번지는 하늘을 상희는 젖은 눈으로 주시했다. 북극성처럼 까마득하게 높은 마천루의 창들이 찬연한 광휘를 그리고 그 사이를 은빛 실처럼 통과하는 도심열차의 모노레일이 형이상학적인 기하를 수놓고 있었다. 그 고결한 곡선의 위에 겹쳐진 희미한 별빛들 가운데는 매일 수십억 개의 로봇들을 찍어내는 무중력 플랜트도 있을 것이고 전파로 온 지구를 연결하는 통신위성도 있을 터였다.
수억 개의 로봇. 수억 개의 시선.
이제 억 단위가 아니면 시시한 세상.
십억. 혹은 훨씬 많은 숫자의 나노로봇들이 매일 소모되고 다시 또 그만큼 만들어진다. 은밀한 카메라에 촬영된 일상이 소모되고 생산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쓰레기통을 채울 물건들을 만드는데 지치지 않는 열정을 발휘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다. 오랫동안 쌓아올린 숙명이 그녀와 그녀의 동족을 그렇게 완성시켰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소모하는 것이다. 더 좋은 음식과 더 좋은 옷, 더 좋은 제품을 소모하는 것이다. 생활의 질이 그렇게 해서 높아진다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기요. 나. 마음껏 울어도 돼나요? 그냥 눈치 안보구 말에요. 뭐 언제는 마음대로 안했냐구 물으시겠죠. 네, 맞아요. 전 항상 제 멋대로죠. 전 항상 그래요. 에. 그냥 울어버릴래요. 그런다고 흉보거나 하시면 안돼요. 지금 저 진짜로 울고 싶거든요.”
상희는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4억 명 가운데 삼 할이 외친 대답은 그녀 대신 그녀의 에이전트에게 전달되었다.
모노레일 정거장을 향해 상희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따금 늘어선 가로등 아래 드러난 보도블럭은 생기를 잃어버린 짐승의 사체처럼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어두운 밤의 거리. 저시가지에 가득 물안개처럼 차오르는 차가운 스모그.
거대한 전광판에서 뛰노는 숫자들.
사람 없는 정거장에 상희는 걸음을 멈추고 뜻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내게 거짓말을 해봐. 내게....”
그녀는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스타의 자격이 있다.
상희는 아침에 늦잠을 잔 탓에 허겁지겁 시내전용의 모노레일에 올라탔다.
가방에 매달린 악세사리 인형이 덜렁거렸다.
통근차는 지상의 레일을 따라 천천히 달리다가 점점 상승하기 시작했다. 입체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된 모노레일들이 마천루들을 거미줄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맑은 날이면 그 가느다란 레일 위를 달리는 모노레일 열차들이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처럼 반짝거린다. 열차가 궤도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저시가지의 소음이 아득히 귓가에서 멀어졌다. 레일들은 방사상으로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굉장히 잘 계산된 방정식의 플롯이 그렇듯 레일의 유려한 곡선은 어찌 보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특히 저 통신공사건물 옆을 지나칠 때 그 뒤편에 깔린 레일들은 물방울이 퉁겨 오르는 분수 모양으로 배열되는데 상희는 통근길에서 그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거대한 건물의 유리벽이 일제히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아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전력공사의 거대한 첨탑 뒤로 섬세한 실낱같은 레일들이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변함없이 오늘도 멋진 풍경이다. 상희는 마음속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한국통신공사의 수많은 창문들 가운데 몇 군데에서는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답례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침마다 이 곳을 지나가니까. 그리고 이 장면을 다들 매일 볼 테니까.
한국통신공사는 금방 멀어져갔다.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상희는 부어오른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자그만 숨소리가 들릴 듯 말 듯 귓바퀴를 스쳐갔다. 플라이캠의 유체엔진소리였다. 상희는 손을 저어 플라이캠을 쫓았다.
“안돼. 지금 잠을 못자서 눈이 부어올랐단 말야.”
하지만 소용없었다. 상희는 통근차 안의 사람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어떤 남자가 빙긋 웃어보였다. 상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건 사실이지만 벌써 삼년 째다. 이젠 많이 익숙해졌어. 플라이캠이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 걸 발견한 상희는 카메라를 향해 혀를 쑥 내밀었다. 아마 이 장면은 오늘의 탑기사가 될 것이다.
나노기술이 본격적으로 실용화되어 일상생활에서 응용되기 시작한 건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나노로봇이 개발된 건 훨씬 전이었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응용분야도 굉장히 제한되어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료기술에서 사용되었고 그 다음에는 군사 분야에서 나노로봇들이 응용되었다. 초창기의 나노머신이란 만드는 사람도 적고 쓰는 사람도 적어서 그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10년전 라그랑주 포인트에 무중력 생산시설이 건설되자 나노머신들의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다운되기 시작했다.
나노머신은 거의 분자단위에 가까운 정밀세공으로 만들기 때문에 중력과 공기, 세균이 제조공정에 치명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무균에다가 무중력, 초진공상태인 우주공간은 초소형 기계류의 제작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다. 태양으로부터 날아오는 방사선만 적절히 차단한다면 나노로봇의 제조에 방해가 될만한 요소는 없다.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동체가 될 베이스 기판에 포토에칭 기법으로 제조되는 나노로봇은 높은 순도의 실리콘 웨이퍼가 필요한 반도체와 달리 기판의 크기에 제한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하나의 라인에서 단 한번의 공정에 수천 대를 찍어낼 수 있다. 최대로 단순화된 조립공정의 경우 상하로 분리된 단 두 조각의 베이스를 결합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로봇이 만들어지므로 그 생산성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여하튼 나노로봇의 대량생산이 일반화되자 이젠 나노로봇이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군사나 의료 같은 전통적인 로봇응용분야는 물론이거니와 아이 보기에서부터 화장실 청소, 화재감시와 같은 일상사에까지 나노 로봇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회사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냈다.
나노 로봇으로 만들어진 플라이캠이라는 작은 카메라로 개인의 일상을 찍어서 방영해보자는 것이었다.
시청자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쌍방향 매스컴 때문에 획일적으로 방송을 송출하는 공중파 방송의 시청률이 급감한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그저 비슷한 형태의 방송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일 뿐이라고 처음에는 다들 생각했다.
그리고 더구나 그런 걸 허용하는 개인이 있을 리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영하는 대신 그 방영료의 일부분을 자신이 회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구나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촬영금지조항을 붙일 수도 있으니까 사생활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래지 않아 수천, 수만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하지만 지원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걸 모두 보는 건 아니다. 보드에 올려진 수만 건의 “일상공개”중 시청자가 보고 싶은 걸 골라서 해당 건에 대해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니까 지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일상”이라는 것이 돈을 낼 만큼 재미있고 또 흥미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신 공개자는 자기 일상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가격을 매길 수 있다. 거래는 제공자와 사용자 사이에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이고 회사는 단지 그 중개료만 챙기는 것이다. 요컨대 법적 책임 같은 건 사용자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해서 유래 없는 일상공개 붐이 일었다.
일상공개라고 해도 생활 전체를 공개하는 것과 일부를 공개하는 것에는 가격과 인기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같은 일상이라도 외모가 좀 보기 좋고 생활이 활기차고 재미있으면 더 인기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렇게 해서 이른바 “인기인”들이 탄생했다.
상희는 동아시아 채널에서 탑클래스였다.
매일 갱신되는 그녀의 조회수는 3억. 3억 명의 눈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요약판이 아닌 풀타임 스토리의 사용자만 해도 2천만 명에 달한다. 그녀는 이 플라이 캠의 수입만으로도 매일 9억원을 벌어들인다. 그녀의 일상은 보험과 법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그녀를 수행하는 플라이캠은 주요 구역에 대기 중인 것과 항상 그녀를 수행하는 것들을 모두 합해 340대. 유사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민간경호대가 플라이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24시간 호위하며 그녀가 사용하는 물건과 그녀가 읽은 책은 즉시 주요 매장에 간판상품으로 내걸린다. 그녀는 모든 일상을 공개하며 공식적으로는 한 남자의 여자친구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서울에 소재한 국립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로 부모를 잃은 고아이며 혼자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현대판 신데렐라로 잘 알려져있다.
그녀의 어눌한 말투와 서툰 화장은 이미 2년째 장기간 유행에 돌입했으며 그녀 때문에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인구가 4천 5백만 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생활하며 걸핏하면 남자친구와 싸운다. 수업을 빼먹을까봐 전전긍긍하고 변비 때문에 아침마다 우유를 마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스타다.
상희는 수업시간에 졸다가 침을 흘렸다. 그리고 누구 본사람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최소한 1억에서 2억 명의 사람들이 이 순간을 보았거나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일본에서 발간되는 내일 자 플라이캠 표지사진으로 이게 실릴지도 모른다.
“아. 씨. 왜 그랬지?”
이미 이미지가 구겨진지는 꽤 됐지만 그래도 최소한이란 게 있는 법이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아침에 그동안 미뤄둔 빨래와 집안청소를 처리하고 느긋하게 집을 나섰어야 하는 것인데 어젯밤,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녀석을 만나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취해 헤롱거리며 늦도록 거리를 쏘다녔던 것이다. 상희는 펜 끝을 입에 물고 멍청히 강의실 천정을 쳐다보았다. 마지막에 민속주집에 들어간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후회는 해서 무엇 하리.
교수님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걸 발견한 상희는 교수님께 영롱한 눈빛을 보내드렸다. 그런다고 교수님의 평가가 달라질리 없다는 건 물론 잘 알고 있다.
점심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식당에 갔다. 아침도 거른 탓에 친구들 밥까지 뺏어먹은 상희는 부른 배를 꾹 누르며 의자에 방만한 자세로 걸터앉았다.
한 남학생이 그녀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저, 혹시 상희 선배 아닙니까?”
상희는 상대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기억할만한 후배라고 해봐야 대여섯을 넘지 않는다. 상희는 난처할 때면 늘 하는 버릇대로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저... 전 이번에 입학한 신입생인데요. 상희씨가 이 학교에 다닌다는 걸 알고 여길 지원했거든요. 상희 선배 맞는 거죠?”
상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개는 이런 경우 그녀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끄러미 쳐다보면 혼자서 몇마디 하다가 미안해서 물러간다. 예전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이런 사람들과 마주쳤었다. 하지만 이젠 그녀의 팬들이 스스로 자제하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편이었다. 사실 방송 내규에 의해 일상공개자를 찾아가 대면하는 것을 일종의 스토킹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팬이랍시고 공연히 상대방을 찾아갔다가 고발당해서 난처한 꼴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상희가 대답이 없자 곁에 있던 현지가 냉큼 나섰다.
“아하. 그러세요. 그럼 상희 팬이네. 와 잘됐다. 그럼 우리 아이스크림 하나씩 돌리죠.”
조마조마한 모습으로 서있던 남학생은 현지의 말에 표정이 확 밝아졌다.
“상희씨 맞는 군요. 네! 네, 그럴께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말릴 겨를도 없이 남학생은 매점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친구들은 저희들끼리 키득거렸다. 상희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현지 너 뭐야! 왜 그랬어. 잘 알면서.”
“뭐 어때. 가끔인데.”
다른 친구들도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가끔이잖아.”
“그나저나 상희야. 어떡하니. 쟤 너 때문에 우리학교 온 거래.”
상희는 긴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할 수 없지 뭐. 한 둘도 아닌데. 안되겠다. 걔 돌아오기 전에 도망가야지.”
“가긴 어딜 가. 아이스크림 먹어야지.”
“맞아. 네가 없으면 우리도 못얻어먹잖아! 상희 잡아!”
남학생은 상기된 얼굴로 아이스크림 다섯 개를 사왔다.
몇시간쯤 뒤에 아마도 이 남학생은 “상사모”라는 의문의 단체에 소속된 의문의 남자들에게 붙들려 엄숙하고도 장구한 주의사항을 듣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의문에 단체에 자진 가입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주의사항이란 물론 우리 고귀한 여신님에게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제일계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방문 앞에 떨어져있는 잡지책을 주워들었다. 보아하니 훌리건들이 매일 그녀의 집앞에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물건 세례의 잔재인 듯싶었다. 대개는 그녀 주변에서 잠행하는 호위요원들이 깔끔하게 치워놓지만 가끔은 이렇게 놓치는 경우가 생긴다. 뭐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으니까.
상희는 잡지책을 옆구리에 끼고 손으로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석에 있던 고양이가 파란 불을 켜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상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급하게 나가느라 오렌지 밥을 안주고 간 것이 아닌가.
“오렌지! 이리와!”
노란색 고양이는 그녀를 슬슬 피했다.
“이게 이 씨!”
상희는 슬리퍼를 집어던지려다가 이미지 재고를 떠올리고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고양이가 냐옹거렸다. 형광안료로 염색시킨 고양이털은 어두컴컴한 방구석에서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희는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켰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자 고양이가 움찔거렸다.
“자! 나의 사랑스러운 고양군. 이리오렴.”
그러면서 발을 쿵쿵 구르며 다가가자 노란 고양이는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상희의 손에 와락 붙들렸다. 어느 잡지에서 읽은 거지만, 이 오렌지란 고양이 이름도 이제 흔해져서 밖에 나가보면 고양이란 고양이는 죄다 오렌지 아니면 바나나라고 했다.
상희는 고양이를 안은 채로 냉장고에서 고양이 밥을 꺼내 그릇에 쏟아주었다. 그리고 밥을 보고 간절한 눈초리를 보내는 고양이를 꽉 끌어안은 채 침대에서 뒹굴었다.
“벌이야. 조금 더 있다가 먹어. 주인님이 부르면 냉큼 달려와야지.”
상희는 잡지책을 왼손으로 뒤적거렸다.
소제목 : SH 리포트
내 용 : 그녀의 금주 동향
특기할 만한 사항 : 그녀의 최근 연애상황.
“오호. 이건 나도 몰랐던 건데?”
오렌지가 품에서 빠져나갔다. 상희는 내버려두고 잡지를 탐독했다. 그러고 보면 자기에 대한 잡지를 읽는 그녀의 모습이 또 잡지로 만들어질 테니 이건 조금 우스운 일이다.
결 론 : 그녀는 아직 남자친구와 헤어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그녀의 주변에는 대안이라 할만한 사람이 아직 없으므로 대쉬해 볼 생각이 있다면 지금이 적정기!
상희는 잡지를 휴지통에 쑤셔 넣었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가며 상희는 흠찟 기지개를 폈다.
“대쉬해 볼 생각이 있다면 지금이 적정기라.....”
상희는 낮에 느닷없이 말을 걸어온 신입생을 떠올렸다. 잡지를 보고 그랬던 걸까?
“이러는 데도 내가 공주병에 걸리지 않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상희는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화자찬했다. 오렌지가 그녀를 향해 냐옹거렸다.
상희는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하다만 숙제를 던져놓고 급히 나선 건 연건의 전화 때문이었다. 근 삼일만의 전화였다. 연건은 오래 사귄 그녀의 남자친구다. 오래 사귀었다는 말은 그를 만난 것이 그녀가 플라이캠을 시작하기 전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늘 가는 카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동안 올라가야하는 고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연건은 상희를 보고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화는 서먹했다.
“그리고 난, 네 돈 때문에 너하고 사귄다는 말 듣는 것도 이젠 지겨워.”
지난 삼일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이래서였을까. 이런 감정 때문에.
상희는 동그란 물자국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의 싸움이었다. 아마 묻는다면 힐끗거리는 저 옆자리의 남학생이 칠십이일 만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해줄지도 모른다. 정말로 언젠가 그런 적도 있었으니까.
언젠가 예전에 둘이서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연건이 물었다. 이봐 상희야 우리가 만난지 몇일이나 됐지? 그러자 유심히 보고 있던 옆자리의 남자가 오늘이 팔백 구십일째요,라고 말해주는 바람에 김빠진 적이 있었다.
연건은 상희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상희도 일부러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건 말하자면 가끔 뜯어내지 않으면 안돼는 오래된 상처의 딱지 같은 것이다. 흉터가 남을 것이고 아프겠지만 그것에 손을 대고 싶은 유혹을 이겨낸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물론 그런 상처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결말을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그저 늘 있는 크고 작은 생채기처럼 그렇게 다치고 아물어가는 거니까.
“잘 알잖아. 오빠. 나 플라이캠으로 들어오는 돈 전부다 프리라인 코스모스에 기부하는 거. 나 이 일 시작하고 나서 그 돈 만져본 적도 없어.”
“그래. 알아.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냔 말이야.”
그는 일정한 톤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리고 표정은 담담한 척, 아무 일 없는 척 가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희가, 그리고 시청자들이 잘 아는 연건은 그렇게 강한 남자가 아니다. 감정을 억누르는데 조금 익숙할 뿐이다. 그래서 뒤돌아서서 괴로워하는 그런 보통의 남자애일 뿐이다.
“넌 너무 유명해. 그래서 힘들어. 그래. 이번만 말하면 한 백 번째쯤 되겠구나. 이런 말 하는 것도.”
상희는 담담히 연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희야. 어제 너 동창 만났지. 그래서 늦게 집에 들어갔고. 그리곤 씻지도 않고 곯아떨어져서 잠들었어. 하루에 단돈 삼십 원만 있으며 누구나 너의 일상을 구석구석 훔쳐볼 수 있어. 심지어 나조차도. 나도 네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면 습관적으로 플라이캠에 접속하게 돼. 전 세계에 너랑 남자친구라고 떠벌려진 나조차도 그렇단 말야. 물론....물론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 아냐. 난 그저.....”
그는 말을 멈추었다. 이런 저런 말들이 그의 눈동자에 스쳐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들을 읽어낼 수 없었다. 상희는 커피 잔에 손을 뻗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연건은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희는 눈길을 돌려 카페 밖을 쳐다보았다. 야경이 아름다운 이 고층의 카페는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상희는 익숙한 도시의 광경을 오랫동안 꼼꼼히 뜯어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카운터 뒤에 서있던 여자가 문을 나서는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언제부터인가 이 카페 주인은 그녀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연건은 손을 들어 보일 듯 말 듯 인사하고 멀어져갔다. 상희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다가 묵묵히 돌아섰다. 그녀를 바래다주지 않게 된 건 그녀의 곁에 항상 보디가드들이 따라다닌다는 걸 그가 알게 된 뒤부터였을 것이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상희는 가로수에 등을 기댔다. 날벌레들이 날아들어 플라이캠과 뒤섞였다. 어느 것이 플라이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상희는 손끝으로 눈가를 찍어냈다. 깜빡거리며 젖은 눈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상희는 맞은 편 건물의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오늘 하루 동안 집계된 “상희”의 조회수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4억 2천 7백만 회. 그 경이로운 숫자의 뒤편에 눈물짓는 “상희”의 모습이 막 지나가고 있었다. 4억 명의 눈길이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고 소리 없이 한숨지었다. 상희는 늘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게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지금처럼.
가로등 빛이 번지는 하늘을 상희는 젖은 눈으로 주시했다. 북극성처럼 까마득하게 높은 마천루의 창들이 찬연한 광휘를 그리고 그 사이를 은빛 실처럼 통과하는 도심열차의 모노레일이 형이상학적인 기하를 수놓고 있었다. 그 고결한 곡선의 위에 겹쳐진 희미한 별빛들 가운데는 매일 수십억 개의 로봇들을 찍어내는 무중력 플랜트도 있을 것이고 전파로 온 지구를 연결하는 통신위성도 있을 터였다.
수억 개의 로봇. 수억 개의 시선.
이제 억 단위가 아니면 시시한 세상.
십억. 혹은 훨씬 많은 숫자의 나노로봇들이 매일 소모되고 다시 또 그만큼 만들어진다. 은밀한 카메라에 촬영된 일상이 소모되고 생산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쓰레기통을 채울 물건들을 만드는데 지치지 않는 열정을 발휘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다. 오랫동안 쌓아올린 숙명이 그녀와 그녀의 동족을 그렇게 완성시켰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소모하는 것이다. 더 좋은 음식과 더 좋은 옷, 더 좋은 제품을 소모하는 것이다. 생활의 질이 그렇게 해서 높아진다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기요. 나. 마음껏 울어도 돼나요? 그냥 눈치 안보구 말에요. 뭐 언제는 마음대로 안했냐구 물으시겠죠. 네, 맞아요. 전 항상 제 멋대로죠. 전 항상 그래요. 에. 그냥 울어버릴래요. 그런다고 흉보거나 하시면 안돼요. 지금 저 진짜로 울고 싶거든요.”
상희는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4억 명 가운데 삼 할이 외친 대답은 그녀 대신 그녀의 에이전트에게 전달되었다.
모노레일 정거장을 향해 상희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따금 늘어선 가로등 아래 드러난 보도블럭은 생기를 잃어버린 짐승의 사체처럼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어두운 밤의 거리. 저시가지에 가득 물안개처럼 차오르는 차가운 스모그.
거대한 전광판에서 뛰노는 숫자들.
사람 없는 정거장에 상희는 걸음을 멈추고 뜻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내게 거짓말을 해봐. 내게....”
그녀는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스타의 자격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