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연대기 - 작가 : magegarden
글 수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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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11/12
날이 밝았다.
역시 아원보다는 하루가 짧다. 금방 해가 지고 금방 떠오른다.
간밤의 일들은 마치 꿈속의 광경처럼 아득히 멀었다.
작은 바위산의 정상에는 세 구의 시체?놓여 있었다.
한사람은 메다산. 한사람은 아키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류사다.
지석은 얼셈?쓸어내리다가 턱에 난 수염의 감촉을 느끼곤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김오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얼굴에도 거칠게 수염이 돋아나 있었다.
요한의 시체는 여전히 비탈에 놓여있었다.
지석은 천천히 몸을 비틀었다. 김오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직도 묶여있던 부위가 아픈지 손목을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다.
지석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무심코 가지고 다니던 장교 비망록을 꺼냈다. 모래 속에서 주은 것이었다.
"한가지만 물어보죠."
김오는 노트와 지석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거, 당신 겁니까?"
김오는 노트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잠시 속표지의 이름을 되뇌이다가 지석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내 것은 아니지만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지."
김오는 돌아섰다. 그리고 시체가 쌓여있는 마을을 향해 노트를 힘껏 던졌다.
펄럭거리며 노트는 제법 멀리까지 날아갔다.
지석은 노트가 떨어졌음직한 자리를 눈길로 어름하다가 가슴 가득 찬 새벽의 공기를 들이켰다.
김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간절히 바라는 일은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아마 바램이 조금 부족했던 모양이야. 난 아군이 수송기를 몰고 와서 나를 태우고 안락한 후방으로 데려다주길 바랬는데."
김오는 그러면서 빙그레 웃었다.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적군이 궤도를 모조리 장악했는데 말이야. 응?"
지석은 차라리 평온한 기분이 되어 김오의 웃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럼 왜 통신기로 신호를 보낸 겁니까. 잘못하면 적군이 몰려올텐데."
하지만 지석은 묻기 전에 이미 답을 알고있었다.
"외로워서. 혼자 이 지옥같은 마을에 남겨진다고 상상해봐."
김오는 자신의 가슴어름을 손으로 두드렸다.
"난 적이든 아군이든 만나고 싶었어. 적이라면 어서 찾아와서 죽여주길 바랬어."
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따위는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쉬고싶은 따름이었다. 그리고 물을 마시고 싶었다.
사막은 여전히 배타적인 색깔이었다. 그 모호함속에 많은 것들을 감춘채 지치고 망가진 지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지석 역시 사막의 열기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죽음이 죽음을 부르듯 모든 것들을 감싸고 나서 그 뒤엔 기억조차 남지 않게 깨끗이 지워버리는 저 방대한 부식작용의 한가운데서 인간의 하잘 것 없는 문명같은 건 금방 지워져 버릴 하나의 얼룩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문득 스쳐갔다.
지석은 작은 조약돌을 집어올렸다. 모래와 바람 때문에 풍화된 우둘투둘한 표면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지석은 가슴속의 상처에 대해 생각했다. 어벤전에서 퇴각한 후 전술조가 해체될 때 조장은 지석에게 작은 돌맹이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 돌맹이에 새겨진 만큼의 상처를 난 가슴에 가지고 있다. 지석. 너도 언젠가 조장이 되면 알 수 있을 거다.
바람이 불어왔다. 지석은 돌을 떨구었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들도 뿌리쳤다.
지석은 그늘진 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웅크리고 잠을 잤다.
"재미있는 걸 가르쳐 줄까?"
김오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지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석은 눈알이 빠져나갈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해는 벌써 서쪽하늘에 걸려있었다.
"일어나. 이제 잘만큼 잤으니까."
지석은 눈을 조심조심 문질렀다. 눈도 눈이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따라와."
지석은 멀어져가는 김오를 보고 허둥지둥 일어났다.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흘러왔다.
"뭡니까."
김오는 석양을 받으며 뭔가 큼직한 물건을 들어올렸다.
"너 때문에 여기까지 가지고 왔어."
그건 작은 솥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끄무레한 액체가 끓고 있었다.
"헛. 뜨거워. 이리 와서 조금 거들어. 저기 평평한 곳까지 가지고 가게."
지석은 시키는대로 했다. 따스한 석양이 김오의 옆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숟가락 정도는 있겠지?"
그건 식사였다. 따뜻하고 수분이 많은 식사.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가 그다지도 축복받은 것임을 지석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물도 있었다.
"한꺼번에 많이 마시지 않는게 좋아. 익숙하지 않은 몸이 탈을 일으키거든."
하지만 지석은 목젖을 울리며 물을 들이켰다. 상상이 아니라 진짜였다.
김오는 이미 다 꺼져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음정도 맞지 않는 콧노래를 불렀다. 군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속한 노래인 것도 아니었다. 지석은 모르는 노래였지만 왠지 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오는 덥수룩한 수염이 난 입가를 소매로 문질렀다.
"내가 진짜 재미있는 걸 가르쳐줄까?"
지석은 따끈한 모래위에 드러누운 채 김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별의 사람들은 주로 적도 근처에 모여서 살아. 적도에 점퍼가 있으니까. 적도에서 조금만 고위도로 올라가면 아주 적은 숫자의 마을이 있을 뿐이지. 얼핏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힘들어. 이 외딴 곳의 생활은. 하지만 사람들은 굳이 이렇게 적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생활을 해나가지. 식량은 완전히 자급자족. 기계나 좀 복잡한 도구 같은 건 먼 곳의 도시에서 사오는데 일 년에 한두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야. 그런데 이 마을들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어."
김오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탑을 가리켰다.
"바로 이 탑들이야. 산소 환원탑."
김오가 가리키는 순간 탑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갑자기 지석의 시야에 뛰어들었다.
"이 탑은 바로 먼 우주에 점점이 떠있는 광집진 위성들과 이 행성을 연결해주는 고리야. 광집진위성들은 루나인보다 훨씬 안쪽에, 그러니까 태양에 가깝게 떠있으니까 여기선 보이지도 않고 관측하기도 어렵지. 하지만 거기 있는 건 확실해. 어떻게 알 수 있냐구? 아직도 작동을 하고 있으니까. 만들어진지 수백년이 지났는데도 말이야."
김오는 상처가 아파오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팔목을 어루만졌다.
지석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원망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지만 지석은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전후가 어찌되었건 그를 묶어놓은 건 지석이었으니까.
"간단한 치료약 정도는 있습니다."
김오는 더부룩한 수염속에서 씩 웃었다.
"그 정도는 나도 있어."
지석은 계면쩍어서 씁쓸하게 마주 웃었다.
김오는 갑자기 지석의 오른손목을 와락 붙들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따라와."
지석은 이번에도 영문을 모르는 채 끌려갔다.
김오는 탑을 향해 다가갔다. 지석의 손목을 놓고 김오는 두 팔을 벌려 마을을 가리켰다.
"봐. 이 작은 도시가 어떻게 이 황무지 한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지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 탑 덕택이야. 이 탑은 원래 전력을 우주로부터 공급받아 사막의 모래를 분해해서 산소를 만들어내는 장치지. 하지만 이제 산소가 많아졌고 탑의 동력은 불필요해졌어. 바로 그 동력을 원천으로 마을이 생명력을 얻고 있었던 거야. 지하로부터 물을 뽑아내는 펌프도, 마을의 간이 농장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도 이 탑이야."
김오는 탑을 손으로 두드렸다.
"하지만 이 전쟁이 바꾸어 놓았지. 마을 사람들이 떠나고 마을이 이런식으로 버려지면 아무도 이제 이런 탑들에 신경을 쓰지 않을거야."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당연히! 당연히 문제가 되지. 생각해보게. 이 별에 숲이 있나? 바다가 있어? 이 별에 지금까지 산소를 공급한 건 이 산소환원탑들이야. 그런데 이 탑들이 이렇게 버려지다보면 언젠가는 이 별의 산소가 조금씩 사라져서 결국 이 별은 처음처럼 무인행성으로 돌아가 버려. 이 사소한 것 때문에."
"사소한 것."
"그래. 사소한 것."
지석은 입속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김오는 탑의 주위를 빙 둘러서 걸어갔다. 지석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김오는 통신기가 있는 곳에서 멈추어 선 다음 지석을 기다렸다.
"통신기를 작동시켜봤나?"
"통신은 불가능합니다."
김오는 싱글싱글 웃었다.
"자네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군. 통신이라면 위성통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김오는 통신기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남은 에너지 잔량을 확인했다.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김오는 손을 지석에게 내밀었다.
"랜턴. 랜턴을 줘보게."
지석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기대감속에서 부스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소형 랜턴을 들고 돌아왔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사막은 널판지가 물밑으로 가라앉듯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잠겨들었다. 김오는 랜턴불빛으로 지면을 이리저리 비추었다. 그러다가 한 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모래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지석은 그가 뭘 하는건지 금방 알아차렸다. 바람이 쌓아놓은 모래 아래 맨홀 뚜껑이 있었다. 지석도 함께 모래를 걷어냈다. 사람 하나가 넉넉하게 드나들만한 맨홀의 뚜껑이 드러났다.
"열어봐."
지석은 홀린 것처럼 그 뚜껑에 달라붙었다. 마치 무거운 추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뚜껑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오는 뭐가 즐거운지 히죽거렸다. 지석은 이를 악물고 뚜껑을 들어올렸다. 마침내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열리기 시작하자 그 다음은 쉬웠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동력선이 있어. 풀어헤쳐진 것들을 모조리 끌어내. 그 중에서 쓸 수 있는 것을 골라내야 하니까."
지석은 김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걸 왜 지금에서야 말해주는 겁니까."
김오는 어께를 으쓱 했다.
"아무도 묻질 않았잖아."
지석은 할말이 없어졌다. 지석은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김오가 랜턴을 비추어주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케이블들을 끄집어내자 마침내 김오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가져다 꽂아."
김오는 발끝으로 복잡한 선들중 하나를 툭 걷어찼다.
지석이 이리저리 뒤엉킨 케이블들을 짚어가며 끝부분을 찾고 있는 동안 김오는 통신기를 만지작거렸다. 마침내 지석은 케이블의 말단을 찾아냈다. 통신기에 케이블이 연결되자 패널은 잠깐 반짝거렸지만 금방 동력이 부족한지 깜빡거렸다. 김오는 통신기의 주파수를 처음보는 대역으로 조절했다. 지석은 김오의 어께 너머로 통신기를 들여다보았다.
"됐어."
"된 겁니까?"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김오는 일어나서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공위성이 없던 시절에는 이런 저런 전파들을 이용해서 통신을 했어. 통신기에 적외선에서 극초단파까지, 수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주파수가 있는 건 그 시절의 전통 때문이야. 행성 반대편까지는 불가능해도 상당히 먼 거리까지 교신이 가능하지. 출력만 충분하다면."
김오는 마치 신비로운 비밀을 말하듯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김오의 말은 그 듣기 싫은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신비로웠다.
김오는 지석의 등을 툭 쳤다.
"여기서 지켜봐. 행성이 제 방향을 가리키면 이 탑이 에너지를 전송 받을 테니까. 그럼 그 때는 통신이 가능해질 거야. 물론 받을 사람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김오는 랜턴을 만지작거리며 비탈 아래로 걸어갔다.
"마을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마을로 내려와."
김오의 모습은 조금씩 어둠과 동화되다가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졌다.
지석은 홀로 남겨졌다.
거대한 탑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명의 흔적? 또는 유적?
지석은 통신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입을 벌리면 모래가 들어와 입속에서 굴러다녔기 때문에 입은 꼭 다물고 있었다. 지석은 식어가는 지면의 열기를 붙잡으며 먼 곳의 광집진 위성이 이 작은 마을을 향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지상에는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의 충전단으로부터 끌어낸 동력케이블은 마치 미친 여자의 머릿단처럼 통신기의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통신기의 안테나는 마치 구원의 깃발이 걸린 깃대처럼 높이 솟아 바람에 휘청거렸다. 지석은 외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괴롭다고 생각했다.
탑도, 통신기도, 그리고 사막도 그와는 별개의 존재였다.
그는 가슴속의 상처를 움켜쥐었다.
통신기의 패널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환상이었는지 다시 제대로 보자 통신기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석은 몰랐지만 이미 광집진위성은 이 보잘 것 없는 탑을 향해 강력한 마이크로 웨이브를 전송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웨이브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아주 적은 것들만을 볼 수 있다.
지석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금방 다리가 저려왔다. 지석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왔다갔다했다. 그러다가 다시 패널을 들여다보고 다시 왔다갔다하다가 패널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지석은 패널 아래 이상한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을 찌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자 대기중이라는 글자가 간신히 식별되었다. 지석은 무심코 통신기의 스위치에 손을 댔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통신기의 점검장치들이 작동하면서 내부의 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팬은 몇초동안 바람으로 기계 내부의 모래와 먼지를 불어낸 뒤 정지했다. 그리고 패널에 불이 들어오면서 게이지가 시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게이지가 치솟기 시작했다. 출력을 표시하는 게이지는 표시된 눈금의 끝까지 올라가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지석은 탑을 치켜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탑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사막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지석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소리만 웅웅거리며 모래를 실어 날랐다.
기적.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래. 되는구나."
지석은 눈을 감았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다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하지만."
지석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이야. 설령 진짜로 저 늙은 병사의 말처럼. 그렇게 통신이 된다고 해도 말이야."
마치 통신기가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석은 중얼거렸다. 통신기는 그의 말을 전파에 실어 하늘로 쏘아 보냈다.
그래도 이젠 아무 소용이 없어. 나의 메시지를 받을 사람이 없는걸.
그래. 차라리 먼 별에 메시지를 보내자. 어쩌면 네가 이 메시지를 받을 지도 모르니까.
넌 아직도 어벤전에 있니?
나는 여기 루나인에 있다. 루나인의 이 끝없는 사막 한가운데 있어.
어벤전까지는 백 광년도 넘는다는데 너무 먼 거리야. 공간으로도, 시간으로도.
백년 뒤엔 나의 이 목소리가 어벤전에 닿을까?
그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니, 넌?
난 말이야. 어쩌면 난. 처음부터 이 뻔한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난 네가 너무나도 불쌍해서, 그래서 곁에 두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내가 틀렸던 걸까?
그래.
이렇게 세월이 자꾸 흘러가는데 왜 네 이름만이 나의 기억 속에 남는 걸까.
왜 너만이 잊혀지지 않는 걸까. 모든 것들이 희미해져 가는데.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아는 게 없다. 불쌍한 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거기 있니? 너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미안해. 민 중위.
잘자라.
센트럴 함대, 루나인 파견군, 지석 대위.
루나인에서 임무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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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11/12
날이 밝았다.
역시 아원보다는 하루가 짧다. 금방 해가 지고 금방 떠오른다.
간밤의 일들은 마치 꿈속의 광경처럼 아득히 멀었다.
작은 바위산의 정상에는 세 구의 시체?놓여 있었다.
한사람은 메다산. 한사람은 아키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류사다.
지석은 얼셈?쓸어내리다가 턱에 난 수염의 감촉을 느끼곤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김오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얼굴에도 거칠게 수염이 돋아나 있었다.
요한의 시체는 여전히 비탈에 놓여있었다.
지석은 천천히 몸을 비틀었다. 김오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직도 묶여있던 부위가 아픈지 손목을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다.
지석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무심코 가지고 다니던 장교 비망록을 꺼냈다. 모래 속에서 주은 것이었다.
"한가지만 물어보죠."
김오는 노트와 지석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거, 당신 겁니까?"
김오는 노트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잠시 속표지의 이름을 되뇌이다가 지석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내 것은 아니지만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지."
김오는 돌아섰다. 그리고 시체가 쌓여있는 마을을 향해 노트를 힘껏 던졌다.
펄럭거리며 노트는 제법 멀리까지 날아갔다.
지석은 노트가 떨어졌음직한 자리를 눈길로 어름하다가 가슴 가득 찬 새벽의 공기를 들이켰다.
김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간절히 바라는 일은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아마 바램이 조금 부족했던 모양이야. 난 아군이 수송기를 몰고 와서 나를 태우고 안락한 후방으로 데려다주길 바랬는데."
김오는 그러면서 빙그레 웃었다.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적군이 궤도를 모조리 장악했는데 말이야. 응?"
지석은 차라리 평온한 기분이 되어 김오의 웃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럼 왜 통신기로 신호를 보낸 겁니까. 잘못하면 적군이 몰려올텐데."
하지만 지석은 묻기 전에 이미 답을 알고있었다.
"외로워서. 혼자 이 지옥같은 마을에 남겨진다고 상상해봐."
김오는 자신의 가슴어름을 손으로 두드렸다.
"난 적이든 아군이든 만나고 싶었어. 적이라면 어서 찾아와서 죽여주길 바랬어."
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따위는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쉬고싶은 따름이었다. 그리고 물을 마시고 싶었다.
사막은 여전히 배타적인 색깔이었다. 그 모호함속에 많은 것들을 감춘채 지치고 망가진 지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지석 역시 사막의 열기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죽음이 죽음을 부르듯 모든 것들을 감싸고 나서 그 뒤엔 기억조차 남지 않게 깨끗이 지워버리는 저 방대한 부식작용의 한가운데서 인간의 하잘 것 없는 문명같은 건 금방 지워져 버릴 하나의 얼룩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문득 스쳐갔다.
지석은 작은 조약돌을 집어올렸다. 모래와 바람 때문에 풍화된 우둘투둘한 표면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지석은 가슴속의 상처에 대해 생각했다. 어벤전에서 퇴각한 후 전술조가 해체될 때 조장은 지석에게 작은 돌맹이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 돌맹이에 새겨진 만큼의 상처를 난 가슴에 가지고 있다. 지석. 너도 언젠가 조장이 되면 알 수 있을 거다.
바람이 불어왔다. 지석은 돌을 떨구었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들도 뿌리쳤다.
지석은 그늘진 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웅크리고 잠을 잤다.
"재미있는 걸 가르쳐 줄까?"
김오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지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석은 눈알이 빠져나갈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해는 벌써 서쪽하늘에 걸려있었다.
"일어나. 이제 잘만큼 잤으니까."
지석은 눈을 조심조심 문질렀다. 눈도 눈이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따라와."
지석은 멀어져가는 김오를 보고 허둥지둥 일어났다.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흘러왔다.
"뭡니까."
김오는 석양을 받으며 뭔가 큼직한 물건을 들어올렸다.
"너 때문에 여기까지 가지고 왔어."
그건 작은 솥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끄무레한 액체가 끓고 있었다.
"헛. 뜨거워. 이리 와서 조금 거들어. 저기 평평한 곳까지 가지고 가게."
지석은 시키는대로 했다. 따스한 석양이 김오의 옆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숟가락 정도는 있겠지?"
그건 식사였다. 따뜻하고 수분이 많은 식사.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가 그다지도 축복받은 것임을 지석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물도 있었다.
"한꺼번에 많이 마시지 않는게 좋아. 익숙하지 않은 몸이 탈을 일으키거든."
하지만 지석은 목젖을 울리며 물을 들이켰다. 상상이 아니라 진짜였다.
김오는 이미 다 꺼져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음정도 맞지 않는 콧노래를 불렀다. 군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속한 노래인 것도 아니었다. 지석은 모르는 노래였지만 왠지 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오는 덥수룩한 수염이 난 입가를 소매로 문질렀다.
"내가 진짜 재미있는 걸 가르쳐줄까?"
지석은 따끈한 모래위에 드러누운 채 김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별의 사람들은 주로 적도 근처에 모여서 살아. 적도에 점퍼가 있으니까. 적도에서 조금만 고위도로 올라가면 아주 적은 숫자의 마을이 있을 뿐이지. 얼핏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힘들어. 이 외딴 곳의 생활은. 하지만 사람들은 굳이 이렇게 적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생활을 해나가지. 식량은 완전히 자급자족. 기계나 좀 복잡한 도구 같은 건 먼 곳의 도시에서 사오는데 일 년에 한두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야. 그런데 이 마을들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어."
김오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탑을 가리켰다.
"바로 이 탑들이야. 산소 환원탑."
김오가 가리키는 순간 탑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갑자기 지석의 시야에 뛰어들었다.
"이 탑은 바로 먼 우주에 점점이 떠있는 광집진 위성들과 이 행성을 연결해주는 고리야. 광집진위성들은 루나인보다 훨씬 안쪽에, 그러니까 태양에 가깝게 떠있으니까 여기선 보이지도 않고 관측하기도 어렵지. 하지만 거기 있는 건 확실해. 어떻게 알 수 있냐구? 아직도 작동을 하고 있으니까. 만들어진지 수백년이 지났는데도 말이야."
김오는 상처가 아파오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팔목을 어루만졌다.
지석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원망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지만 지석은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전후가 어찌되었건 그를 묶어놓은 건 지석이었으니까.
"간단한 치료약 정도는 있습니다."
김오는 더부룩한 수염속에서 씩 웃었다.
"그 정도는 나도 있어."
지석은 계면쩍어서 씁쓸하게 마주 웃었다.
김오는 갑자기 지석의 오른손목을 와락 붙들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따라와."
지석은 이번에도 영문을 모르는 채 끌려갔다.
김오는 탑을 향해 다가갔다. 지석의 손목을 놓고 김오는 두 팔을 벌려 마을을 가리켰다.
"봐. 이 작은 도시가 어떻게 이 황무지 한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지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 탑 덕택이야. 이 탑은 원래 전력을 우주로부터 공급받아 사막의 모래를 분해해서 산소를 만들어내는 장치지. 하지만 이제 산소가 많아졌고 탑의 동력은 불필요해졌어. 바로 그 동력을 원천으로 마을이 생명력을 얻고 있었던 거야. 지하로부터 물을 뽑아내는 펌프도, 마을의 간이 농장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도 이 탑이야."
김오는 탑을 손으로 두드렸다.
"하지만 이 전쟁이 바꾸어 놓았지. 마을 사람들이 떠나고 마을이 이런식으로 버려지면 아무도 이제 이런 탑들에 신경을 쓰지 않을거야."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당연히! 당연히 문제가 되지. 생각해보게. 이 별에 숲이 있나? 바다가 있어? 이 별에 지금까지 산소를 공급한 건 이 산소환원탑들이야. 그런데 이 탑들이 이렇게 버려지다보면 언젠가는 이 별의 산소가 조금씩 사라져서 결국 이 별은 처음처럼 무인행성으로 돌아가 버려. 이 사소한 것 때문에."
"사소한 것."
"그래. 사소한 것."
지석은 입속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김오는 탑의 주위를 빙 둘러서 걸어갔다. 지석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김오는 통신기가 있는 곳에서 멈추어 선 다음 지석을 기다렸다.
"통신기를 작동시켜봤나?"
"통신은 불가능합니다."
김오는 싱글싱글 웃었다.
"자네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군. 통신이라면 위성통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김오는 통신기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남은 에너지 잔량을 확인했다.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김오는 손을 지석에게 내밀었다.
"랜턴. 랜턴을 줘보게."
지석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기대감속에서 부스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소형 랜턴을 들고 돌아왔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사막은 널판지가 물밑으로 가라앉듯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잠겨들었다. 김오는 랜턴불빛으로 지면을 이리저리 비추었다. 그러다가 한 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모래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지석은 그가 뭘 하는건지 금방 알아차렸다. 바람이 쌓아놓은 모래 아래 맨홀 뚜껑이 있었다. 지석도 함께 모래를 걷어냈다. 사람 하나가 넉넉하게 드나들만한 맨홀의 뚜껑이 드러났다.
"열어봐."
지석은 홀린 것처럼 그 뚜껑에 달라붙었다. 마치 무거운 추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뚜껑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오는 뭐가 즐거운지 히죽거렸다. 지석은 이를 악물고 뚜껑을 들어올렸다. 마침내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열리기 시작하자 그 다음은 쉬웠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동력선이 있어. 풀어헤쳐진 것들을 모조리 끌어내. 그 중에서 쓸 수 있는 것을 골라내야 하니까."
지석은 김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걸 왜 지금에서야 말해주는 겁니까."
김오는 어께를 으쓱 했다.
"아무도 묻질 않았잖아."
지석은 할말이 없어졌다. 지석은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김오가 랜턴을 비추어주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케이블들을 끄집어내자 마침내 김오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가져다 꽂아."
김오는 발끝으로 복잡한 선들중 하나를 툭 걷어찼다.
지석이 이리저리 뒤엉킨 케이블들을 짚어가며 끝부분을 찾고 있는 동안 김오는 통신기를 만지작거렸다. 마침내 지석은 케이블의 말단을 찾아냈다. 통신기에 케이블이 연결되자 패널은 잠깐 반짝거렸지만 금방 동력이 부족한지 깜빡거렸다. 김오는 통신기의 주파수를 처음보는 대역으로 조절했다. 지석은 김오의 어께 너머로 통신기를 들여다보았다.
"됐어."
"된 겁니까?"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김오는 일어나서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공위성이 없던 시절에는 이런 저런 전파들을 이용해서 통신을 했어. 통신기에 적외선에서 극초단파까지, 수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주파수가 있는 건 그 시절의 전통 때문이야. 행성 반대편까지는 불가능해도 상당히 먼 거리까지 교신이 가능하지. 출력만 충분하다면."
김오는 마치 신비로운 비밀을 말하듯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김오의 말은 그 듣기 싫은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신비로웠다.
김오는 지석의 등을 툭 쳤다.
"여기서 지켜봐. 행성이 제 방향을 가리키면 이 탑이 에너지를 전송 받을 테니까. 그럼 그 때는 통신이 가능해질 거야. 물론 받을 사람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김오는 랜턴을 만지작거리며 비탈 아래로 걸어갔다.
"마을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마을로 내려와."
김오의 모습은 조금씩 어둠과 동화되다가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졌다.
지석은 홀로 남겨졌다.
거대한 탑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명의 흔적? 또는 유적?
지석은 통신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입을 벌리면 모래가 들어와 입속에서 굴러다녔기 때문에 입은 꼭 다물고 있었다. 지석은 식어가는 지면의 열기를 붙잡으며 먼 곳의 광집진 위성이 이 작은 마을을 향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지상에는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의 충전단으로부터 끌어낸 동력케이블은 마치 미친 여자의 머릿단처럼 통신기의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통신기의 안테나는 마치 구원의 깃발이 걸린 깃대처럼 높이 솟아 바람에 휘청거렸다. 지석은 외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괴롭다고 생각했다.
탑도, 통신기도, 그리고 사막도 그와는 별개의 존재였다.
그는 가슴속의 상처를 움켜쥐었다.
통신기의 패널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환상이었는지 다시 제대로 보자 통신기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석은 몰랐지만 이미 광집진위성은 이 보잘 것 없는 탑을 향해 강력한 마이크로 웨이브를 전송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웨이브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아주 적은 것들만을 볼 수 있다.
지석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금방 다리가 저려왔다. 지석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왔다갔다했다. 그러다가 다시 패널을 들여다보고 다시 왔다갔다하다가 패널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지석은 패널 아래 이상한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을 찌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자 대기중이라는 글자가 간신히 식별되었다. 지석은 무심코 통신기의 스위치에 손을 댔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통신기의 점검장치들이 작동하면서 내부의 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팬은 몇초동안 바람으로 기계 내부의 모래와 먼지를 불어낸 뒤 정지했다. 그리고 패널에 불이 들어오면서 게이지가 시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게이지가 치솟기 시작했다. 출력을 표시하는 게이지는 표시된 눈금의 끝까지 올라가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지석은 탑을 치켜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탑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사막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지석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소리만 웅웅거리며 모래를 실어 날랐다.
기적.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래. 되는구나."
지석은 눈을 감았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다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하지만."
지석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이야. 설령 진짜로 저 늙은 병사의 말처럼. 그렇게 통신이 된다고 해도 말이야."
마치 통신기가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석은 중얼거렸다. 통신기는 그의 말을 전파에 실어 하늘로 쏘아 보냈다.
그래도 이젠 아무 소용이 없어. 나의 메시지를 받을 사람이 없는걸.
그래. 차라리 먼 별에 메시지를 보내자. 어쩌면 네가 이 메시지를 받을 지도 모르니까.
넌 아직도 어벤전에 있니?
나는 여기 루나인에 있다. 루나인의 이 끝없는 사막 한가운데 있어.
어벤전까지는 백 광년도 넘는다는데 너무 먼 거리야. 공간으로도, 시간으로도.
백년 뒤엔 나의 이 목소리가 어벤전에 닿을까?
그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니, 넌?
난 말이야. 어쩌면 난. 처음부터 이 뻔한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난 네가 너무나도 불쌍해서, 그래서 곁에 두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내가 틀렸던 걸까?
그래.
이렇게 세월이 자꾸 흘러가는데 왜 네 이름만이 나의 기억 속에 남는 걸까.
왜 너만이 잊혀지지 않는 걸까. 모든 것들이 희미해져 가는데.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아는 게 없다. 불쌍한 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거기 있니? 너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미안해. 민 중위.
잘자라.
센트럴 함대, 루나인 파견군, 지석 대위.
루나인에서 임무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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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