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연대기 - 작가 : magegarden
글 수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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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06/12
흐릿한 증기가 시선을 가리고 있었다.
앞장선 동료들이 포식덩굴을 헤치면서 길을 내고 있었다. 동료들의 손에 들린 정글도는 짙은 납빛의 수액으로 젖어있었다. 곁의 동료가 치켜든 정글도에서 수액이 흘러내려 진흙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어벤전에는 알려진 것만 사만 종 이상의 식물형 생물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다. 식물이라는 분류는 사실 그리 정확한 게 아니다. 원래 이 행성에 살던 생물은 모조리 한 갈래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따라서 굳이 분류를 하자면 모조리 식물이 되어야 하는데 이 행성의 식물들은 동물들 못지 않게 역동적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다른 식물을 잡아먹는 포식성 식물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살아가는 부유식물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성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동물과 식물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 아마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만 이 별에 엄청나게 퍼진 엘로힘이나 클레이톡신은 이 별에서 탄생한 생물이 아니다. 다른 별에서 이 별로 날아든 외계 생물이다. 사람처럼.
"젠장. 지긋지긋한 똥구덩이."
투덜거리는 룬겐의 말투에는 노여움보다는 피로가 진하게 담겨있었다. 지석은 손을 내밀었다. 미끄러져 넘어진 룬겐은 지석의 손을 잡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긴 줄기가 룬겐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처음 이 별에 내려왔을 때라면 기겁을 했겠지만 이젠 무감각했다. 다들 이곳의 식물들이 인간이나 인간의 장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으니까.
룬겐은 덩굴의 단단한 섬유질 다발을 정글도로 내리찍고 발로 걷어찼다.
"얼마 안남았어. 다들 힘을 내라."
대원들은 숙영을 할만한 단단한 지면을 찾아 전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경 300Km의 거대한 늪지 한가운데 그들이 놓여 있었다.
"잠깐!"
누군가 소리쳤다.
대원들이 멈추어서고 헬멧 안쪽에서 어두운 적색등이 켜졌다. 조준경고등이다. 누군가 그들을 조준하고 있다. 지석은 몸을 던져 나무 아래 숨었다. 시야에 얼핏 스쳐간 대원중의 한명이 붉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붉은 목도리? 지석은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오싹한 한기가 등을 타고 솟구쳤다. 누군가 인터컴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들게 만드는 단말마의 발버둥.
"응사해라!"
조장의 간결한 명령. 그리고 뒤이어 틱틱거리는 소음이 청음센서 가득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어간다. 레일건의 놀랄만한 정숙성은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삼십미터쯤 떨어진 곳에 조장이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청음초! 뭐냐!"
청음초는 릴이었다. 릴이 응답했다.
"러잘키입니다! 숫자는 칠십 이상. 탄도는 마구 흩어져 있습니다. 사방에서 날아오고 있습니다!"
"릴! 목소리가 왜 그래?"
"다리가... 다리에 맞았습니다."
지석은 엎드린 채로 몸을 더듬어 되는대로 비살상 그레네이드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차례대로 까서 던졌다. 칙칙거리는 소리와 함께 프리즘 가스와 스모그가 퍼져나갔다. 총탄이 날아와 지석의 헬멧 근처에서 흙을 튀겼다.
"누구야! 스모크를 던진게!"
"지석입니다!"
"지석! 릴에게 가까이 있나?"
조장은 라디오를 켜고 있었다. 인터컴의 목소리에 직직거리는 소리가 섞여있었다.
"예! 지금 릴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다리에 맞았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다리만 포기하면 되니까. 문제는 빨리 구멍난 부분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냥 놔두면 지독한 이 별의 공기가 전투복 안을 가득 메워버릴 것이다. 릴은 바닥에 바싹 엎드려 있었다. 이미 스스로 응급처치를 한 듯 전투복의 다리부분에는 온통 접착용제가 칠해져 있었다.
"릴!"
"지석?"
지석은 릴의 상태를 살폈다. 호흡이 불규칙했다. 그리고 얼굴부분에 김이 서리고 있었다. 공기조절유닛이 비정상적인 작동을 하고있는 것이다.
"일단 지혈제부터 놓자."
지석은 릴의 허리춤을 뒤져 자동주사기를 꺼냈다. 그리고 상처부위에서 한뼘쯤 올라간 곳에 주사기를 대고 힘껏 눌렀다. 짤깍하는 소리와 함께 주사기가 작아졌다.
"지석. 이상해. 만일 적이 움직이고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아무 소리도 없이 움직인다는 건 이해가 안돼. 그렇지?"
"그래! 그게 뭐 어쨌다고?"
"놈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인터컴에서 아코 중위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아코! 아코!"
청음센서에서 고음의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음장치는 지나치게 큰 소리가 나면 소리를 걸러버린다. 누군가 지근거리에서 콜라를 터뜨린 것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식물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석은 소총에서 스트링 블레이드를 분리했다. 단분자섬유의 칼날이 부르르 떨며 광란의 감각을 되살리고 있었다. 지석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전투가 끝난 뒤 대원들은 조장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적들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눈깜짝할 새에 기습을 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임무를 다시 편성해야겠군."
조장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려고 안쓰러울 만큼 애를 쓰고 있었다.
"이봐. 민."
"예?"
"아무런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했나?"
지석은 민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그가 서있는 자리에서는 아코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코는 콜라 투척기를 어께에 걸머진채 장승처럼 우뚝 서있었다. 아코의 전투복은 때운 흔적으로 너덜너덜 했다. 아마 몸 안쪽도 성하지는 않으리라고 짐작했다.
"아무 느낌도 없었어?"
"그냥 똑같았습니다."
"똑같다니?"
"아무런 조짐도 없었습니다. 계속 그냥 간지러운 느낌이 있었어요. 그 밖에는."
조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대원들을 훑어보았다. 대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체들은 진창과 범벅이 되어 정신없이 널부러져 있었고 콜라가 터지고 난 둥근 웅덩이가 사방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릴."
"예."
"분명히 러잘키였나?"
러잘키는 적군의 소총이다. 그 이름이 시사하는 것처럼 아군에는 악몽이요 적군에게는 구원이다. 연방군의 베이직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좋아. 일단 보고를 하지. 어쩌면 우리가 적군과 조우한 최초의 팀이 될지도 모르겠군."
조장은 헬멧속에서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부터 적을 추적해야 한다. 부상당한 대원들은 두명씩 팀을 짜서 후송선이 내려올 때까지 교대로 운반한다."
조장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는 릴이 내려놓은 고성능 집진장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지석은 대원들의 틈에 섞여 조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 선두를 개척할 사람이 줄어든다는 건 좋지 않다. 지석은 입속에 침이 마르는 걸 느꼈다.
"새로운 청음초가 필요하군."
조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오갈이 조장 앞으로 걸아갔다.
"제가 하겠습니다. 조장."
"리오갈?"
"제 부특기가 청음이니까 저 밖에 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조장은 한참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럼 리오갈이 하지. 전원, 정렬해라. 출발한다. 대형은.........."
적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추적하는 건 불가능했다. 밀림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클레이톡신을 상대하다보면 어느새 엉뚱한 자리에 도달해 있곤 했고 하루 이상 지난 흔적은 부식성이 강한 대기와 습한 지면으로 인해 금방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날 밤. 민은 심한 두통을 앓았다.
"어떻게 생각해?"
"뭘?"
룬겐과 나란히 보초를 서고있던 지석은 청음장치에서 계속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 때문에 신경을 극도로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 임무 말이야."
"잠깐. 룬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아?"
"CT(클레이톡신)가 짝짓기라도 하나보지."
룬겐은 씹는 담배를 질겅질겅 깨물면서 지석을 향해 웃음지었다.
"신경 꺼."
"쳇. CT는 양성동체야. 짝짓기 따위 안해."
"그럼 자위라도 하는 건가?"
"너나 실컷 해라."
룬겐은 총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자위하는 시늉을 했다.
"그만 둬. 룬겐. 그러다가 발정난 클레이라도 달려들면 어쩔려구."
"흥. 까짓거. 화끈하게 한판 뜨는 거야. 밀림의 고독한 밤을 불태우는 거지."
".............."
지석은 쓴웃음을 거두었다. 룬겐은 교목의 헛뿌리에 발을 문질러 진흙을 긁어내며 탄창을 점검했다.
"지루하군. 정말 지루해."
"룬겐. 별이 안보인다는 거 어떻게 생각해?"
"별이 안보이는 건 대기가 탁하다는 뜻이지. 그래. 정말 탁하군. 꼭 기산의 하늘 같아."
"룬겐, 기산 출신이었어?"
룬겐은 씹던 담배를 혀끝으로 말아 헬멧 가장자리에 떨구었다. 그의 헬멧 안쪽에는 늘 담배 찌꺼기가 쌓여 있었다. 헬멧을 벗을 기회가 생길때까지 담배는 계속 헬멧 안에 쌓이는 것이다.
"지석."
"왜."
우중충한 외계 생물들의 소리가 밀림안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지석은 귀를 기울였다. 썩은 나무가 늪속으로 침잠하는 소리. 그리고 덩굴이 약삭빠르게 가지에서 가지로 기어가는 소리. 그리고 어떤 짐승인가가 절벅거리며 늪지를 걸어가는 소리.
"이 임무. 실패할 거다."
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시간 뒤 적의 기습이 있었다.
숙영지는 적의 콜라를 얻어맞고 산산조각이 나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사격을 해라! 응사를 해!"
헬멧만 벗고 압력텐트에서 자고있던 대원들은 헬멧을 찾아 버둥거리다가 적의 저격에 쓰러져 피거품을 물었다.
프리즘 가스가 피어오르고 아군의 응사가 시작되자 적들은 나타날 때 그랬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시체는 모두 아군의 것이었다. 대원들은 넋이 나간 것처럼 군데군데 서서 남겨진 것들을 바라보았다.
룬겐도, 아코도 죽었다. 하지만 민이는 무사했다. 모든 총알이 그녀를 비껴가는 것처럼 보였다. 눈물은 아직 아껴두어야 했다.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조장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원들을 수습했다. 남은 인원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조장은 라디오를 켠 채 고개를 수그리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거의 한시간동안 말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조장은 고개를 들어 실핏줄이 그어진 눈으로 대원들을 노려보았다. 대원들은 각자의 불안감 속에서 조장의 말을 기다렸다.
"아티카로부터 방금 연락이 왔다."
마침내 조장이 입을 열었다.
"아티카는.....잠깐. 왜 정풍이 아니고 아티카입니까?"
"정풍은 격침당했다. 세 시간 전에."
"격.....침....."
"정풍이 말입니까?"
"왜........왜 정풍이."
조장은 놀랄만큼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린 함정에 빠진 건지도 모르겠군."
우주군에서는 모함을 잃은 강하병들을 미아라고 부른다. 부모를 잃은 미아.
릴은 자신이 가까운 시일 내에 후송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살을 택했다. 일행에게 짐이 되기엔 상황이 너무나 나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릴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혹시라도 적이 듣게 될까 저어하여 총도 사용하지 않고 전투복의 커버를 열어서 독이 든 대기를 들이마시는 방법을 선택했다. 시체는 검푸른 색이었다.
밀림속에서의 임무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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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06/12
흐릿한 증기가 시선을 가리고 있었다.
앞장선 동료들이 포식덩굴을 헤치면서 길을 내고 있었다. 동료들의 손에 들린 정글도는 짙은 납빛의 수액으로 젖어있었다. 곁의 동료가 치켜든 정글도에서 수액이 흘러내려 진흙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어벤전에는 알려진 것만 사만 종 이상의 식물형 생물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다. 식물이라는 분류는 사실 그리 정확한 게 아니다. 원래 이 행성에 살던 생물은 모조리 한 갈래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따라서 굳이 분류를 하자면 모조리 식물이 되어야 하는데 이 행성의 식물들은 동물들 못지 않게 역동적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다른 식물을 잡아먹는 포식성 식물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살아가는 부유식물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성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동물과 식물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 아마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만 이 별에 엄청나게 퍼진 엘로힘이나 클레이톡신은 이 별에서 탄생한 생물이 아니다. 다른 별에서 이 별로 날아든 외계 생물이다. 사람처럼.
"젠장. 지긋지긋한 똥구덩이."
투덜거리는 룬겐의 말투에는 노여움보다는 피로가 진하게 담겨있었다. 지석은 손을 내밀었다. 미끄러져 넘어진 룬겐은 지석의 손을 잡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긴 줄기가 룬겐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처음 이 별에 내려왔을 때라면 기겁을 했겠지만 이젠 무감각했다. 다들 이곳의 식물들이 인간이나 인간의 장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으니까.
룬겐은 덩굴의 단단한 섬유질 다발을 정글도로 내리찍고 발로 걷어찼다.
"얼마 안남았어. 다들 힘을 내라."
대원들은 숙영을 할만한 단단한 지면을 찾아 전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경 300Km의 거대한 늪지 한가운데 그들이 놓여 있었다.
"잠깐!"
누군가 소리쳤다.
대원들이 멈추어서고 헬멧 안쪽에서 어두운 적색등이 켜졌다. 조준경고등이다. 누군가 그들을 조준하고 있다. 지석은 몸을 던져 나무 아래 숨었다. 시야에 얼핏 스쳐간 대원중의 한명이 붉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붉은 목도리? 지석은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오싹한 한기가 등을 타고 솟구쳤다. 누군가 인터컴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들게 만드는 단말마의 발버둥.
"응사해라!"
조장의 간결한 명령. 그리고 뒤이어 틱틱거리는 소음이 청음센서 가득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어간다. 레일건의 놀랄만한 정숙성은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삼십미터쯤 떨어진 곳에 조장이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청음초! 뭐냐!"
청음초는 릴이었다. 릴이 응답했다.
"러잘키입니다! 숫자는 칠십 이상. 탄도는 마구 흩어져 있습니다. 사방에서 날아오고 있습니다!"
"릴! 목소리가 왜 그래?"
"다리가... 다리에 맞았습니다."
지석은 엎드린 채로 몸을 더듬어 되는대로 비살상 그레네이드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차례대로 까서 던졌다. 칙칙거리는 소리와 함께 프리즘 가스와 스모그가 퍼져나갔다. 총탄이 날아와 지석의 헬멧 근처에서 흙을 튀겼다.
"누구야! 스모크를 던진게!"
"지석입니다!"
"지석! 릴에게 가까이 있나?"
조장은 라디오를 켜고 있었다. 인터컴의 목소리에 직직거리는 소리가 섞여있었다.
"예! 지금 릴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다리에 맞았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다리만 포기하면 되니까. 문제는 빨리 구멍난 부분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냥 놔두면 지독한 이 별의 공기가 전투복 안을 가득 메워버릴 것이다. 릴은 바닥에 바싹 엎드려 있었다. 이미 스스로 응급처치를 한 듯 전투복의 다리부분에는 온통 접착용제가 칠해져 있었다.
"릴!"
"지석?"
지석은 릴의 상태를 살폈다. 호흡이 불규칙했다. 그리고 얼굴부분에 김이 서리고 있었다. 공기조절유닛이 비정상적인 작동을 하고있는 것이다.
"일단 지혈제부터 놓자."
지석은 릴의 허리춤을 뒤져 자동주사기를 꺼냈다. 그리고 상처부위에서 한뼘쯤 올라간 곳에 주사기를 대고 힘껏 눌렀다. 짤깍하는 소리와 함께 주사기가 작아졌다.
"지석. 이상해. 만일 적이 움직이고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아무 소리도 없이 움직인다는 건 이해가 안돼. 그렇지?"
"그래! 그게 뭐 어쨌다고?"
"놈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인터컴에서 아코 중위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아코! 아코!"
청음센서에서 고음의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음장치는 지나치게 큰 소리가 나면 소리를 걸러버린다. 누군가 지근거리에서 콜라를 터뜨린 것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식물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석은 소총에서 스트링 블레이드를 분리했다. 단분자섬유의 칼날이 부르르 떨며 광란의 감각을 되살리고 있었다. 지석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전투가 끝난 뒤 대원들은 조장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적들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눈깜짝할 새에 기습을 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임무를 다시 편성해야겠군."
조장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려고 안쓰러울 만큼 애를 쓰고 있었다.
"이봐. 민."
"예?"
"아무런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했나?"
지석은 민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그가 서있는 자리에서는 아코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코는 콜라 투척기를 어께에 걸머진채 장승처럼 우뚝 서있었다. 아코의 전투복은 때운 흔적으로 너덜너덜 했다. 아마 몸 안쪽도 성하지는 않으리라고 짐작했다.
"아무 느낌도 없었어?"
"그냥 똑같았습니다."
"똑같다니?"
"아무런 조짐도 없었습니다. 계속 그냥 간지러운 느낌이 있었어요. 그 밖에는."
조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대원들을 훑어보았다. 대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체들은 진창과 범벅이 되어 정신없이 널부러져 있었고 콜라가 터지고 난 둥근 웅덩이가 사방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릴."
"예."
"분명히 러잘키였나?"
러잘키는 적군의 소총이다. 그 이름이 시사하는 것처럼 아군에는 악몽이요 적군에게는 구원이다. 연방군의 베이직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좋아. 일단 보고를 하지. 어쩌면 우리가 적군과 조우한 최초의 팀이 될지도 모르겠군."
조장은 헬멧속에서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부터 적을 추적해야 한다. 부상당한 대원들은 두명씩 팀을 짜서 후송선이 내려올 때까지 교대로 운반한다."
조장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는 릴이 내려놓은 고성능 집진장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지석은 대원들의 틈에 섞여 조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 선두를 개척할 사람이 줄어든다는 건 좋지 않다. 지석은 입속에 침이 마르는 걸 느꼈다.
"새로운 청음초가 필요하군."
조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오갈이 조장 앞으로 걸아갔다.
"제가 하겠습니다. 조장."
"리오갈?"
"제 부특기가 청음이니까 저 밖에 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조장은 한참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럼 리오갈이 하지. 전원, 정렬해라. 출발한다. 대형은.........."
적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추적하는 건 불가능했다. 밀림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클레이톡신을 상대하다보면 어느새 엉뚱한 자리에 도달해 있곤 했고 하루 이상 지난 흔적은 부식성이 강한 대기와 습한 지면으로 인해 금방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날 밤. 민은 심한 두통을 앓았다.
"어떻게 생각해?"
"뭘?"
룬겐과 나란히 보초를 서고있던 지석은 청음장치에서 계속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 때문에 신경을 극도로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 임무 말이야."
"잠깐. 룬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아?"
"CT(클레이톡신)가 짝짓기라도 하나보지."
룬겐은 씹는 담배를 질겅질겅 깨물면서 지석을 향해 웃음지었다.
"신경 꺼."
"쳇. CT는 양성동체야. 짝짓기 따위 안해."
"그럼 자위라도 하는 건가?"
"너나 실컷 해라."
룬겐은 총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자위하는 시늉을 했다.
"그만 둬. 룬겐. 그러다가 발정난 클레이라도 달려들면 어쩔려구."
"흥. 까짓거. 화끈하게 한판 뜨는 거야. 밀림의 고독한 밤을 불태우는 거지."
".............."
지석은 쓴웃음을 거두었다. 룬겐은 교목의 헛뿌리에 발을 문질러 진흙을 긁어내며 탄창을 점검했다.
"지루하군. 정말 지루해."
"룬겐. 별이 안보인다는 거 어떻게 생각해?"
"별이 안보이는 건 대기가 탁하다는 뜻이지. 그래. 정말 탁하군. 꼭 기산의 하늘 같아."
"룬겐, 기산 출신이었어?"
룬겐은 씹던 담배를 혀끝으로 말아 헬멧 가장자리에 떨구었다. 그의 헬멧 안쪽에는 늘 담배 찌꺼기가 쌓여 있었다. 헬멧을 벗을 기회가 생길때까지 담배는 계속 헬멧 안에 쌓이는 것이다.
"지석."
"왜."
우중충한 외계 생물들의 소리가 밀림안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지석은 귀를 기울였다. 썩은 나무가 늪속으로 침잠하는 소리. 그리고 덩굴이 약삭빠르게 가지에서 가지로 기어가는 소리. 그리고 어떤 짐승인가가 절벅거리며 늪지를 걸어가는 소리.
"이 임무. 실패할 거다."
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시간 뒤 적의 기습이 있었다.
숙영지는 적의 콜라를 얻어맞고 산산조각이 나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사격을 해라! 응사를 해!"
헬멧만 벗고 압력텐트에서 자고있던 대원들은 헬멧을 찾아 버둥거리다가 적의 저격에 쓰러져 피거품을 물었다.
프리즘 가스가 피어오르고 아군의 응사가 시작되자 적들은 나타날 때 그랬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시체는 모두 아군의 것이었다. 대원들은 넋이 나간 것처럼 군데군데 서서 남겨진 것들을 바라보았다.
룬겐도, 아코도 죽었다. 하지만 민이는 무사했다. 모든 총알이 그녀를 비껴가는 것처럼 보였다. 눈물은 아직 아껴두어야 했다.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조장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원들을 수습했다. 남은 인원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조장은 라디오를 켠 채 고개를 수그리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거의 한시간동안 말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조장은 고개를 들어 실핏줄이 그어진 눈으로 대원들을 노려보았다. 대원들은 각자의 불안감 속에서 조장의 말을 기다렸다.
"아티카로부터 방금 연락이 왔다."
마침내 조장이 입을 열었다.
"아티카는.....잠깐. 왜 정풍이 아니고 아티카입니까?"
"정풍은 격침당했다. 세 시간 전에."
"격.....침....."
"정풍이 말입니까?"
"왜........왜 정풍이."
조장은 놀랄만큼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린 함정에 빠진 건지도 모르겠군."
우주군에서는 모함을 잃은 강하병들을 미아라고 부른다. 부모를 잃은 미아.
릴은 자신이 가까운 시일 내에 후송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살을 택했다. 일행에게 짐이 되기엔 상황이 너무나 나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릴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혹시라도 적이 듣게 될까 저어하여 총도 사용하지 않고 전투복의 커버를 열어서 독이 든 대기를 들이마시는 방법을 선택했다. 시체는 검푸른 색이었다.
밀림속에서의 임무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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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 못본게 안타깝군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