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5.
2학기가 개강하는 첫 수업이 끝나자 조는 교탁 앞의 맨 앞자리에서 일어나 교수가 나간 앞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는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우르르 몰려나온 학생들과 그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조는 학생들과 담배 연기를 요리조리 피해 지하 2층에서 올라와 지상의 건물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긴 한 숨이 나왔다.
학교로 복학했지만 아는 얼굴이 드물었고 그나마 알고 지냈던 동기들은 학년이 달랐다. 어느새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학교는 재미없는 곳이었다. 이제 류도 없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리곤 했다.
서류상으로는 2월부로 전역했지만 조는 여전히 회사에 남아 있었다. 제이는 오히려 학교 생활에 전념하고 졸업 이후 취직해 남들처럼 평범한 진로를 선택할 것은 권유했지만 조는 웬일인지 회사에 남고 싶었다. 넉넉한 보수에 등록금을 보장하는 쓸만한 직장이기 때문인지, 제이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군 입대 전 계속 장학금을 타긴 했지만 학교생활은 재미없었고 이제 장학금을 타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으니 학교생활은 더욱 무료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3학년 1학기에도 장학금을 놓치지는 않았다. 마음을 비워서 더욱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 책이나 빌리기 위해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조는 오렌지색 반팔 티츠에 베이지색 치노 바지 차림이었다. 고개를 올라가는 길이기에 셔츠 안쪽에서 땀이 배어나왔지만 확실히 더위는 한 풀 꺾여 있었다. 스물다섯 살의 여름도 끝나가고 있었다.
중앙 도서관 입구에서 바코드로 학생증을 인식시킨 후 들어가 소설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있을 때 누군가 조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조는 그쪽을 바라보고 3초 쯤 지나서야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마르고 작은 키에 이마가 넓고 눈이 똘망똘망한 두 학번 아래 후배인 원이었다.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채 인사도 하지 않는 김과 함께였다. 조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까딱하고 숙인 후에 옆 서가로 옮겼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몰랐어? 예비역 선배. 전설적인 학점의 주인공.”
“전설적인 학점?”
“응, 1학년 1학기부터 군대에 갔던 2학년 2학기까지 전과목을 모두 A+로 깔았다잖아.”
“어쩐지 좀 비정상적으로 보였어.”
먼 거리에 있어서 들리지 않을 줄 알고 둘은 속삭이고 있었지만 군에서 집중적인 훈련을 받고 정보 업무에 종사하는 조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책을 보고 있는 척했던 조는 원과 김을 향해 고개를 돌릴까 하다가 그만두고는 더 이상 듣는 것도 포기했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
“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지?”
“두발과 교복 단속이 없다는 것 외에는 고등학교와 똑같아.”
“고등학교보다 자유가 더 보장된다는 뜻이군.”
“그렇긴 하지만 재미없어. 따분해.”
조와 제이는 팀장과 정이 퇴근한 호텔 사무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제이는 우울한 마일즈 데이비스의 CD를 걸어놓았다. 조와 제이가 서류상으로 전역한 후 팀장은 사무실에서 대기하기보다 퇴근하는 날이 늘었고 정도 출퇴근하면서 조와 제이를 닦달하는 횟수도 줄었다.
“나는 애저녁에 대학 같은 곳은 갈 생각도 없었어. 물론 노인네는 대학에 넣어주었지만 입학 당일 날 자퇴했지. 아마 노인에게 말했으면 하버드에라도 넣어주었겠지만.”
“만사 재미 없어한다는 점에서 너와 나는 같군.”
“그래도 팀장과 정이 퇴근하고 너와 마시는 맥주는 좋아. 조금 시원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덥고.”
제이는 벡스 병을 들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조는 쓴 맛이 나는 벡스를 좋아하는 제이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는 깔끔한 느낌의 일본 맥주를 좋아했다.
“대학생이 대학을 다니는 게 재미없으면 어떡해?”
“4학년 1학기로 조기졸업하려고. 회사 덕분에 학비가 지원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아까워.”
“대학에 졸업하고 나서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
조는 창밖으로 야간 조명을 밝히고 있는 덕수궁 쪽을 바라보았다. 교수가 되면 어울릴 것이라는 류의 말이 떠올랐다.
“글쎄. 아직 없어.”
“뭐야? 대학생이라면 재미있어야 하는 거 아냐? 연애도 하고, 미래에 대한 꿈도 있고 말이지. 뭐야? 애늙은이처럼.”
조는 제이의 애정 섞인 다그침에 쓴웃음을 지으며 아사히 병을 입에 댔다.
“사귀는 여자 없어?”
조는 없다고 말하려다 오후에 도서관에서 보았던 갑자기 크고 또렷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왜 갑자기 그 애 생각이 나는 걸까. 복학하고 수업 때마다 지나친지도 반년 가까이 되었는데. 조는 남은 맥주를 벌컥거리며 모두 마셔버렸다. 제이는 의아한 눈빛으로 조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조와 제이는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얼굴이 발그레 하게 취한 정이었다. 정은 괜찮다는 듯 양손을 들고 비틀거리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우리 후임님들 술자리를 방해했군. 미안한데. 어, 샌님도 술을 드시나?”
정은 조에게 다가와 친한 듯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조는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은 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팀장과 한 잔 했지. 어디 팀장뿐 인가? 국회의원에, 대기업 중역에, 촉망받는 젊은 의사에... 강남 최고의 룸살롱에서 팁 걱정 안하고 신나게 먹었어. 오늘 내 옆에 앉은 아가씨 죽였는데!”
그러면 그 여자가 하고 잘 것이지 왜 돌아왔지, 하는 의문이 들은 조였지만 정이 곧바로 신발도 벗지 않고 자신의 침대로 들어가 코를 골며 잠들자 짜증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의 성격상 정의 침대에서 잠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제이는 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조는 할 수 없이 소파에서 새우잠을 잤는데 정은 그날 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조의 침대에 술과 안주를 잔뜩 토했다. 다음 날 정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조는 세탁소에도 맡길 수 없어 화장실 욕조에서 손으로 빨고 방향제를 일주일 동안 뿌렸지만 쉰 듯한 역한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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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제법 찬 공기가 느껴졌다. 도서관에는 간간이 기침 소리도 들려왔다. 긴 팔 뿐만 아니라 윈드 브레이커를 입은 학생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조는 양키즈의 홈 유니폼 레플리카에 검정색 긴팔 티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회사에 남기로 한 후 조는 짐을 챙겨서 집을 나와 호텔 사무실로 옮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 몇 가지와 책 몇 권이 전부였다. 전역한 이후 회사에서 주는 급여는 웬만한 직장인 이상의 대우였다. 현장에 투입되는 제이보다는 적은 액수였지만 대학교 3학년의 학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돈을 벌고 있었다. 하지만 조는 그 돈으로 사고 싶은 것을 사기 보다는 대부분 고스란히 저축했다. 언젠가 호텔에서 나와 작은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얻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제이와 함께 쓰는 호텔 방에 무언가를 사두기에는 공간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좋아하는 책의 구입도 자제하고 학교의 중앙 도서관을 애용하고 있었다.
서가에서 그는 챈들러의 단편집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번역된 것이 거의 없어서 찾기 힘들어서 목표도 없이 서가 주위를 배회하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문득 커다랗고 새까만 원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조가 원을 처음 본 것이 어제는 아니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부터 그녀를 알게 된 것이었을까. 아마 조가 복학한 3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는 신입생 복학생 환영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애당초 술자리나 사람이 모인 자리를 싫어하기도 했지만 그 자리에서 결혼한 누군가가 떠오를까 꺼려졌다. 그렇다면 신학기 수업이 시작된 3월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녀가 인사할 때 애써 숨기려 노력했지만 치아 교정기를 하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치아 교정기를 해도 충분히 괜찮던데, 하는 생각이 미치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라며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조는 어색한 표정을 감추려 양 볼에 공기를 집어넣어 불룩하게 만든 후 책 한권 빌리지 않고 중앙 도서관을 나왔다.
2학기가 개강하는 첫 수업이 끝나자 조는 교탁 앞의 맨 앞자리에서 일어나 교수가 나간 앞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는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우르르 몰려나온 학생들과 그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조는 학생들과 담배 연기를 요리조리 피해 지하 2층에서 올라와 지상의 건물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긴 한 숨이 나왔다.
학교로 복학했지만 아는 얼굴이 드물었고 그나마 알고 지냈던 동기들은 학년이 달랐다. 어느새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학교는 재미없는 곳이었다. 이제 류도 없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리곤 했다.
서류상으로는 2월부로 전역했지만 조는 여전히 회사에 남아 있었다. 제이는 오히려 학교 생활에 전념하고 졸업 이후 취직해 남들처럼 평범한 진로를 선택할 것은 권유했지만 조는 웬일인지 회사에 남고 싶었다. 넉넉한 보수에 등록금을 보장하는 쓸만한 직장이기 때문인지, 제이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군 입대 전 계속 장학금을 타긴 했지만 학교생활은 재미없었고 이제 장학금을 타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으니 학교생활은 더욱 무료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3학년 1학기에도 장학금을 놓치지는 않았다. 마음을 비워서 더욱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 책이나 빌리기 위해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조는 오렌지색 반팔 티츠에 베이지색 치노 바지 차림이었다. 고개를 올라가는 길이기에 셔츠 안쪽에서 땀이 배어나왔지만 확실히 더위는 한 풀 꺾여 있었다. 스물다섯 살의 여름도 끝나가고 있었다.
중앙 도서관 입구에서 바코드로 학생증을 인식시킨 후 들어가 소설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있을 때 누군가 조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조는 그쪽을 바라보고 3초 쯤 지나서야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마르고 작은 키에 이마가 넓고 눈이 똘망똘망한 두 학번 아래 후배인 원이었다.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채 인사도 하지 않는 김과 함께였다. 조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까딱하고 숙인 후에 옆 서가로 옮겼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몰랐어? 예비역 선배. 전설적인 학점의 주인공.”
“전설적인 학점?”
“응, 1학년 1학기부터 군대에 갔던 2학년 2학기까지 전과목을 모두 A+로 깔았다잖아.”
“어쩐지 좀 비정상적으로 보였어.”
먼 거리에 있어서 들리지 않을 줄 알고 둘은 속삭이고 있었지만 군에서 집중적인 훈련을 받고 정보 업무에 종사하는 조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책을 보고 있는 척했던 조는 원과 김을 향해 고개를 돌릴까 하다가 그만두고는 더 이상 듣는 것도 포기했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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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지?”
“두발과 교복 단속이 없다는 것 외에는 고등학교와 똑같아.”
“고등학교보다 자유가 더 보장된다는 뜻이군.”
“그렇긴 하지만 재미없어. 따분해.”
조와 제이는 팀장과 정이 퇴근한 호텔 사무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제이는 우울한 마일즈 데이비스의 CD를 걸어놓았다. 조와 제이가 서류상으로 전역한 후 팀장은 사무실에서 대기하기보다 퇴근하는 날이 늘었고 정도 출퇴근하면서 조와 제이를 닦달하는 횟수도 줄었다.
“나는 애저녁에 대학 같은 곳은 갈 생각도 없었어. 물론 노인네는 대학에 넣어주었지만 입학 당일 날 자퇴했지. 아마 노인에게 말했으면 하버드에라도 넣어주었겠지만.”
“만사 재미 없어한다는 점에서 너와 나는 같군.”
“그래도 팀장과 정이 퇴근하고 너와 마시는 맥주는 좋아. 조금 시원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덥고.”
제이는 벡스 병을 들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조는 쓴 맛이 나는 벡스를 좋아하는 제이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는 깔끔한 느낌의 일본 맥주를 좋아했다.
“대학생이 대학을 다니는 게 재미없으면 어떡해?”
“4학년 1학기로 조기졸업하려고. 회사 덕분에 학비가 지원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아까워.”
“대학에 졸업하고 나서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
조는 창밖으로 야간 조명을 밝히고 있는 덕수궁 쪽을 바라보았다. 교수가 되면 어울릴 것이라는 류의 말이 떠올랐다.
“글쎄. 아직 없어.”
“뭐야? 대학생이라면 재미있어야 하는 거 아냐? 연애도 하고, 미래에 대한 꿈도 있고 말이지. 뭐야? 애늙은이처럼.”
조는 제이의 애정 섞인 다그침에 쓴웃음을 지으며 아사히 병을 입에 댔다.
“사귀는 여자 없어?”
조는 없다고 말하려다 오후에 도서관에서 보았던 갑자기 크고 또렷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왜 갑자기 그 애 생각이 나는 걸까. 복학하고 수업 때마다 지나친지도 반년 가까이 되었는데. 조는 남은 맥주를 벌컥거리며 모두 마셔버렸다. 제이는 의아한 눈빛으로 조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조와 제이는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얼굴이 발그레 하게 취한 정이었다. 정은 괜찮다는 듯 양손을 들고 비틀거리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우리 후임님들 술자리를 방해했군. 미안한데. 어, 샌님도 술을 드시나?”
정은 조에게 다가와 친한 듯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조는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은 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팀장과 한 잔 했지. 어디 팀장뿐 인가? 국회의원에, 대기업 중역에, 촉망받는 젊은 의사에... 강남 최고의 룸살롱에서 팁 걱정 안하고 신나게 먹었어. 오늘 내 옆에 앉은 아가씨 죽였는데!”
그러면 그 여자가 하고 잘 것이지 왜 돌아왔지, 하는 의문이 들은 조였지만 정이 곧바로 신발도 벗지 않고 자신의 침대로 들어가 코를 골며 잠들자 짜증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의 성격상 정의 침대에서 잠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제이는 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조는 할 수 없이 소파에서 새우잠을 잤는데 정은 그날 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조의 침대에 술과 안주를 잔뜩 토했다. 다음 날 정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조는 세탁소에도 맡길 수 없어 화장실 욕조에서 손으로 빨고 방향제를 일주일 동안 뿌렸지만 쉰 듯한 역한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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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제법 찬 공기가 느껴졌다. 도서관에는 간간이 기침 소리도 들려왔다. 긴 팔 뿐만 아니라 윈드 브레이커를 입은 학생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조는 양키즈의 홈 유니폼 레플리카에 검정색 긴팔 티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회사에 남기로 한 후 조는 짐을 챙겨서 집을 나와 호텔 사무실로 옮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 몇 가지와 책 몇 권이 전부였다. 전역한 이후 회사에서 주는 급여는 웬만한 직장인 이상의 대우였다. 현장에 투입되는 제이보다는 적은 액수였지만 대학교 3학년의 학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돈을 벌고 있었다. 하지만 조는 그 돈으로 사고 싶은 것을 사기 보다는 대부분 고스란히 저축했다. 언젠가 호텔에서 나와 작은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얻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제이와 함께 쓰는 호텔 방에 무언가를 사두기에는 공간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좋아하는 책의 구입도 자제하고 학교의 중앙 도서관을 애용하고 있었다.
서가에서 그는 챈들러의 단편집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번역된 것이 거의 없어서 찾기 힘들어서 목표도 없이 서가 주위를 배회하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문득 커다랗고 새까만 원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조가 원을 처음 본 것이 어제는 아니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부터 그녀를 알게 된 것이었을까. 아마 조가 복학한 3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는 신입생 복학생 환영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애당초 술자리나 사람이 모인 자리를 싫어하기도 했지만 그 자리에서 결혼한 누군가가 떠오를까 꺼려졌다. 그렇다면 신학기 수업이 시작된 3월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녀가 인사할 때 애써 숨기려 노력했지만 치아 교정기를 하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치아 교정기를 해도 충분히 괜찮던데, 하는 생각이 미치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라며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조는 어색한 표정을 감추려 양 볼에 공기를 집어넣어 불룩하게 만든 후 책 한권 빌리지 않고 중앙 도서관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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