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199X년 6월 22일

방안의 미니 콤포는 가제보의 ‘아이 라이크 쇼팽’을 무한 반복 중이다. 요즘 20대 중에 80년대 음악을 듣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오늘은 하지라 해가 가장 긴 날이지만 장맛비가 내리고 있어서 해를 구경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차피 밖에 나가지 않겠지만 해가 내리쬐는 건 질색이다. 방에서 빈둥거리며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신의 상념을 쫓아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허무할 뿐이다. 방학이라 학교를 가지 않아서 류를 만난지도 오래되었다. 그러고 보니 기말고사 때부터 류를 만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나 스스로 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쩌면 거절당하는 게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념들은 모두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 우스울 뿐이다. [[/I]]

단과대 도서관 입구의 복도의 커다란 창문 밖으로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조는 종이컵 안에 든 물을 홀짝대고 있었다. 강한 가을바람에 플라타너스와 단풍이 뒤섞인 낙엽이 너저분하게 흩날렸다. ‘저런 걸 치우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겠군. 하지만 저런 일을 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법이지. 편한 일을 할수록 돈을 많이 버는 세상이니까...’ 따위의 제 멋대로의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과대 건물 주변 곳곳의 벤치에는 즐거운 표정의 커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직 사귀는 사람이 없는 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까다로운 성격 때문일까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지만 의외로 자신에 대해 모르는 법이다. 류는... 이라고 생각하다 조는 스스로의 상념에 질려 고개를 흔들었다. 2학기 개강 이후 몇 번 지나쳤지만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말없이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런 사이는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그쳤다. 조는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잘 몰랐다.

결론이 나지 않는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조를 꺼내준 것은 왼쪽 뒷주머니에서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이었다. 하루 종일 문자 한 통 오지 않는 일이 다반사인 조의 핸드폰에 전화가 온 것이었다.  

“여보세요.”

류였다. 이런 일도 다 있군, 하며 조는 속으로 놀랐다.

“나야.”

“아아, 웬일이야?”

“왜? 내가 전화하면 안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갑작스레 전화해서 놀랐어.”

“날씨도 꾸물거려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술? 지금 어디 있는데?”

“히히, 여기야, 여기.”

류의 목소리는 전화를 대고 있는 오른쪽 귀 뿐만 아니라 왼쪽 귀에서도 스테레오처럼 들렸다. 뒤돌아보니 류가 손을 흔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조는 칙칙한 복도가 환해지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류는 핑크색 모자를 쓰고 검정색 점퍼에 부츠컷 진을 입고 있었었다. 모자와 안경을 제외한다면 액세서리라고 할 것도 거의 없이 한결 같은 단순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조는 류가 단순한 차림만으로도 멋지다, 고 생각했다.

학교 앞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기자 류는 오이 소주에 골뱅이를 시키자고 했다.

“나 소주 계통은 잘 못 마셔.”

“어차피 맥주도 많이 마시는 편은 못 되잖아?”

“그렇긴 하지. 술은 보통 혼자 마시는 편이고.”

“뭐야? 아저씨처럼.”

“그런가? 난 아직도 내가 어린애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어느덧 법적으로 미성년자 신세는 면했으니...”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류는 오이 소주의 첫잔을 깨끗이 비우며 조에게 물었다.

“미성년자 신분을 벗어나고 싶기는 했어. 보고 싶은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는 건 싫었으니까. 그런데 어른이 된다는 건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

조는 젓가락으로 골뱅이를 집어 입에 넣고는 소주잔을 절반만 들이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스무 살 생일 전날 밤 11시 59분까지는 어린애고 그로부터 1분 뒤인 0시에는 어른이 되는 것 아니잖아. 그런 수학적 사고방식은 그렇다 치고 난 뭔가 책임지는 게 싫어. 어른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많은 부정적인 것들도 싫고.”

“피터팬 증후군인가? 하지만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떳떳하게 술도 마실 수 있잖아?”

“그런가?”

“그럼. 오늘은 내가 살 테니 마음껏 마셔라.”

“웬일이야? 네가 사는 술을 얻어먹는 날이 오다니.”

“흠, 축하주라고나 할까. 나, 후련해졌어. 휴학계 내버렸거든.”

조는 놀란 표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쩐지 1학기에 비해 2학기가 되고 나서는 얼굴 보기 힘들어졌다 싶었다. 조는 담담하게 보이기 위해 애써 삐딱하게 앉으며 류에게 건배를 권했다.

“잘 되길 바래.”

말은 쿨하게 했지만 조는 얼굴 표정에서 서운한 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류는 그런 표정을 알아차린 듯 했다.

“판에 박힌 대사를 하네... 어쩐지 나하고 어울리는 공부 같지 않았어. 재미도 없었고. 너처럼 즐겁지 않았어.”

“내가 즐거워 보였어?”

“그래. 넌 딱 체질이야. 사람들과 친해지기만 한다면 교수도 되고 남을 사람이지.”

“그럼 교수는 될 수 없겠군. 어차피 난 혼자 노는 타입이야.”

조는 류의 말이 칭찬인 것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류가 어떤 전공을 선택하기 위해 사수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조는 류에게 쓸 데 없는 것은 묻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류가 스스로 말해주거나 조가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싱긋 웃는 표정의 류는 소주잔을 들고 눈앞에서 좌우로 천천히 돌리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이별주는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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