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다음 주 월요일이 되자 팀장과 정이 동시에 휴가를 갔다. 서 의원을 처리한 포상으로 주어진 보름짜리 휴가였는데 덕분에 조와 제이가 처음으로 단 둘이 지내게 되었다. 부상을 입은 팀장은 휴가를 떠나기 전 특별한 지시 사항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동안 아무런 임무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니 사무실이나 잘 지키라고 했다. 포상 휴가 5일을 덧붙인 말년 휴가를 떠나는 정은 기분이 좋았는지 조와 제이에게 필요한 것은 없느냐며 사다주겠다고 밉살스런 친절을 보였다. 물론 조와 제이는 아무 것도 부탁하지 않았다.
조와 제이는 해방감을 느꼈다. 팀장과 정이 휴가를 떠난 첫날 제이는 J&B를 꺼내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조는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제이는 조와 있을 때만 말을 좀 하는 편이었는데 술이 들어갈 때까지 둘은 별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분위기가 나쁘거나 어색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둘 사이에는 나름대로 통했다. 제이는 엘라 피츠제랄드의 CD를 걸어 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끈적한 노래들이 이어졌다. 병이 3분의 1쯤 비워졌을 때 제이가 입을 열었다.
“진작 이야기 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뭐?”
조는 생수병에 담긴 생수를 마시며 물었다. 이제 천천히 마시며 숨고르기를 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노인네 말야. 아버지.”
“아...”
“알고 있었지?”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식이 말했군?”
“응. 그런데 자세히 들은 것은 아냐.”
“그렇군.”
제이는 입에 시가를 문 채 깊숙이 빨아들이고 내쉬었다.
“어렸을 때 노인네는 말야. 해외 출장이 잦았어. 무역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으로 계약 때문에 출장이 잦다는 것쯤으로 알고 있었거든. 노인네는 집에서 일 이야기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 식탁에서도 말이 없었고. 식탁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어머니였어. 전형적인 현모양처였지.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그리워.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어.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왔는데 집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어. 어머니는 배와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안방 한구석에 반듯이 누워 있었지. 안방에 들어갔을 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어. 까만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나를 총으로 겨눈 채 빙긋이 웃고 있었어. 어머니를 살해하고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제이는 시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낀 채로 위스키 잔을 들어 한 번에 잔을 비웠다.
“나는 호신술 같은 것은 배워본 적이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놈은 살인의 프로였어. 그런데 녀석은 나를 바로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총을 쏘지 않았어. 그러더니 묻더군. ‘네 애비는 어딨냐?’ 나는 고개를 저었어. 그랬더니 더 이상 묻지 않고 발로 내 얼굴을 찼어. 나는 그대로 어머니 시체 옆에 쓰러졌고 놈은 구둣발로 내 몸을 사정없이 차고 밟았지.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 속에서 간신히 눈을 떠보니 허여멀건한 어머니의 눈동자와 마주쳤어. 어머니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은 거였지.”
제이는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새로운 시가를 꺼내 테이블에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조는 제이와 자신의 위스키 잔을 채운 다음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제이는 묵묵히 응했다. 한동안 침묵이 둘을 휘감았다. 엘라 피츠제랄드는 똑같은 노래를 벌써 세 번째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갑자기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놈의 오른발이 내 배를 가격하려 했을 때 나는 양손으로 놈의 발을 잡아 넘어뜨렸어. 놈은 이것 봐라, 는 표정으로 일어나 날아와 내 머리를 발로 다시 찼어. 나는 코와 입에서 뜨뜻한 감촉을 느끼며 뒤로 넘어졌지. 놈은 내 앞으로 와서 내 입에 총구를 쑤셔 넣었어.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한 순간 총성이 울렸고 놈이 쓰러지더군. 뒤에는 트렌치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낀 손에 권총을 쥔 노인네가 있었지. 나는 퉁퉁 부어오르고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노인네를 바라보았어. 노인네는 나와 어머니를 무표정하게 번갈아 보더니 권총을 코트 속주머니에 집어넣더군. 노인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기절했어.”
조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제이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다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취하면 이야기의 끝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몇 달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나지 않아. 어머니 장례식도 가지 못했고 정신 병원에 보내진 것 같기도 해.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대학에 합격했고... 노인네가 손을 쓴 거야. 나는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고 수능을 보지 않았는데도 대학생이 되었지. 그리고 약혼녀까지 생겼어. 가정교육을 잘 받은 연상의 여자고 집안도 좋았지. 나한테도 잘했어. 하지만 나는 여자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어. 노인네와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 같은 것을 털어 놓을 수도 없잖아?”
제이는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채워 넣고는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조는 제이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를 판 대가로 노인네는 회사를 책임지게 되었어. 아마 어머니의 죽음은 일련의 학살극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노인네와 반대 세력 간의 피가 흥건한 학살극. 거기에서 노인네는 살아남아 ‘아버지’ 칭호를 얻었어. 내게 아파트를 한 채 사줘서 이미 노인네와 따로 살고 있었지만 나도 그쯤은 알게 되었지. 시사 월간지에서 노인네의 이름이 얼핏 노출되었어. 물론 이니셜만이었지만 그게 노인네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어. ‘안보 라인 인적 쇄신 - 정권 교체에 따른 새바람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였지. 지금도 기억나. 기자가 잘 몰라서 자세히 기술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 자세히 알았기 때문에 간략히 쓴 것인지 모르지만 최소한 노인네가 회사를 장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대학교에 들어가자마 자퇴하고 다섯 살 연상의 약혼녀와 결혼을 했어. 몇 년 동안 냉랭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며 빈둥대던 나는 노인네에게 군대에 가겠다고 했어.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 노인네는 군대를 빼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가야한다고 했지. 그 이유를 묻길래 나는 회사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어. 노인네는 2분 정도 말이 없더니 알겠다더군.”
조 때문에 제이가 회사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정의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다. 조는 ‘라쇼몽’을 떠올리며 어차피 진실이란 사람들마다 다른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참, 여기에 배치된 것은 노인네의 배려였어. 강 팀장이 노인네 동료야. 절친한 친구나 다름없다더군. 노인네가 회사를 손에 넣을 때 함께 행동한 것이 팀장이었지. 팀장을 믿고 너와 나를 여기에 보낸 것이지.”
제이는 조를 바라보면서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 수다가 오늘은 좀 지나쳤는데. 넌 어때?”
“나? 내 인생은 너무나 평범해. 너처럼 파란만장하지도 않고. 따분하고 평범하지.”
“여자 없었어?”
“없었어. 사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여자애가 있기는 했지만 어쩐지 거리를 좁히는 것이 어려웠어. 한편으로는 그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바보 녀석. 여자는 다 똑같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조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비아냥거림을 섞어 농담했다.
“그래. 네 아내도 네가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리고 있어.”
제이는 한참을 킬킬거리더니 정색을 했다.
“참,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미안하게 생각해. 노인네에게는 네가 현장에 투입되지 않고 사무실을 지키게 해주겠다고 확언을 얻었는데 미친 녀석 때문에...”
“괜찮아. 나는 내 신념을 지켰으니.”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신념?”
“그래.”
“그렇군. 그런 신념이 있었군. 그럼 아무리 죄 많은 녀석이라도 죽으면 안 된다는 거야? 사형 폐지론을 지지하나?”
“아니, 이기적 신념가이지.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 어차피 누군가는 죽이잖아. 고참 녀석처럼 즐기는 놈도 있고.”
“정, 그 녀석은 언젠가 내 손으로 죽이겠어.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네 신념을 지켜주겠어. 약속해.”
“정은 말년 휴가를 나갔어. 복귀하고 한달만 있으면 전역한다고.”
“녀석은 이 일을 즐기는 놈이야. 아마 말뚝을 박겠지. 딱히 다른 일을 할 줄 아는 놈도 아냐.”
“흐음, 그건 좀 싫은데.”
“괜찮아. 여하튼 네게 한 약속은 지키겠어.”
조는 제이의 약속이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두 약속이 결코 자신의 손에 의해 깨지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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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정의 표정은 대단히 밝았다. 호텔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통닭을 사가지고 와서는 ‘사랑하는 후임들, 보고 싶었다’며 입바른 말을 했다. 그리고 조의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앞으로 잘해보자고. 나 말뚝 박았다. 후후.”
조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제이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냉소 지었다. 냉소 뒤에는 모종의 의지가 엿보였다. 정은 조와 제이의 표정이나 생각에는 아랑곳없이 휴가 기간 동안 ‘세 명의 여자와 잤는데, 그 중 두 번째 여자가 최고였다’는 허풍을 떨어대고 있었다.
조와 제이는 해방감을 느꼈다. 팀장과 정이 휴가를 떠난 첫날 제이는 J&B를 꺼내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조는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제이는 조와 있을 때만 말을 좀 하는 편이었는데 술이 들어갈 때까지 둘은 별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분위기가 나쁘거나 어색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둘 사이에는 나름대로 통했다. 제이는 엘라 피츠제랄드의 CD를 걸어 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끈적한 노래들이 이어졌다. 병이 3분의 1쯤 비워졌을 때 제이가 입을 열었다.
“진작 이야기 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뭐?”
조는 생수병에 담긴 생수를 마시며 물었다. 이제 천천히 마시며 숨고르기를 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노인네 말야. 아버지.”
“아...”
“알고 있었지?”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식이 말했군?”
“응. 그런데 자세히 들은 것은 아냐.”
“그렇군.”
제이는 입에 시가를 문 채 깊숙이 빨아들이고 내쉬었다.
“어렸을 때 노인네는 말야. 해외 출장이 잦았어. 무역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으로 계약 때문에 출장이 잦다는 것쯤으로 알고 있었거든. 노인네는 집에서 일 이야기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 식탁에서도 말이 없었고. 식탁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어머니였어. 전형적인 현모양처였지.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그리워.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어.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왔는데 집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어. 어머니는 배와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안방 한구석에 반듯이 누워 있었지. 안방에 들어갔을 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어. 까만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나를 총으로 겨눈 채 빙긋이 웃고 있었어. 어머니를 살해하고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제이는 시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낀 채로 위스키 잔을 들어 한 번에 잔을 비웠다.
“나는 호신술 같은 것은 배워본 적이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놈은 살인의 프로였어. 그런데 녀석은 나를 바로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총을 쏘지 않았어. 그러더니 묻더군. ‘네 애비는 어딨냐?’ 나는 고개를 저었어. 그랬더니 더 이상 묻지 않고 발로 내 얼굴을 찼어. 나는 그대로 어머니 시체 옆에 쓰러졌고 놈은 구둣발로 내 몸을 사정없이 차고 밟았지.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 속에서 간신히 눈을 떠보니 허여멀건한 어머니의 눈동자와 마주쳤어. 어머니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은 거였지.”
제이는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새로운 시가를 꺼내 테이블에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조는 제이와 자신의 위스키 잔을 채운 다음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제이는 묵묵히 응했다. 한동안 침묵이 둘을 휘감았다. 엘라 피츠제랄드는 똑같은 노래를 벌써 세 번째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갑자기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놈의 오른발이 내 배를 가격하려 했을 때 나는 양손으로 놈의 발을 잡아 넘어뜨렸어. 놈은 이것 봐라, 는 표정으로 일어나 날아와 내 머리를 발로 다시 찼어. 나는 코와 입에서 뜨뜻한 감촉을 느끼며 뒤로 넘어졌지. 놈은 내 앞으로 와서 내 입에 총구를 쑤셔 넣었어.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한 순간 총성이 울렸고 놈이 쓰러지더군. 뒤에는 트렌치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낀 손에 권총을 쥔 노인네가 있었지. 나는 퉁퉁 부어오르고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노인네를 바라보았어. 노인네는 나와 어머니를 무표정하게 번갈아 보더니 권총을 코트 속주머니에 집어넣더군. 노인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기절했어.”
조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제이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다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취하면 이야기의 끝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몇 달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나지 않아. 어머니 장례식도 가지 못했고 정신 병원에 보내진 것 같기도 해.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대학에 합격했고... 노인네가 손을 쓴 거야. 나는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고 수능을 보지 않았는데도 대학생이 되었지. 그리고 약혼녀까지 생겼어. 가정교육을 잘 받은 연상의 여자고 집안도 좋았지. 나한테도 잘했어. 하지만 나는 여자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어. 노인네와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 같은 것을 털어 놓을 수도 없잖아?”
제이는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채워 넣고는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조는 제이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를 판 대가로 노인네는 회사를 책임지게 되었어. 아마 어머니의 죽음은 일련의 학살극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노인네와 반대 세력 간의 피가 흥건한 학살극. 거기에서 노인네는 살아남아 ‘아버지’ 칭호를 얻었어. 내게 아파트를 한 채 사줘서 이미 노인네와 따로 살고 있었지만 나도 그쯤은 알게 되었지. 시사 월간지에서 노인네의 이름이 얼핏 노출되었어. 물론 이니셜만이었지만 그게 노인네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어. ‘안보 라인 인적 쇄신 - 정권 교체에 따른 새바람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였지. 지금도 기억나. 기자가 잘 몰라서 자세히 기술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 자세히 알았기 때문에 간략히 쓴 것인지 모르지만 최소한 노인네가 회사를 장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대학교에 들어가자마 자퇴하고 다섯 살 연상의 약혼녀와 결혼을 했어. 몇 년 동안 냉랭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며 빈둥대던 나는 노인네에게 군대에 가겠다고 했어.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 노인네는 군대를 빼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가야한다고 했지. 그 이유를 묻길래 나는 회사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어. 노인네는 2분 정도 말이 없더니 알겠다더군.”
조 때문에 제이가 회사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정의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다. 조는 ‘라쇼몽’을 떠올리며 어차피 진실이란 사람들마다 다른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참, 여기에 배치된 것은 노인네의 배려였어. 강 팀장이 노인네 동료야. 절친한 친구나 다름없다더군. 노인네가 회사를 손에 넣을 때 함께 행동한 것이 팀장이었지. 팀장을 믿고 너와 나를 여기에 보낸 것이지.”
제이는 조를 바라보면서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 수다가 오늘은 좀 지나쳤는데. 넌 어때?”
“나? 내 인생은 너무나 평범해. 너처럼 파란만장하지도 않고. 따분하고 평범하지.”
“여자 없었어?”
“없었어. 사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여자애가 있기는 했지만 어쩐지 거리를 좁히는 것이 어려웠어. 한편으로는 그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바보 녀석. 여자는 다 똑같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조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비아냥거림을 섞어 농담했다.
“그래. 네 아내도 네가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리고 있어.”
제이는 한참을 킬킬거리더니 정색을 했다.
“참,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미안하게 생각해. 노인네에게는 네가 현장에 투입되지 않고 사무실을 지키게 해주겠다고 확언을 얻었는데 미친 녀석 때문에...”
“괜찮아. 나는 내 신념을 지켰으니.”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신념?”
“그래.”
“그렇군. 그런 신념이 있었군. 그럼 아무리 죄 많은 녀석이라도 죽으면 안 된다는 거야? 사형 폐지론을 지지하나?”
“아니, 이기적 신념가이지.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 어차피 누군가는 죽이잖아. 고참 녀석처럼 즐기는 놈도 있고.”
“정, 그 녀석은 언젠가 내 손으로 죽이겠어.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네 신념을 지켜주겠어. 약속해.”
“정은 말년 휴가를 나갔어. 복귀하고 한달만 있으면 전역한다고.”
“녀석은 이 일을 즐기는 놈이야. 아마 말뚝을 박겠지. 딱히 다른 일을 할 줄 아는 놈도 아냐.”
“흐음, 그건 좀 싫은데.”
“괜찮아. 여하튼 네게 한 약속은 지키겠어.”
조는 제이의 약속이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두 약속이 결코 자신의 손에 의해 깨지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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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정의 표정은 대단히 밝았다. 호텔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통닭을 사가지고 와서는 ‘사랑하는 후임들, 보고 싶었다’며 입바른 말을 했다. 그리고 조의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앞으로 잘해보자고. 나 말뚝 박았다. 후후.”
조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제이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냉소 지었다. 냉소 뒤에는 모종의 의지가 엿보였다. 정은 조와 제이의 표정이나 생각에는 아랑곳없이 휴가 기간 동안 ‘세 명의 여자와 잤는데, 그 중 두 번째 여자가 최고였다’는 허풍을 떨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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