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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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덜컹! 덜컹! 덜컹!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케비넷 앞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나사 풀린 느긋한 노인의 그것과도 같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느닷없이 광기 어린 미치광이가 그녀의 케비넷을 흔들며 소리를 치고 있던 것이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콰앙!
강하게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케비넷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문은 앞에 있던 사람을 충분히 강타할 만큼 세게 열렸지만, 케비넷 안에 있던 미라도, 그 밖에 서있던 노인도, 옆에서 갑자기 열린 케비넷 소리에 한 순간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노인은 그 안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나오는 나체의 남자를 보며 벌쭉, 웃음 지었다.
“이거... 우리 손주가 여기 있었구먼.”
스르륵, 총을 빼드는 소리와 함께 군홧발 소리가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넌... 누구지?”
남자는 다가오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일견 까칠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는 노인을 향한 경계심이나 위협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약간의 짜증과 호기심 뿐이었다.
“껄껄껄껄! 우리 손주, 또 할애비 얼굴을 못 알아보는 구나? 자, 이제 집으로 가야지?”
노인은 새삼 참 다양한 형태의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에서, 광기에 찬 목소리를 지나, 이번에는 정말로 손주를 대하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그것과 같은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할애비? 그게 뭔데?”
“껄껄껄! 원 녀석도 참.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꾸나.”
케비넷 안에서 나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미라는 남자가 당연히 거부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군홧발 소리와 함께 멀어져가는 맨발의 가벼운 발소리에 미라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윽고 마음을 굳히고는 케비넷 안에서 빠져나왔다. 스캐빈저가 자신이 발견한 물건을 빼앗기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잠깐!”
천천히 총을 겨눈 채 케비넷 안에서 걸어 나오는 미라를 확인한 노인의 입가가 죽 찢어지면서 음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 그려졌다. 미라 또한 벌거벗고 있는 남자의 어께에 팔을 걸친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낡고 때 묻은 갈색 롱코트에, 2미터는 훌쩍 넘는 큰 키와 그와 비교될 정도로 깡마른 몸매에 더블 배럴 샷건을 든, 눈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카락과 덥수룩하게 자란 회갈색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실례지만, 그 남자는 제가 먼저 발견한...”
“아, 좀 전에 날 때려눕힌 그 옷 도둑이다.”
미라가 스캐빈져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몫을 말하려던 찰나, ‘도둑’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귓방망이를 후려치듯 뇌리에 쏘아져 들어왔다. 당최 자신 또한 누군가가 자기 옷을 훔쳐가서 이 곳 까지 찾으러 온 사람인데 누가 누굴 보고 도둑이라는 건지, 미라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잠깐만! 내가 무슨 옷을 훔쳤다고...”
하지만 미라는 자신의 발치를 가리키는 남자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거기에는 급하게 숨느라 케비넷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던 남자의 옷가지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어, 이... 이건...”
“이봐, 아가씨. 거 바닥에 있는 옷, 우리 손주 속옷 아닌가?”
노인은 예의 그 능글맞고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미라에게 물었다. 당최 경위를 알 수 없는 이 황당한 상황에 가까스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한 미라는 당황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다.
“미라야... 그걸 들고 있던 게 그런 이유였던 거야...?”
하지만 그때, 다른 케비넷을 열고 등장한 제이가 대견함과 서운함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식의 자위 장면을 처음 목격한 부모 같은 그 표정에, 결국 미라는 얼굴을 붉히며 이 황당한 오해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이유라니 날 뭘로 보는 거야! 무슨 사춘기 10대인 줄 알아!? 이건 그냥 어쩌다 보니 들고 있던 거고, 또 어쩌다 보니 들고 들어간 거야!”
“허허, 그래. 아가씨가 어쩌다보니 남자 옷을 훔칠 수도 있는 거지.”
“미라, 방금 그 말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거 알지?”
‘딱!’ 자책하듯 이마를 때리는 미라의 뒤에서, 남자가 차갑게 뇌까렸다.
“도둑 맞네.”
“하아아아......”
미라는 어느 한 순간부터 오늘이 참 길고 피곤한 하루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라야, 드디어 너도 어른이...”
“그만. 더 이상 나 개쪽 주지 말고, 단. 한 마디도. 하지 마.”
다시금 입을 열려는 제이를 제지한 미라는 잔뜩 피곤해진 표정으로 노인을 향했다.
“어찌되었든... 저 남자, 당신 손주 아니...”
“내 옷부터 줘. 도둑질은 나쁜 거야.”
“가져가! 당장 가져가!! 으아아아악!! 훔친 적도 없는 옷가지들 때문에 내가 도둑 취급을 받아야 하냐! 빨랑 가져가!!!”
분노와 부끄러움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미라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남자에게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스캐빈져로서의 체통이니 체면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물 건너 간지 오래였다.
“껄껄껄껄껄껄! 이거, 우리 손주 신붓감이 여기 있었구먼그래!”
그 모습을 본 노인은 다시금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가 웃을 때 마다 그의 뻣뻣한 수염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렸다.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으려 허리를 굽히는 남자의 어께를 잡아당긴 노인은 말을 이었다.
“거 결혼 안한 이성의 옷을 훔치면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 들어 보셨나 몰라. 껄껄껄껄!”
동화에서 유래한 유서 깊은 속설이자, 속담 같은 말이었다. ‘시집/장가 안간 처녀/총각이 다른 총각/처녀의 옷을 훔치면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하지만 미라는 옷 얘기라면 이제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대답하기조차 피곤했던 그녀는 누군가 방해하기 전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딴 건 내 알바 아니고! 거기 할아버지 옆에 있는 그 남자 내가 먼저 발견한 거거든요! 자기 손주니 뭐니 사기 치지 마시고 손 떼시죠!”
“허허허허허! 아이고, 이거. 우리 손주를 먼저 발견한 임자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구먼. 자, 그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함께 가십시다. 총 좀 내려놓고...”
“적당히 하시죠. 고블린들이 사는 이런 유적지에서 손주랑 숨바꼭질 중이었다는 걸 지금 저보고 믿으라는 거예요? 세상에 어느 할아버지가 손주랑 이런 곳에서, 심지어 총을 들고 패거리까지 거느린 채 숨바꼭질을 하죠? 장난 그만 치고 정체를 밝혀요!”
“...”
미라의 외침을 들은 노인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서서히, 너털웃음을 뱉으며 올라갔던 입 꼬리가 내려가자, 그의 표정은 얼굴을 뒤덮은 수염 때문에 그가 어딜 보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정적이 만들어낸 고요함 속에서, 폭풍전야와 같은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노인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노인의 덥수룩한 수염 안에서, 그의 입 꼬리가 다시금 가늘게 위로 찢어져 올라갔다.
시-익.
“이거, 오랜만에 장난을 좀 쳐보고 싶었는데... 클클클클클.”
그 커다랗고 새빨간 상처 같은 입 사이에서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낮고, 음침한 웃음소리가 독한 연기처럼 흘러나와 피부를 찌르는 듯 했다.
“...정체가 뭐냐고?”
그리고 수염이나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덥수룩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그의 두꺼운 눈썹이 서서히 치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드러난, 오직 새빨간 색으로만 텅 비어있는 것 같은 두 눈이 미라의 시선을 압도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화로 같은 두 눈과, 기이할 정도로 길게 찢어진 입은 방금 전까지의 지저분하고 허술해 보이던 노인을 악몽 속에서나 나올법한 기괴한 괴물로 탈바꿈 시켰다. 그와 함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 또한 기괴하게 뒤틀렸다.
“죄 많은 이들을 씹어 먹으면 야차요, 죄 없는 이들을 내려칠 때는 오니요, 머리를 으깨면 두억신, 간을 뽑아먹으면 여우귀신이 되지. 그리고 내가 태어난 곳에서는 날 이렇게 불렀다.”
불현 듯 노인의 얼굴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커다란 솥단지 같은 아가리가 쩌억 벌어졌다.
“악마라고!!! 크흐흐하하하하하하하!!”
새빨간 눈을 치켜뜬 채 웃어재끼는 그의 모습은 조금 전 까지 보였던 노인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에 광기에 젖어 웃음 짓는 괴물이 하나 있었을 뿐.
미라는 그 모습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솔직히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기회를 봐서 제압하고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 노인에게서는 그런 일 따위는 시도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이 그녀를 머리를 쥐어짜듯 압박하고 있었다.
“제법 반반하니 가지고 놀면서 노리개로나 좀 쓸까 했는데, 너무 불평이 많구먼 그래. 클클클클.”
노인은 뾰족하고 새빨간 혀로 입맛을 다시면서 미라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그의 군홧발 소리가 미라의 귀를 파고들자, 그 소리는 그녀의 귓속에서 웅웅거리는 알 수 없는 울림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동시에 미라는 제대로 서있기 조차 힘들 정도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절규와 비명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도망쳐!-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어!-
-이 멍청이들아! 우리가 보호해야 할 곳에서 도리어 도망칠 셈이냐! 끝까지 싸워!-
‘사, 살고싶어...’
세상이 무너지고, 위 아래가 뒤집혔다. 미라는 미쳐버릴 것만 같은 어지러움과 메스꺼운 느낌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바닥에 앉은 건지, 출렁이는 물침대 위에 주저앉은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주체하기 힘든 어지럼증이 바닥과 함께 그녀를 위 아래로 세차게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머리통을 깨부수듯 울려댔고, 노인의 붉은 눈이 이리저리 휘저어지면서 시야를 가득 채웠다.
“미라야!”
멀리서 제이의 외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 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기억해내기 위해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노인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단 몇 걸음만큼의 짧은 시간이었고, 미처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미라는 갑자기 숨이 막히면서 몸이 붕 뜨는 기분을 느꼈다.
“허, 뭐야 이놈?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질질 짜는 꼴이라니. 이럼 재미가 없잖아.”
미라의 목을 움켜쥔 노인은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2미터가 넘는 키와 부러질 듯 깡마른 몸매로 다 큰 성인을 한 손으로 지탱하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물리법칙을 무시하게 조각한 기묘한 동상처럼 보였다.
“나름 앙칼진 재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헛수고였군.”
노인은 무심한 듯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연구실 벽으로 날아가 처박힌 미라는 바닥에 쓰러져 구역질을 하며 일어나지를 못했다. 제이는 미라를 향해 달려갔다.
“그나저나 이 멍청한 놈들은 수색할 시간이 다 지났는데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미라에게 흥미를 잃은 노인은 부하들을 찾으러 복도 밖으로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는 바지 위에 속옷을 낑겨 입은 남자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로 서 있었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