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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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Mission 03: Sgt.Snake (2)
1999년 5월 10일.
달빛에 의지해 마을로 들어갈 무렵에는 이미 사방에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오지 마을의 분위기가 풍기는 가운데 오직 군데군데 타오르는 횃불만이 이곳에 주민이 있음을 짐작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겁이라도 먹었는지 얼굴을 비추는 이 하나 없었다.
예정보다 늦었지만 일단 반군이 득실거린다는 정글을 헤치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점에 감사해야겠다.
"젠장- 고생고생해서 왔는데 이게 뭐야, 완전 촌구석이구만!"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서란은 양 팔을 휘저으며 짜증을 발산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통통한 강화복을 입고 뒤뚱거리는 모습은 그다지 호소력이 없어 보인다.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보이는 팔놀림 속에 긁힌 듯한 상처가 눈에 띈다. 물론 나뭇가지 따위에 긁힌 것이 아닌, 오후의 교전이 남긴 훈장이다.
거리도 가늠할 수 없는 수풀 너머에서 날아오는 반군 저격수의 총탄은 덩치 탓에 눈에 안 띌 래야 안 띌 수 없는 서란을 집요하게 노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다. 고작 구식 소련제 저격총이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강화복의 상대가 될 순 없는 것이다. 다만 아무리 안전하다고 하더라도 총탄이 몸에 맞고 튕겨 나가는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총알이 날아들어도 비명 한번 안 지른 서란이었지만 그녀가 한층 날카로워진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래가지고 잘 데나 있겠어? 그 잘난 미군들도 실은 못 살겠다고 도망쳐 버린 거 아냐?"
할 수만 있다면 강화복에 내장된 통신기의 볼륨을 낮추고 싶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현지인 병사들은 못 알아듣겠지만 몇몇 키득거리는 자들은 용병 형식으로 자리잡은 한국인들임에 틀림없다.
"너무 걱정 마세요, 서란 씨. 강화복은 입은 채로도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답니다. 초기형이라고 해도 일단은 야전용이니까 말이죠."
마을 안쪽에서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뭐가 좋은지 능청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다가오는 남자는 민 중위가 분명하다. 소문에 의하면 강화복 제작에 깊이 관여한 것은 물론 애꿎은 우리 부서에 떠넘긴 장본인이다. 정보국 본부에서 파견 나왔다곤 하지만 주로 연구소에 쳐박혀 있는 인물이기에 이런 현장에서 만나는 것은 사실 놀랄 만한 일이다.
"오랜만이군, 민 중위. 여기는 무슨 일이지? 자네 장난감이라면 보다시피 잘 가지고 노는 중인데."
따지고 보면 강화복 테스트 탓에 이런 오지에서까지 서란의 짜증을 듣게 된 것이니 민 중위에게 받아낼 빚은 한두푼이 아니다.
"그것 참 잘 됐네요. 저는 여러분들의 안내를 위해서 먼저 왔답니다. 먼 길 오셨는데 일단 짐부터 푸시죠."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민 중위가 이끄는 대로 가다보니 인가와 떨어진 공터에 일행들이 머물만한 천막들이 모여 있었다.
"준비하느라 수고했군. 그렇다면 지금부터 할 작전에 대한 설명도 준비해 놨겠지?"
"그야 물론이죠. 한가지 미리 말해 두자면 이 곳은 예전에 미군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따로 수고할 필요는 없었죠."
민 중위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우선 천막에 들어가서 쉬어볼까 하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정보에 따르면 이 마을에 머물던 일단의 미군 부대는 전멸했다. 반군의 기습이라도 당했다면 불탄 잔해나 시체 따위가 뒹굴고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이렇게 멀쩡한 숙영지라니. 그렇다면 사람들만 사라졌다는 소린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주인 잃은 천막에 편히 눕기란 찜찜한 노릇이다. 다행히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병사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자리를 잡느라 정신이 없다.
"걱정 마세요. 핏자국 같은 건 없으니. 제가 도착했을 때부터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원주민들에 따르면..."
눈치 빠르게도 민 중위는 이쪽이 입을 열기도 전에 듣고 싶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악마들이 그들을 데려갔다는군요. 뭐, 상당히 얌전한 악마들인가보죠."
별로 예상했던 말은 아니었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잘도 꺼내는 게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수상한 소리지만 오늘같은 밤은 악마가 나오기 딱 좋은 밤이긴 하네요."
정글에 어울리는 얼룩무늬 위장복을 걸친 민 중위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그의 입담만은 여전하다.
"듣자듣자하니 농담이 너무 지나친데? 숙녀한테 이런 깡통을 입은 채로 자라고 하질 않나, 이젠 삼류 공포 영화라도 찍자는 건가?"
하지만 민 중위의 말재간도 서란에게는 안 통한다랄까. 어느새 서란의 표적은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농담인지 아닌지는 이제 곧 알 수 있을 겁니다. 아직 밤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일단 들어오시죠."
생각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미소는 분명 유용한 장기다. 민 중위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가장 커다란 천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따라가 주는 수밖에.
....
...
..
"...정부군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줘도 못 쓰는 꼴이라니까, 이런 장비들은 아직 실전 배치도 안 된 최신형인데 말야. 뭐, 이번에 가져 온 KX-5 소총의 위력은 믿을만 할 겁니다."
커다란 막사 안은 온통 민 중위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위성과 연결된 최신식 컴퓨터 기기들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물론 바닥에 각종 소총을 비롯한 군용 장비들이 가지런히 벌려져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무기상인의 진열장을 연상케 할 정도다.
"듣기로는 반군들 쪽에도 상당한 지원이 가고 있다는데."
민 중위의 막사에는 정부군측 지휘관으로 보이는 손님이 이미 와 있었다. 작고 마른 체구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에 날카로운 눈매가 번뜩인다. 정부군의 고전은 양쪽에 무기를 팔아먹는 당신들 책임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가득 찬 표정이다. 그의 말대로 이 전쟁은 정부군과 반군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처음에는 이념의 탈을 썼고 다음에는 자원을 둘러싼 이해관계로 넘어갔지만 이제는 무기상들을 위한 사업장이 되어버린 사실도. 지분이 작지만 한국도 활발하게 손을 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 하지만 러시아도 예전같지는 않죠. 아시다시피 공식적으로는 이 내전에 개입하는 국가는 없습니다. 아니, 내전 자체도 부정되고 있는 상황이던가요, 쳉 대령님."
까딱하지 않는 표정의 대답. 지금이 냉전 시대도 아닌데 민 중위는 짐짓 능청을 떤다.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는 사내는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들에게는 이 전쟁이 좋은 돈벌이일 뿐이겠지만 언젠가는 우리 국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받게 될 거요. 어쩌면 여기서 전멸한 미군들은 벌써 값을 치른 걸지도 모르겠군."
"꽤나 과격한 발언인데요? 나중일은 그렇다 치고, 혹시 당신들이 이곳 주둔군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요?"
분노로 쳉 대령의 검은 얼굴이 벌개졌지만 민 중위는 그저 웃을 뿐이다. 곁에 있는 서란은 여전히 강화복을 입은 채였지만 반쯤 벗은 헬멧 아래로 이를 악물고 있다. 남의 나라 비극이나 구경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반군에게조차 밀리는 판에 무슨 수로 미군을 전멸시킨다는 거지? 당신은 이곳의 전설을 전혀 모르는군."
대령씩이나 되는 사람이 난데없이 전설이라니. 아무리 화가 난다지만 첨단 무기들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뱀 괴물이 악당을 처단한다."
물론 이쪽에도 전설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인물이 있기는 하다. 말없이 천막에 뒤따라 들어 온 뱀 병장이 소총을 만지작 거리며 입을 열었다.
"달밤에..?"
반사적으로 입을 연 서란이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대충 그런 거지. 그런데 자네는 이곳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모두가 어이 없어하는 가운데 쳉 대령만이 간신히 대답을 해 주었다.
"뭐, 이곳 사람보다도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그놈의 뱀 괴물도 질릴만큼..."
"아직도 미신 따위를 믿으니 제대로 싸울 리가 없지. 대령님도 꽤 순진하신 분이군."
뱀 병장의 말이 길어지려는 찰나에 서란이 적절하게 나서 주었다. 병장은 씩 웃으며 수염을 긁적일 뿐이다. 엉겁결에 한 방 먹은 쳉 대령은 입을 딱 벌렸다. 덩치 큰 강화복 속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독설이 이루는 부조화는 충분히 당황스러울 만 하다.
"자, 다들 진정하세요. 실은 오늘 밤 이곳에 모인 것은 따분한 토론이나 하기 위해서가 아니랍니다. 굳이 말하자면 작전을 앞둔 신장비 테스트라고나 할까."
역시 민 중위가 중재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모양이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한 쪽에 고이 모셔 둔 상자를 열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약간 두꺼워 보이는 머리띠 몇 개가 민 중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순간 일행의 시선이 한데 모였으나 물건의 정체를 알아채기엔 역부족이었다. 무슨 단체로 시위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우선 제가 써 보도록 하지요. 이것 덕분에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지 누가 알아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말의 내용은 그야말로 딴판이다. 마치 쓰지 않으면 밤을 무사히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에 가깝게 들린다. 일단 주는 물건을 받아 들기는 했지만 왠지 쓰기가 꺼려진다.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서란은 역시 받아 들었고, 뱀 병장은 끝까지 사양하는 모양이다. 두건 모양이 흐트러진다나. 쳉 대령은 굳은 표정으로 민 중위를 노려 볼 뿐이었다.
"오늘 밤에 잠은 다 잤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모두가 돌아봤지만 잠시였다. 다들 빌어먹을 내전과 널부러져 있는 무기들을 대상으로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인공의 조명 아래 네 남자와 강화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둘러앉은 채 밤을 지새우는 중이다. 격렬한 토론에 지친 탓에 다들 앉은 채로 잠이 들려는 분위기에서 서서히 일은 벌어졌다. 시작은 알 수 없는 두통과 함께였다.
술판을 벌였던 것도 아닌데 머리 속이 근질거리면서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 지끈거리는 머리와 동시에 울렁거리는 속은 술자리 이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데. 찡그린 얼굴로 다들 같은 기분인지 물어 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쳉 대령이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 들었다. 몽롱한 눈빛이었지만 총구는 정확하게 민 중위를 겨누고 있었다.
"우리들이 흘린 피가 너희들을 살찌운다."
중얼거림 끝에 울리는 건 한 발의 총성. 벌렁 뒤로 나자빠지는 민 중위의 모습에 단말마의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대령은 머리로 총을 가져갔다.
"뭐야? 이 아저씨가 미쳤나!"
말보다 행동이 빠른 서란이 곧장 강화복 채로 쳉 대령을 들이박은 뒤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대령은 그대로 뻗어버렸다. 강화복이 격투전에도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가는 것도 잠시, 얼른 민 중위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어서...이걸 대령에게 씌워줘요. 살아 있다면 말이죠."
서란의 주먹이 낸 둔탁한 소리를 들은 건지 민 중위는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처가 어떤지 만져보니 단단한 방탄 조끼의 감촉만이 있을 뿐이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아무튼 시키는 대로 기절한 대령의 머리에 예의 머리띠를 둘러주고 한숨 돌리려는 찰나, 바깥에서도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비명. 이상한 것은 총소리가 마치 음악 연주라도 하듯 차례대로 울렸다는 점이다.
기습인가, 잘 계획된 저격인가. 교대로 배치해 둔 보초들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토록 무방비하게 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두통은 이제 어느정도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이다.
"왔군."
항상 손에서 떼지 않던 소총에 탄창을 다시 끼워 넣으며 뱀 병장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대체 뭐가 왔다는 건데?
"뭐가 왔든간에 한바탕 해야겠네."
강화복 헬멧의 잠금장치를 확인한 서란이 묵직한 팔을 뻗어 바닥에 널린 신형 소총을 집어 들었다. 보통 때라면 들기도 힘들었을 텐데 강화복 덕분에 손쉬운 모양이다. 워낙 자연스러워 보이는 동작이었기에 그녀의 사격 실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사격 실력에 대해 한 마디 의문을 제기하려는 순간, 왠지 낯익은 녹색 섬광이 눈을 자극했다.
1999년 5월 10일.
달빛에 의지해 마을로 들어갈 무렵에는 이미 사방에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오지 마을의 분위기가 풍기는 가운데 오직 군데군데 타오르는 횃불만이 이곳에 주민이 있음을 짐작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겁이라도 먹었는지 얼굴을 비추는 이 하나 없었다.
예정보다 늦었지만 일단 반군이 득실거린다는 정글을 헤치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점에 감사해야겠다.
"젠장- 고생고생해서 왔는데 이게 뭐야, 완전 촌구석이구만!"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서란은 양 팔을 휘저으며 짜증을 발산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통통한 강화복을 입고 뒤뚱거리는 모습은 그다지 호소력이 없어 보인다.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보이는 팔놀림 속에 긁힌 듯한 상처가 눈에 띈다. 물론 나뭇가지 따위에 긁힌 것이 아닌, 오후의 교전이 남긴 훈장이다.
거리도 가늠할 수 없는 수풀 너머에서 날아오는 반군 저격수의 총탄은 덩치 탓에 눈에 안 띌 래야 안 띌 수 없는 서란을 집요하게 노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다. 고작 구식 소련제 저격총이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강화복의 상대가 될 순 없는 것이다. 다만 아무리 안전하다고 하더라도 총탄이 몸에 맞고 튕겨 나가는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총알이 날아들어도 비명 한번 안 지른 서란이었지만 그녀가 한층 날카로워진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래가지고 잘 데나 있겠어? 그 잘난 미군들도 실은 못 살겠다고 도망쳐 버린 거 아냐?"
할 수만 있다면 강화복에 내장된 통신기의 볼륨을 낮추고 싶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현지인 병사들은 못 알아듣겠지만 몇몇 키득거리는 자들은 용병 형식으로 자리잡은 한국인들임에 틀림없다.
"너무 걱정 마세요, 서란 씨. 강화복은 입은 채로도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답니다. 초기형이라고 해도 일단은 야전용이니까 말이죠."
마을 안쪽에서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뭐가 좋은지 능청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다가오는 남자는 민 중위가 분명하다. 소문에 의하면 강화복 제작에 깊이 관여한 것은 물론 애꿎은 우리 부서에 떠넘긴 장본인이다. 정보국 본부에서 파견 나왔다곤 하지만 주로 연구소에 쳐박혀 있는 인물이기에 이런 현장에서 만나는 것은 사실 놀랄 만한 일이다.
"오랜만이군, 민 중위. 여기는 무슨 일이지? 자네 장난감이라면 보다시피 잘 가지고 노는 중인데."
따지고 보면 강화복 테스트 탓에 이런 오지에서까지 서란의 짜증을 듣게 된 것이니 민 중위에게 받아낼 빚은 한두푼이 아니다.
"그것 참 잘 됐네요. 저는 여러분들의 안내를 위해서 먼저 왔답니다. 먼 길 오셨는데 일단 짐부터 푸시죠."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민 중위가 이끄는 대로 가다보니 인가와 떨어진 공터에 일행들이 머물만한 천막들이 모여 있었다.
"준비하느라 수고했군. 그렇다면 지금부터 할 작전에 대한 설명도 준비해 놨겠지?"
"그야 물론이죠. 한가지 미리 말해 두자면 이 곳은 예전에 미군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따로 수고할 필요는 없었죠."
민 중위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우선 천막에 들어가서 쉬어볼까 하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정보에 따르면 이 마을에 머물던 일단의 미군 부대는 전멸했다. 반군의 기습이라도 당했다면 불탄 잔해나 시체 따위가 뒹굴고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이렇게 멀쩡한 숙영지라니. 그렇다면 사람들만 사라졌다는 소린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주인 잃은 천막에 편히 눕기란 찜찜한 노릇이다. 다행히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병사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자리를 잡느라 정신이 없다.
"걱정 마세요. 핏자국 같은 건 없으니. 제가 도착했을 때부터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원주민들에 따르면..."
눈치 빠르게도 민 중위는 이쪽이 입을 열기도 전에 듣고 싶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악마들이 그들을 데려갔다는군요. 뭐, 상당히 얌전한 악마들인가보죠."
별로 예상했던 말은 아니었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잘도 꺼내는 게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수상한 소리지만 오늘같은 밤은 악마가 나오기 딱 좋은 밤이긴 하네요."
정글에 어울리는 얼룩무늬 위장복을 걸친 민 중위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그의 입담만은 여전하다.
"듣자듣자하니 농담이 너무 지나친데? 숙녀한테 이런 깡통을 입은 채로 자라고 하질 않나, 이젠 삼류 공포 영화라도 찍자는 건가?"
하지만 민 중위의 말재간도 서란에게는 안 통한다랄까. 어느새 서란의 표적은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농담인지 아닌지는 이제 곧 알 수 있을 겁니다. 아직 밤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일단 들어오시죠."
생각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미소는 분명 유용한 장기다. 민 중위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가장 커다란 천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따라가 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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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군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줘도 못 쓰는 꼴이라니까, 이런 장비들은 아직 실전 배치도 안 된 최신형인데 말야. 뭐, 이번에 가져 온 KX-5 소총의 위력은 믿을만 할 겁니다."
커다란 막사 안은 온통 민 중위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위성과 연결된 최신식 컴퓨터 기기들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물론 바닥에 각종 소총을 비롯한 군용 장비들이 가지런히 벌려져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무기상인의 진열장을 연상케 할 정도다.
"듣기로는 반군들 쪽에도 상당한 지원이 가고 있다는데."
민 중위의 막사에는 정부군측 지휘관으로 보이는 손님이 이미 와 있었다. 작고 마른 체구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에 날카로운 눈매가 번뜩인다. 정부군의 고전은 양쪽에 무기를 팔아먹는 당신들 책임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가득 찬 표정이다. 그의 말대로 이 전쟁은 정부군과 반군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처음에는 이념의 탈을 썼고 다음에는 자원을 둘러싼 이해관계로 넘어갔지만 이제는 무기상들을 위한 사업장이 되어버린 사실도. 지분이 작지만 한국도 활발하게 손을 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 하지만 러시아도 예전같지는 않죠. 아시다시피 공식적으로는 이 내전에 개입하는 국가는 없습니다. 아니, 내전 자체도 부정되고 있는 상황이던가요, 쳉 대령님."
까딱하지 않는 표정의 대답. 지금이 냉전 시대도 아닌데 민 중위는 짐짓 능청을 떤다.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는 사내는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들에게는 이 전쟁이 좋은 돈벌이일 뿐이겠지만 언젠가는 우리 국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받게 될 거요. 어쩌면 여기서 전멸한 미군들은 벌써 값을 치른 걸지도 모르겠군."
"꽤나 과격한 발언인데요? 나중일은 그렇다 치고, 혹시 당신들이 이곳 주둔군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요?"
분노로 쳉 대령의 검은 얼굴이 벌개졌지만 민 중위는 그저 웃을 뿐이다. 곁에 있는 서란은 여전히 강화복을 입은 채였지만 반쯤 벗은 헬멧 아래로 이를 악물고 있다. 남의 나라 비극이나 구경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반군에게조차 밀리는 판에 무슨 수로 미군을 전멸시킨다는 거지? 당신은 이곳의 전설을 전혀 모르는군."
대령씩이나 되는 사람이 난데없이 전설이라니. 아무리 화가 난다지만 첨단 무기들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뱀 괴물이 악당을 처단한다."
물론 이쪽에도 전설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인물이 있기는 하다. 말없이 천막에 뒤따라 들어 온 뱀 병장이 소총을 만지작 거리며 입을 열었다.
"달밤에..?"
반사적으로 입을 연 서란이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대충 그런 거지. 그런데 자네는 이곳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모두가 어이 없어하는 가운데 쳉 대령만이 간신히 대답을 해 주었다.
"뭐, 이곳 사람보다도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그놈의 뱀 괴물도 질릴만큼..."
"아직도 미신 따위를 믿으니 제대로 싸울 리가 없지. 대령님도 꽤 순진하신 분이군."
뱀 병장의 말이 길어지려는 찰나에 서란이 적절하게 나서 주었다. 병장은 씩 웃으며 수염을 긁적일 뿐이다. 엉겁결에 한 방 먹은 쳉 대령은 입을 딱 벌렸다. 덩치 큰 강화복 속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독설이 이루는 부조화는 충분히 당황스러울 만 하다.
"자, 다들 진정하세요. 실은 오늘 밤 이곳에 모인 것은 따분한 토론이나 하기 위해서가 아니랍니다. 굳이 말하자면 작전을 앞둔 신장비 테스트라고나 할까."
역시 민 중위가 중재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모양이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한 쪽에 고이 모셔 둔 상자를 열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약간 두꺼워 보이는 머리띠 몇 개가 민 중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순간 일행의 시선이 한데 모였으나 물건의 정체를 알아채기엔 역부족이었다. 무슨 단체로 시위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우선 제가 써 보도록 하지요. 이것 덕분에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지 누가 알아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말의 내용은 그야말로 딴판이다. 마치 쓰지 않으면 밤을 무사히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에 가깝게 들린다. 일단 주는 물건을 받아 들기는 했지만 왠지 쓰기가 꺼려진다.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서란은 역시 받아 들었고, 뱀 병장은 끝까지 사양하는 모양이다. 두건 모양이 흐트러진다나. 쳉 대령은 굳은 표정으로 민 중위를 노려 볼 뿐이었다.
"오늘 밤에 잠은 다 잤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모두가 돌아봤지만 잠시였다. 다들 빌어먹을 내전과 널부러져 있는 무기들을 대상으로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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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인공의 조명 아래 네 남자와 강화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둘러앉은 채 밤을 지새우는 중이다. 격렬한 토론에 지친 탓에 다들 앉은 채로 잠이 들려는 분위기에서 서서히 일은 벌어졌다. 시작은 알 수 없는 두통과 함께였다.
술판을 벌였던 것도 아닌데 머리 속이 근질거리면서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 지끈거리는 머리와 동시에 울렁거리는 속은 술자리 이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데. 찡그린 얼굴로 다들 같은 기분인지 물어 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쳉 대령이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 들었다. 몽롱한 눈빛이었지만 총구는 정확하게 민 중위를 겨누고 있었다.
"우리들이 흘린 피가 너희들을 살찌운다."
중얼거림 끝에 울리는 건 한 발의 총성. 벌렁 뒤로 나자빠지는 민 중위의 모습에 단말마의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대령은 머리로 총을 가져갔다.
"뭐야? 이 아저씨가 미쳤나!"
말보다 행동이 빠른 서란이 곧장 강화복 채로 쳉 대령을 들이박은 뒤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대령은 그대로 뻗어버렸다. 강화복이 격투전에도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가는 것도 잠시, 얼른 민 중위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어서...이걸 대령에게 씌워줘요. 살아 있다면 말이죠."
서란의 주먹이 낸 둔탁한 소리를 들은 건지 민 중위는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처가 어떤지 만져보니 단단한 방탄 조끼의 감촉만이 있을 뿐이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아무튼 시키는 대로 기절한 대령의 머리에 예의 머리띠를 둘러주고 한숨 돌리려는 찰나, 바깥에서도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비명. 이상한 것은 총소리가 마치 음악 연주라도 하듯 차례대로 울렸다는 점이다.
기습인가, 잘 계획된 저격인가. 교대로 배치해 둔 보초들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토록 무방비하게 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두통은 이제 어느정도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이다.
"왔군."
항상 손에서 떼지 않던 소총에 탄창을 다시 끼워 넣으며 뱀 병장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대체 뭐가 왔다는 건데?
"뭐가 왔든간에 한바탕 해야겠네."
강화복 헬멧의 잠금장치를 확인한 서란이 묵직한 팔을 뻗어 바닥에 널린 신형 소총을 집어 들었다. 보통 때라면 들기도 힘들었을 텐데 강화복 덕분에 손쉬운 모양이다. 워낙 자연스러워 보이는 동작이었기에 그녀의 사격 실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사격 실력에 대해 한 마디 의문을 제기하려는 순간, 왠지 낯익은 녹색 섬광이 눈을 자극했다.
안녕하세요?
이제 본격적으로 교전이 시작되겠군요.
신형병기로도 플라즈마 병기에 맞서 싸우기는.. 쉽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