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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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 Mission 03: Sgt.Snake (1)
1999년 5월 10일.
간밤에 쏟아진 비로 축축해진 수풀을 밟는 느낌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낯선 땅이라 그런가. 거대한 열대 우림이 만들어 낸 그림자 역시 시원함보다는 찝찝한 기분을 불러 일으켰다.
다들 어떤 기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행은 목적지를 향해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일행이라고 해 봤자 왠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일개 분대 정도의 병력이 고작이지만, 이마저 없었더라면 아예 임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뭐라고 하던간에 이곳은 아직도 내전이 진행 중인 지역이니까. 조사 목적이라기엔 과도한 무장 역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적당한 권력과 언론의 힘이 모인다면 이곳, 아무도 살지 않을 것만 같은 오지의 드넓은 정글 속에서 진실 따위를 묻어 버리기란 너무나 쉽다.
"...악마라고?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
"그래, 최소한 악마보다 더 끔찍한 놈일 테지."
의미 없이 튀어나온 혼잣말에 바로 말대답이 날아 온다. 귀가 밝다고 칭찬해 주어야 하는 걸까. 복장점검에서 항상 열외라도 했는지 지저분하게 기른 구렛나루와 수염이 얼굴을 덮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병사가 가래 끓는 목소리를 이어간다.
"혹시 뱀 괴물 이야긴 못 들어봤나?"
똑같은 이야기를 또 꺼내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다. 물론 정글에서 만나는 뱀이란 참 재수 없는 존재지만 괴물이라고까지 부르는 사람은 또 처음이다.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럴 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야겠지. 질끈 동여 맨 머리띠에 색이 바랜 회색빛 수염이 우스꽝스럽다.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볼 때 노병까지는 아니더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괴물 뱀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건 착각이지."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실없는 소리를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의 연륜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임무 목적이나 계급상 직속 부하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입을 다물게 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아무리 건방져도 인도차이나 방면 파병부대 중 가장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인물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괴팍한 성격에 온갖 소문이 꼬리를 물지만 이 바닥에서 명성이 자자한 실력을 믿어 볼 뿐이다.
"사람을 물어 죽이지는 않거든."
수염 사이로 씨익 웃는지 누런 이빨이 드러난다. 벌써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는 뱀 타령이다. 대답할 생각은 들지 않고 그의 너덜너덜한 네 가닥 계급장만이 눈에 들어 온다. 예의 소문에 의하면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역 및 귀국을 거부하고 파병 부대에 계속 남았기 때문에 고정된 병장 계급이라고 한다. 물론 군대 인사 규정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명찰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찢어진 흔적만이 남아 있다. 거친 솜씨로 적혀 있는 'Snake'라는 붉은 글씨가 그의 이름 아닌 별명을 알려 주었다. 아마도 저 호칭은 정글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뱀을 식량으로 사용한 일화에서 시작된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흔한 일이다. 땅꾼에 소질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특이한 식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뱀 잡는 데 명수라는 사실에서부터 그의 별명이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주워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남을 성가시게 일에 능숙한 성격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이, 뱀 아저씨. 또 시작인가요? 정말 귀가 닳을 지경이네!"
행렬 뒤 쪽에서 들려 오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망상을 방해한다. 돌아볼 것도 없이 서란이다. 그녀는 지금 연구소로부터 공수받은 신 장비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왠지 평소보다 짜증이 더한 서란의 목소리는 충분히 이해가 갈 만했다.
새로운 장비란 다름아닌 전신을 감싸는 일종의 전투복인데, 그녀의 흥미를 끌거나, 혹은 쾌적함을 제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우리 군도 파워드 수트인지 뭔지 하는 물건 개발이라는 세계적인 유행을 따르는 건지는 아무래도 좋다. 열 받는 건 아직 덜 만든 듯한 물건을 지역적응성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이번 임무에 투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설상 가상으로 테스트의 담당은 부서 대원 중-그래봤자 둘이지만- 가장 적합한, 아니 상부에서 적합하다고 판단한 서란이 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이런 결정에는 지형 적응성 파악과 동시에 여성의 전투복 착용 가능성도 동시에 검토하려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안그래도 찌는 날씨에 졸지에 답답한 전투복 속에 갇히게 된 서란이 납득할 리가 없었다.
"이제 좀 살 만 한가보구만."
하긴, 아까는 더워서 아무 말도 못 했지. 서란의 매서운 살기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뱀 병장이다.
"아, 진짜...나중에 반드시 연구소에서 추가 수당을 받고 말 테다!"
병장의 관록이란 걸 알기는 하는지 서란은 애꿎은 연구소에 화풀이를 해 댄다.
"그러게 왜 따라 온 거야? 대체..."
더위 때문에 약간 수그러진 서란의 기세에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번 임무는 이곳 인도차이나 반도 지역에서 신종 외계인이 출현했다는 정보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 전투와는 거리가 먼 직책의 그녀가 올 이유는 없었다. 전투복 테스트야 안전 지대에서 형식적으로 수행하면 될 일이고...
"해외 파견 수당 받기가 쉬운 줄 알아? 게다가 위험 수당은 또 얼만데-?."
기다렸다는 듯 반격이 쏟아져 나온다. 말을 꺼낸 게 잘못이다. 어쩌면 그녀의 짜증은 열대의 더위보다는 수다를 떨 상대가 없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란은 더 말할 힘도 없다는 듯 한번 흘겨 보더니 얼굴 부분의 해치를 닫아 버렸다. 해치라. 사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말이 전투복이지 두께를 늘리기보다는 완전 밀폐에 더 신경을 쓴 것이 잠수복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이었다. 정글 속의 잠수복이라니, 꽤나 난감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 부담스런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전투용으로는 아직 수준 미달이었다.
소위 파워드 수트라는 명칭에 걸맞게 보조 동력 덕분에 이동 시 체력이 덜 소모되는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전투용으로는 아직 쓸만한 단계가 아님은 통통한 겉모양을 보자마자 금방 알 수 있다. 연구소 측에서는 미국의 랜드워리어 프로젝트를 넘어서는 강화 보병을 꿈꾸는 모양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내놓은 타입에는 야간 암시경이나 휴대용 통신 장비 뿐 어떠한 화기관제 장비도 장착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있더라도 서란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진다.
"아무리 봐도 재미있는 여잘세. 걸치고 있는 장난감을 빼고도 말야."
씩 웃은 뱀 병장이 어깨에 총을 기대면서 중얼거렸다. 서란이 헬멧 속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뱀 병장이 만지작거리는 총 역시 이번에 수송 임무를 겸해서 가져온 장난감 중 하나였다.
아직 정해진 제식 명칭조차 없이 그저 날림으로 KX-5라 불리는 새로운 소총. 일설에 의하면 보안 유지를 위해 기존의 K-5권총 개량형 연구로 위장했기에 붙여진 번호라고도 하지만 우스운 이야기다. 40발들이 탄창을 포함해서 무게가 6Kg에 이르는 무식한 소총을 하필 조그만 권총으로 위장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연구소에 발이 넓은 민 중위의 말로는 현재 수출을 앞두고 여기저기에서 실전 테스트를 실시하는 중이라는데 동남아 오지인 이곳도 예외가 될 순 없었던 듯 하다. 그렇지만 온통 정글뿐인 이곳에서 이동에 불편한 무거운 소총이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보다 기껏해야 반군 게릴라 상대로 과연 이같은 강력한 화력이 필요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겠지만.
"그나저나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지? 음, 지난 주만 해도 일개 소대가 뱀한테 물렸다던데..."
뱀이라니, 반군이겠지. 왠지 안 어울리게 귀여운 표현이다. 이 근방에서 반군의 기습에 의한 피해는 거의 일상적이나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뱀 모양을 상징으로 삼은 반군 조직이 생겼다는 정보를 들은 기억이 있다. 어찌됐든 뱀 병장의 입담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날이 저물기 전에 어서 도착할 수 있었으면...
그럭저럭 길다웠던 길이 점점 무성히 자란 수풀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앞쪽의 병사 몇은 이미 단검을 꺼내 들었다. 조용한 루트라더니 험한 길을 골라 줬나 보다.
이번 임무는 그저 최대한 조용한 루트를 통해 정글 깊숙이 자리잡은 원주민 촌락에 도달, 목격자들의 증언과 현장 조사를 실시하는 것 뿐이었다. 물론 신 대위로부터의 명령이니만큼 신빙성에는 의심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현지의 우리 군 옵서버를 통해 입수했다는 새로운 외계인의 출몰에 대한 정보는 너무나 간결했다. 아무리 우리 과가 할 일이 없다지만 이 정도의 정보를 통해 움직이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하긴, 아무래도 조사보다는 신장비 수송 및 시험이 주된 임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 머릿 속을 가득 채운 것은 단 두 가지 단서 뿐이다. 우선 현재 우리가 이국의 정글을 헤치며 향하고 있는 첫 방문지이자 마지막 방문지가 될 원주민 촌락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가 얼마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몰살당했다는 소식. 그리고 그것을 악마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 두 가지 모두 믿기 어렵지만 신 대위 성격에 무리하게 파견이라도 보내서 확인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한 단서이긴 하다.
뱀이라 불리는 병장이 있듯이, 분명 악마라는 이름이 손색 없는 놈들도 이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1999년 5월 10일.
간밤에 쏟아진 비로 축축해진 수풀을 밟는 느낌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낯선 땅이라 그런가. 거대한 열대 우림이 만들어 낸 그림자 역시 시원함보다는 찝찝한 기분을 불러 일으켰다.
다들 어떤 기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행은 목적지를 향해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일행이라고 해 봤자 왠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일개 분대 정도의 병력이 고작이지만, 이마저 없었더라면 아예 임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뭐라고 하던간에 이곳은 아직도 내전이 진행 중인 지역이니까. 조사 목적이라기엔 과도한 무장 역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적당한 권력과 언론의 힘이 모인다면 이곳, 아무도 살지 않을 것만 같은 오지의 드넓은 정글 속에서 진실 따위를 묻어 버리기란 너무나 쉽다.
"...악마라고?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
"그래, 최소한 악마보다 더 끔찍한 놈일 테지."
의미 없이 튀어나온 혼잣말에 바로 말대답이 날아 온다. 귀가 밝다고 칭찬해 주어야 하는 걸까. 복장점검에서 항상 열외라도 했는지 지저분하게 기른 구렛나루와 수염이 얼굴을 덮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병사가 가래 끓는 목소리를 이어간다.
"혹시 뱀 괴물 이야긴 못 들어봤나?"
똑같은 이야기를 또 꺼내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다. 물론 정글에서 만나는 뱀이란 참 재수 없는 존재지만 괴물이라고까지 부르는 사람은 또 처음이다.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럴 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야겠지. 질끈 동여 맨 머리띠에 색이 바랜 회색빛 수염이 우스꽝스럽다.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볼 때 노병까지는 아니더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괴물 뱀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건 착각이지."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실없는 소리를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의 연륜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임무 목적이나 계급상 직속 부하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입을 다물게 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아무리 건방져도 인도차이나 방면 파병부대 중 가장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인물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괴팍한 성격에 온갖 소문이 꼬리를 물지만 이 바닥에서 명성이 자자한 실력을 믿어 볼 뿐이다.
"사람을 물어 죽이지는 않거든."
수염 사이로 씨익 웃는지 누런 이빨이 드러난다. 벌써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는 뱀 타령이다. 대답할 생각은 들지 않고 그의 너덜너덜한 네 가닥 계급장만이 눈에 들어 온다. 예의 소문에 의하면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역 및 귀국을 거부하고 파병 부대에 계속 남았기 때문에 고정된 병장 계급이라고 한다. 물론 군대 인사 규정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명찰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찢어진 흔적만이 남아 있다. 거친 솜씨로 적혀 있는 'Snake'라는 붉은 글씨가 그의 이름 아닌 별명을 알려 주었다. 아마도 저 호칭은 정글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뱀을 식량으로 사용한 일화에서 시작된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흔한 일이다. 땅꾼에 소질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특이한 식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뱀 잡는 데 명수라는 사실에서부터 그의 별명이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주워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남을 성가시게 일에 능숙한 성격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이, 뱀 아저씨. 또 시작인가요? 정말 귀가 닳을 지경이네!"
행렬 뒤 쪽에서 들려 오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망상을 방해한다. 돌아볼 것도 없이 서란이다. 그녀는 지금 연구소로부터 공수받은 신 장비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왠지 평소보다 짜증이 더한 서란의 목소리는 충분히 이해가 갈 만했다.
새로운 장비란 다름아닌 전신을 감싸는 일종의 전투복인데, 그녀의 흥미를 끌거나, 혹은 쾌적함을 제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우리 군도 파워드 수트인지 뭔지 하는 물건 개발이라는 세계적인 유행을 따르는 건지는 아무래도 좋다. 열 받는 건 아직 덜 만든 듯한 물건을 지역적응성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이번 임무에 투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설상 가상으로 테스트의 담당은 부서 대원 중-그래봤자 둘이지만- 가장 적합한, 아니 상부에서 적합하다고 판단한 서란이 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이런 결정에는 지형 적응성 파악과 동시에 여성의 전투복 착용 가능성도 동시에 검토하려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안그래도 찌는 날씨에 졸지에 답답한 전투복 속에 갇히게 된 서란이 납득할 리가 없었다.
"이제 좀 살 만 한가보구만."
하긴, 아까는 더워서 아무 말도 못 했지. 서란의 매서운 살기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뱀 병장이다.
"아, 진짜...나중에 반드시 연구소에서 추가 수당을 받고 말 테다!"
병장의 관록이란 걸 알기는 하는지 서란은 애꿎은 연구소에 화풀이를 해 댄다.
"그러게 왜 따라 온 거야? 대체..."
더위 때문에 약간 수그러진 서란의 기세에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번 임무는 이곳 인도차이나 반도 지역에서 신종 외계인이 출현했다는 정보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 전투와는 거리가 먼 직책의 그녀가 올 이유는 없었다. 전투복 테스트야 안전 지대에서 형식적으로 수행하면 될 일이고...
"해외 파견 수당 받기가 쉬운 줄 알아? 게다가 위험 수당은 또 얼만데-?."
기다렸다는 듯 반격이 쏟아져 나온다. 말을 꺼낸 게 잘못이다. 어쩌면 그녀의 짜증은 열대의 더위보다는 수다를 떨 상대가 없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란은 더 말할 힘도 없다는 듯 한번 흘겨 보더니 얼굴 부분의 해치를 닫아 버렸다. 해치라. 사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말이 전투복이지 두께를 늘리기보다는 완전 밀폐에 더 신경을 쓴 것이 잠수복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이었다. 정글 속의 잠수복이라니, 꽤나 난감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 부담스런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전투용으로는 아직 수준 미달이었다.
소위 파워드 수트라는 명칭에 걸맞게 보조 동력 덕분에 이동 시 체력이 덜 소모되는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전투용으로는 아직 쓸만한 단계가 아님은 통통한 겉모양을 보자마자 금방 알 수 있다. 연구소 측에서는 미국의 랜드워리어 프로젝트를 넘어서는 강화 보병을 꿈꾸는 모양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내놓은 타입에는 야간 암시경이나 휴대용 통신 장비 뿐 어떠한 화기관제 장비도 장착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있더라도 서란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진다.
"아무리 봐도 재미있는 여잘세. 걸치고 있는 장난감을 빼고도 말야."
씩 웃은 뱀 병장이 어깨에 총을 기대면서 중얼거렸다. 서란이 헬멧 속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뱀 병장이 만지작거리는 총 역시 이번에 수송 임무를 겸해서 가져온 장난감 중 하나였다.
아직 정해진 제식 명칭조차 없이 그저 날림으로 KX-5라 불리는 새로운 소총. 일설에 의하면 보안 유지를 위해 기존의 K-5권총 개량형 연구로 위장했기에 붙여진 번호라고도 하지만 우스운 이야기다. 40발들이 탄창을 포함해서 무게가 6Kg에 이르는 무식한 소총을 하필 조그만 권총으로 위장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연구소에 발이 넓은 민 중위의 말로는 현재 수출을 앞두고 여기저기에서 실전 테스트를 실시하는 중이라는데 동남아 오지인 이곳도 예외가 될 순 없었던 듯 하다. 그렇지만 온통 정글뿐인 이곳에서 이동에 불편한 무거운 소총이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보다 기껏해야 반군 게릴라 상대로 과연 이같은 강력한 화력이 필요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겠지만.
"그나저나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지? 음, 지난 주만 해도 일개 소대가 뱀한테 물렸다던데..."
뱀이라니, 반군이겠지. 왠지 안 어울리게 귀여운 표현이다. 이 근방에서 반군의 기습에 의한 피해는 거의 일상적이나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뱀 모양을 상징으로 삼은 반군 조직이 생겼다는 정보를 들은 기억이 있다. 어찌됐든 뱀 병장의 입담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날이 저물기 전에 어서 도착할 수 있었으면...
그럭저럭 길다웠던 길이 점점 무성히 자란 수풀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앞쪽의 병사 몇은 이미 단검을 꺼내 들었다. 조용한 루트라더니 험한 길을 골라 줬나 보다.
이번 임무는 그저 최대한 조용한 루트를 통해 정글 깊숙이 자리잡은 원주민 촌락에 도달, 목격자들의 증언과 현장 조사를 실시하는 것 뿐이었다. 물론 신 대위로부터의 명령이니만큼 신빙성에는 의심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현지의 우리 군 옵서버를 통해 입수했다는 새로운 외계인의 출몰에 대한 정보는 너무나 간결했다. 아무리 우리 과가 할 일이 없다지만 이 정도의 정보를 통해 움직이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하긴, 아무래도 조사보다는 신장비 수송 및 시험이 주된 임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 머릿 속을 가득 채운 것은 단 두 가지 단서 뿐이다. 우선 현재 우리가 이국의 정글을 헤치며 향하고 있는 첫 방문지이자 마지막 방문지가 될 원주민 촌락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가 얼마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몰살당했다는 소식. 그리고 그것을 악마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 두 가지 모두 믿기 어렵지만 신 대위 성격에 무리하게 파견이라도 보내서 확인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한 단서이긴 하다.
뱀이라 불리는 병장이 있듯이, 분명 악마라는 이름이 손색 없는 놈들도 이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