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 세월 동안, 인간들의 시대는 지속되었다. 인간들은 신에게 선택된 백성들이었다. 인간의 번영은 "너희의 자손이 한 줌의 먼지가 바람에 휘말려 흩어지는 것처럼 세상에 널리 퍼지리라"는 말과 같았다. 끝 간데 모르고 계속되는 지식의 탐구와 화려의 극치를 달리는 물화들는 견주일 곳이 없었다.

그러나 신은 어느 순간에서인가 인간을 버렸다. 그들은 더이상 선택받은 백성이 아니었다. 아니, 그 뿐 아니라, 신은 마치 인간이라는 족속 전체를 그들의 세상과 함께 없애버리려는 듯 했다. 징조들은 서서히, 그러나 뚜렷하게 나타났다... 떨어지는 이파리에서도 폭풍을 읽을 수 있는 현자들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감지하고 경고했으나, 그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별로 없었다. 대륙 전역에 몇여년 동안 비가 한방울도 오지 않다가 어느 해에는 마치 그때까지 오지 않은 모든 비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대홍수가 일었다. 이제껏 찾아 볼 수조차 없을만큼 지독한 추위가 닥치며, 북방의 얼어붙은 바다에서부터 떠내려오는 빙산들이 대륙의 북쪽에 있는 항구들에서 자주 목격되었다. 짐승들이 떼를 이루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고, 처음으로 발견되는 기묘하게 뒤틀린 생물들도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꾸만 대륙 전역의 유통체계와 경제체계가 예측되지 못한 사건들로 인해 흔들렸다. 물산은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고, 곳곳에서 빈곤과 기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명망높은 대주교와 대륙평의원들 몇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었다. 현자로 칭송받던 이들이 갑자기 사라진 후 다시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왕국들 간에는 점차 전운이 감돌았다 - 어째서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개개의 사소한 사건들이 모여들어 최종적으로 일으키는 것은 외교적인 마찰과 날로 위태로워지는 국가들 간의 관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왕국'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천사들이 경이에 차 천사들을 우러러보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축복이 있으리라. 신께서 새로이 선택하실 백성들아. 너희, 예비하고 기다릴지어다. 너희 성도들을 위한 영원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다. 계시를 받은 군주들은 저마다 거침없이 군대를 일으켜 이웃의 국가로 쏟아져들어갔다. 대륙 전체에 전란이 휘몰아쳤다. 수많은 영화와 고귀함이 바닥에 떨어져 짓밟혀 쓰러졌다. 전란의 소용돌이는 오랜 시일 동안 지속되었다 - 그 혼란의 시간 동안, 곳곳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목격되었다. 이 기적들에 힘입은 군주들은 저마다 자신의 왕국이 선택받은 백성의 나라, 영원왕국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믿음들로, 각국의 군대들은 더욱더 치열히 전투에 임했다.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흙에 얼룩진 붉은 피를 남기고 스러졌다. 대륙 전체의 인간들이 누리던 풍요는 이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치 물로 씻어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대륙 전체에서 모든 전쟁이 멈추었다. 살아남은 군주들은 이제껏 자신들이 어떠한 명령을 내렸는지 돌아보고 의아해했다. 그들 전체를 휩싸고 있던 이해할 수 없는 광기가 사라진 것이다.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 - 그제서야 인간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영원왕국'은 이 지상위에 세워질 어떠한 천상의 왕국이 아닌, 모든 것들이 스러지고 신의 이름 아래 있을 단 하나의 왕국 - 인간의 멸망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를 깨달은 인간들은 그들의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을 내어치려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리고 이 절망은 점차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거대한 전쟁 - 창조주와 그 피조물들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사실을 깨달은 자들과 아직도 깨닫지 못한 자들.

아니, 정확하게는 진정한 사실을 깨달은 자들과 자신들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믿고있는' 자들로 나뉘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진정한 사실을 깨달은 자들은 이유야 어찌되었건 신이 인간들과 그들의 세상을 파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그들의 창조주의 뜻대로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신에 대항해서 싸운다는 - 무모하지만 진정 '인간다운' 길을 택했다. 믿고 있는 자들은 환난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환난이 신이 인간을 쓸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것이 시련이라 믿었다 - 새로이 백성들을 선택하기 위한. 신의 계시... '성도'들만의 왕국, 선택받은 자 들만의 왕국. 영원히 슬픔과 죽음과 고통과 공포가 범접할 수 없을,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 영원히 지속될, 신의 이름 아래 오직 하나 뿐인 천상의 왕국. 그들은 어떠한 유혹이나 거짓에도 넘어가서는 안되었다 - 선택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흔들리는 자는 선택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믿고 있는 자들은 사실을 깨달은 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들의 믿음을 신 앞에서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불행히도, 깨달은 자들의 진실보다는 믿고있는 자들의 믿음이 아직 어느것이 진실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부류의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더 믿을 만해 보였다. 그들로써는 아무래도 그들의 창조주가 그들을 내어쳐려 한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어쩌면 이렇듯 '명백해 보이는' '시험'을 통과해 선택받아서 성도-신의 선택을 받은 새로운 백성들, 영원한 천상의 백성들이 되기를 원했을런지도 모른다. 창조주는 그가 빚은 피조물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뜻에 따라, 인간들은 점차 이 환난을 신의 시험으로 믿게 되었다.

결국 전쟁은 인간들 사이에서 먼저 벌어졌다. 진실을 전하려던 수많은 깨달은 자들은 그들의 깨달음의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곳곳에서 이 목숨을 건 전도와 박해가 벌어졌다... 깨달은 자들은 믿고 있는 자들이 던진 돌무더기에 깔려 - 혹은 군중틈에서 튀어나와 느닷없이 찌르는 단검에 의해서 죽어갔다. 누가 범인인지 묘연한 방화가 일어나 대학들이 불탔다. 으슥한 곳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시신들이 수도없이 발견되었다.

지혜있는 자들도 이러한 광신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껏 인간들이 쌓아올린 유수한 문명과 기술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 무너졌다. 믿고 있는 자들은 오직 성경과 검에만 의지했다 - 과거의 십자군 시대처럼, 새로이 결성된 십자군들이 '이단자'들을 학살했다. 흰 두건을 뒤집어 쓴 자들이 깨달은 자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불태웠다. 지식은 닥치는대로 파괴되었다. 그들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인간의 문물들을 모조리 파괴해야 하며, 인간이 신이 만든 세상을 탐구하는 행위 자체가 이단이며 신에게 반역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일어났으며, 그들의 온갖 가르침과 계시에 따라 폭도나 다름없이 된 군중들이 야만적인 파괴를 자행했다. 이 집단적인 광기는 아직 영원왕국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을 무렵, 군주들이 벌이던 전쟁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었다. 적어도 그 때는 국가의 백성들은 그러한 광기에 물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깨달은 자들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미쳐 날뛰며 이 신의 '말씀'에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신에게 맞설 만한 인간의 연약한 발톱과 이빨은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같은 인간들에 의해서 뽑히고 부러진 셈이 되었다. 이제 신에게 대항할 인간들의 지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살아남은 깨달은 자들은 이러한 박해를 이겨내고 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뭉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많은 깨달은 자들이 비밀히 밤에 도망쳤다. 감시자들의 눈길을 피해서, 으슥한 밤길을 따라 깨달은 자들이 달렸다. 그들은 새로이 마을을 이루고, 또 그 마을이 옮겨서 성을 이루고, 또 그 성이 옮겨서 국가를 이루었다. 깨달은 자들은 그들이 도망친 곳에서 기치를 높히 들어올렸다. 수많은 깨달은 자들이 진실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겨우 파괴되지 않고 남은 학문과 지식들이 손을 잡았다. 신이 만든 세상에 대해서 미약하나마나 가장 많은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 힘을 모은 것이다. 오직 검과 성경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이 뜻밖의 동맹 앞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딫혔다. 연금술과 기계학들은 믿고 있는 자 들로써는 상상도 못할 위력을 내었다. 화약 앞에서는 아무리 많은 수의 군대도 소용이 없었다. 노련한 총포수들이 쏟아붓는 총탄 앞에서는 제 아무리 뛰어난 십자군의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렇게 되어 얼마간 세력의 균형이 이루어져 전쟁이 답보 상태에 빠졌을 때, 비로소 신이 전쟁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피조물들이며 천상의 군대, 천사들이 신의 뜻을 받들어 강림했다. 천사들의 압도적인 힘은 개개인의 무력이 일천기의 기병보다 더 강력한 힘을 보였다. 그들의 공격은 점차 확장해 나가고 있던 깨달은 자들의 보루를 파괴하고 깨달은 자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날로 세력을 잃고 후퇴했다. 반면 믿고 있는 자들은 천상의 존재들이 그들의 곁에 선 것을 보고 그들이 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더욱 확신했으며, 더더욱 선택받기 위해서 정진하고 가다듬어 거리낌없이 목숨을 버리게 되었다.

깨달은 자들은 자신들이 이제 곧 남김없이 살육당할 것임을 알았다. 그들에게 남겨진 길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 신을 직접 공격하는것. 무모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계획이지만 애초부터 신에 대항해 전쟁을 벌인다는 것도 무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사들은 얼마동안 뜻밖에 강력해진 공세를 받았다. 다시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가 천사들의 진군속도가 느려지며 균형이 생기는 듯 싶었으나, 곧 천사들은 깨달은 자들의 최후의 공격을 박살내고 남김없이 그들을 섬멸했다. 천상의 군대가 깨달은 자들의 땅에 있던 모든 숨쉬는 것들을 쳐 죽이고 깨달은 자들의 본거지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깨달은 자들은, 그들의 미약한 지식으로 창공에 발을 내딫고 천궁을 향해- 신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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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십자가'와 비슷하게 썼던, 약간 느낌도 비스무리...한 단편입니다. -_-
고3 떄 기숙사 입소하기 전에 고3되면 이런 것도 못쓸 꺼야 으다다다 써내려 간 건데, 써 놓고 나서는 전산화 할 틈이 없더군요...-_-
농활 끝나고 간만에 집에 돌아와 옛날에 쓴 것들 들춰본 기념으로 올려 봅니다.
티끌 같은 세상속에 작은 모래알 하나, 한바탕 미친 바람 불고 나면 그 간 곳을 모르온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