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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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일행은 이미 푸른구릉 요새를 한참 지나 한적한 소롯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주영과 민이는 이상한 경외감과 놀라움을 느끼면서 프렉체이스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까의 권위와 힘을 모두 써버렸든지 아니면 내면 깊숙히 감추고 있든지 이미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영이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사람들은 왜 우리를 가로막은 거죠?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는 거에요?"
프렉체이스가 어깨 너머로 소롯길 너머의 들판을 예의주시하며 대답했다.
"푸른구릉에서 갈리스테스이 발견 된 이후로 단 한번도 저런 적은 없었다네. 케오릭 왕은 젊고 친절한 사람이지. 절대로 나를 가로막을 사람은 아닌데. 카타카이론과 나에게 언제나 협조적으로 따라주었고 말이야. 혹여나 클레노스에 무슨 큰 일이 생기지는 않았나 걱정일세. 그리고, 일단 우리는 이 곳의 수도인 클레노스를 거쳐서 몇 군데의 도시를 더 지나야 할 걸세. 중앙대로의 잘 포장된 도로를 타고 말을 달리든가 마차를 타든가 하면 그리 오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이미 태양은 구름 한 점 없는 창백한 하늘의 중앙에 높이 떠올라 일행의 바로 머리 위에서 뜨거운 열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민이와 주영이 약간 지친 것 같자 프렉체이스는 한 편의 커다란 나무 그늘 밑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주영과 민이가 나무 근처 풀밭에 주저 앉듯 앉자 프렉체이스가 배낭을 뒤졌다. 곧 그는 자그마하지만 길고 가는 대롱처럼 생긴, 나무로 잘 짜여진 물병 하나와 역시 나무로 만든 컵들을 여러 개 끄집어냈고, 새하얗고 깨끗한 천을 꺼내 풀어 놓고는 얇고 노릇노릇한 과자들을 펼쳐놓았다.
주영과 민이는 지난밤 기내식을 먹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지라 허기를 느끼면서 다가들었다. 주영은 노르스름한 빛을 띄는 과자를 하나 들고 살펴 보았다. 그것은 아주 얇고 둥근 타원형의 두 개의 과자 사이에 엷은 갈색 빛이 도는 두툼한 과자 하나가 끼워져 있었고, 빛을 받을 때마다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는 그것을 한 입 베어물었다. 그것은 그에게 오랜시간 갈증에 시달린 후에 마시는 냉수 한 컵과도 같았다. 생각과 다르게 단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잠시 동안이지만 즐겁게 식사를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거대한 문을 통과한 이래로 처음으로 마음을 놓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물을 한잔 들이켜면서 민이가 물었다.
"이게 뭐죠? 무슨 과자에요?"
프렉체이스는 다구를 주섬주섬 챙기면서 대꾸했다.
"그건 과자가 아니야. 이 지방에서 나는 '루' 라는 곡식의 낱알을 발효시켜 구워낸 것이니까. 여기 말로는 칸푸스라고 한다네. 칸푸스 몇 개면 적은 양으로도 얼마든지 필요한 열량은 얻을 수 있을 걸세. 여기 사람들은 가벼운 빵이나 과자들이 중요한 식사에 충분히 상응할 수 있다고 보았고, 또 어느 정도는 그 생각이 맞다네. 그들은 이런 음식들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을 훌륭하게 이뤄낸거야. 물론 약간의 공복감만 빼면 말이지."
말을 마친 프렉체이스는 중간에 떠 있는 태양을 한 번 응시하고는 태양이 약간 기울 때까지 거기서의 휴식을 허락했다.
일행은 벌써 3시간째 쉬다 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주변의 번화가와 클레노스에 가까이 이르면 곧 세 사람이 너끈히 몸을 실을 수 있는 마차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프렉체이스와 말과는 달리 이미 꽤 넓은 길에 접어들었는데도 마차는 커녕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주영이 프렉체이스에게 물었다.
" 마차는 아직 멀었나요? 제 생각에는 지금도 꽤 넓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프렉체이스가 대답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벌써 자네 말대로 마차를 구했어야 정상이지. 정말 이상하군. 칼릭낙솟스 도성에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인적이 이렇게 드물다니......"
바로 그 때였다. 주영이 프렉체이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프렉체이스? 저기 좀 보세요!"
일행이 모두 주영이 가르킨 방향을 쳐다 보았다. 그것은 일행이 걷고 있는 길에서 약 50여 미터 앞에 불쑥 솟아 있는 언덕 너머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찌보면 상당히 멀어 보이는 그 곳은 사실 일행이 서 있는 곳에서 몇 마장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 곳, 그 곳의 한 줄기 연기. 짙은 회색 빛으로, 서서히 서쪽 평원으로 붉게 저물어 가는 저 선홍빛 하늘에 녹아들고 있는 것은 분명 한 줄기 연기였다. 프렉체이스는 눈을 크게 떳다. 지팡이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성, 도성일세! 칼리낙솟스에 무슨 일이 생긴게 틀림없네. 힘들겠지만 좀 서둘러야겠네. 어서 가 봐야겠어!"
프렉체이스는 주영과 민이가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을만큼 걷는 속도를 높였다.
마침내 그들은 투루하크의 기나긴 길을 지나 투루뮬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지키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프렉체이스는 다시 황황히 주변을 살펴더니, 일행과 함께 투루뮬린 정면의 둥근 모퉁이 돌을 하나 지나 여염집 민가들에 이르는 골목을 지났다. 그들이 막 골목을 벗어나 민가들이 둘러서 있는 탁 트인 광장에 이르렀을 때, 아, 그들을 맞이한 것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주영은 나지막하게 신음소리를 냈고 민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내팽쳐져있는 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보도 블럭들을 모두 적시고도 남을 흥건한 혈흔들. 쓰러진 사람들의 몸에는 어김없이 수십개의 화살들이 박혀 있었고, 개중에는 주인 잃은 팔이나 다리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몇 백은 될 듯한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그곳에서 짙은 죽음과 절망의 한숨이 느껴졌다. 아직은 살아있는, 그러나 곧이어 죽음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몇몇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보도 위로 흥건하게 흘러넘친 검붉고 끈끈한 핏물에 엉켜들고 있었다. 바로 옆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민가 하나에는 화염이 붉은 혀를 넘실거리며 자욱한 연기를 피워냈고, 그 앞에서는 두 구의 시체 앞에서 어린 아이들이 처절하게 목놓아 울고 있었다. 핏물,핏물.시체,또 시체. 그리고 그 틈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깃발들. 대개는 찢어지고, 어떤 것은 핏물이 묻어 이미 흰 깃발이 붉게 물들고 있었으며 내용은 깃발마다 달랐으나 대개 그 글귀들은 명료하고 쉬워서 그 중 하나는 주영의 눈에도 확연하게 들어왔다.
'왕은 선정을 배푸셨다'
프렉체이스는 일행을 멈춰서게 한 뒤 혼자서 담담하게 걸어나갔다. 그는 투루뮬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깃발을 두 손으로 그러쥐고 눈을 부릅뜨고 죽은 한 노인의 시체 앞에서 멈춰섰다. 프렉체이스는 몸을 굽혀서 노인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는 노인의 등에 박혀있는 화살 대를 살폈다. 그 노인의 등에는 무려 7개나 되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화살대는 검은 광택이 돌았고, 깃은 푸르스름한 색깔이었다. 프렉체이스가 돌아서서 일행에게 돌아왔다. 그 사이 주영은 놀란 민이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주영이 고개를 들고 프렉체이스에게 물었다.
"도대체......누구의 짓이죠? 이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없었나요?"
프렉체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군대는 있었지. 바로 라오디폴리스의 군대가. 이 사람들을 학살한 건 바로 그 중앙군들이거든."
주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럴리가요! 자기 나라 백성들을 그 나라의 군인들이 죽였다구요? 이건......"
프렉체이스는 주영에게 언제 주워들었는지 거리에 놓여져 있던 화살 하나를 보여주었다.
"나도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일세. 이 화살대를 살펴 보게나."
주영이 머뭇거리면서 화살대를 받아들자 프렉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그 화살대는 분명히 라오디폴리스의 중앙군의 궁수들이 사용하는 것일세. 깃의 색을 보게. 아까 우리가 푸른구릉 요새를 거쳐올 때 무장하고 있었던 병사들의 차림새가 기억나나?"
주영이 막 뭐라고 대답하려는데, 일행이 서 있는 광장에서 몇 십미터 남짓 떨어진 반대편 모퉁이에서 소란스러운 함성이 들려왔다. 일행이 놀라서 몸을 돌리는데 골목 사이에서 화살 하나가 윙 하고 날아서 그들이 서 있는 바닥에 떨어졌다. 주영과 민이가 질겁을 하는데 갑자기 바로 그 골목에서 기사 하나가 비틀거리며 뛰쳐나왔다. 그는 골목을 달려 나오자마자 발이 엉키면서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필사적으로 찌그러진 투구와 갑옷, 화살이 여기저기 박히고 가운데가 깊이 갈라져버린 방패를 추스르던 그는 안간힘을 다해 일어서더니 들고 있던 부러진 창을 던져버리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 와아 하는 함성이 들리면서 날카로운 투구와 푸르스름한 갑옷을 걸친 10여명의 병사들이 멀찍이서 그 기사를 에워쌌다. 개 중에는 궁수들도 있는듯, 활을 든 자도 간간히 보였지만 이미 손에 잡히는 대로 화살을 거의 다 쏘아 버린듯, 활시위를 당기는 자는 매우 드물었다. 중앙에 둘러싸인 기사는 두 손으로 검을 받쳐 쥐고 힘겹게 어깨를 바로폈다. 그 둘레에 병사들은 창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둘러 싸고 있는 포위망을 좁혀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도성과 두터운 성벽 전체에 산 속과 골짜기에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거대한 메아리와 같은 울림이 저르릉 하고 울려퍼졌다. 기사를 에워싸고 있던 병사들이 당황하면서 잠시 주의가 흐트러졌다. 중앙의 기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뒤 쪽에서 창을 겨누던 병사 하나가 창을 앞으로 내밀면서 기사를 압박하려 했지만 기사의 검은 벌써 그 병사의 창대를 위로 쳐 올리고 있었다. 정확하게 휘둘러진 다음의 공격은 마치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는 거센 한 줄기 급류와도 같았다. 순간적으로 빈틈을 보인 병사는 털썩하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기사의 검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와중에도 창대를 들어 기사를 내리쳤다. 그리고 이미 지쳐 보이던 기사는 미처 그 창대를 피하지 못하고 뒤로 넘어져버렸다.
다른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그 기사를 향해 달려나가려는데, 갑자기 그 사이로 빛살과도 같은 형체가 섬광처럼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것은 쓰러져 버린 병사 하나를 타 넘어 중앙으로 쇄도했다. 어찌나 빠른 속도였던지 주위에 둘러 선 병사들은 그 형체가 지나간 다음에도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새로이 등장한 기사가 손을 번쩍 쳐들자 그의 손에 잡힌 흰 지팡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빛을 내뿜었다. 지팡이는 시퍼런 불꽃으로 빚어낸 칼날과도 같이 빛을 뿜으면서 둘러선 병사들의 창 과 무구 위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안 쪽으로 둘러선 병사들은 당황하면서 창을 고쳐 쥐고 태세를 갖추려고 했지만 삽시간에 그들의 창과 무구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맥없이 파편 조각으로 변해갔다. 궁수 하나가 물러서면서 얼마남지 않은 활을 재어 활시위를 당겼지만 지팡이를 쥔 손이 그를 가리키자 그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져 나가고 그 또한 땅에 볼품없이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남은 병사들은 지팡이를 쥔 강건한 손 앞에서 무구를 내던지고 황망히 달아나 버렸다.
쓰러져 있던 기사는 그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프렉체이스는 몸을 굽혀 그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어느정도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프렉체이스의 말대로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일행이 달려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기사는 검을 소중히 들어 검집에 넣고는 찌그러진 투구를 벗고 미처 내려 놓지 못했던 방패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기사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으나 금발과 잿빛 눈동자의 호남형의 얼굴은 전투의 피로로 많이 초췌해보였다.
그의 말은 아포스톨로스어였고, 프렉체이스가 말하던 것과는 달리 약간의 억양이 있었지만 지친 그가 약간은 천천히 말을 해서 마침 그들 가까이 온 주영과 민이도 그 말을 대강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기사가 프렉체이스에게 말했다.
"모든 희망이 꺼지고, 완전히 구석으로 몰렸다고 생각했을 때에 당신은 때 맞춰 돌아오셨군요. 감사합니다, 프렉체이스."
그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프렉체이스가 대답했다.
"자네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아직까지 희망은 남아 있는 걸세, 유닐."
말을 마친 그는 앞에 선 기사의 부상을 눈치챘고, 그가 지쳐 있으며 부상당한 자에게는 무거운 갑옷을 여전히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거기 선 모두를 이끌고 가까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식당 안에서 프렉체이스에게 유닐이라 불린 그 기사는 이제는 못 쓰게 되어 버린 갑옷을 벗어버렸다.그가 여기저기가 붉게 물들고 찢겨져 나간 얇은 천으로 된 옷 하나만을 위에 걸치게 되자, 그의 부상이 모두의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그의 옷은 갑옷의 연결 부에 해당하는 부분마다 죽죽 찢겨져 있었고, 그 부분은 어김없이 붉은 선혈로 적셔져 있었다. 그리고 팔과 어깨의 중간 부분에 날아와 박힌 후에 그가 꺾어 버렸는지 화살대가 부러져 버린 화살이 하나 깊숙히 박혀 있었다. 선혈은 이미 상처를 타고 내려와 유닐의 어깨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주영은 눈살을 찌푸렸고, 민이는 아예 돌아서 버렸다. 프렉체이스는 화살의 남은 부분을 단단히 틀어쥐고 화살을 뽑아냈다. 고통이 심할텐데도 기사는 몸을 약간 움찔할 뿐이었다. 뽑아낸 화살을 살펴보니, 화살촉에 작지만 뾰족하고 날카로운 못이 하나 달려 있었고 양 옆으로는 안쪽으로 휘어진, 날카로운 미늘이 달려 있었다. 지독하게 잔인한 화살에 주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프렉체이스는 주영이 떠온 물로 상처를 씻어내고, 배낭에서 주영과 민이로서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들어 상처에 고루 펴 발랐다. 곧 프렉체이스는 예전에 주영의 벗겨진 손바닥을 싸 맸던 붕대로 그의 몸을 감싸면서 치료를 끝냈다. 몸을 일으키면서 프렉체이스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가? 수도의 중앙군들이 왜 자네를 공격했지? 내가 도성에서 떠나고 나서 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나?"
유닐이 대답했다.
"당신이 푸른구릉 요새의 통로를 통해 떠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앙군부의 네튠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프렉체이스는 놓여져 있던 큼지막한 나무 의자에 걸터 앉아 팔걸이를 움켜쥐면서 계속 해 보라는 몸짓을 했다. 그의 눈은 염려로 더욱 무거워지고 깊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 휘하의 부대와 평소 친분이 있었던 다른 장군들과 연합해서 바로 클레노스로 진격 해 들어갔습니다. 아무런 대비가 안 되어 있던 수도는 그가 공격을 시도한지 채 3일이 못 되어 함락되었습니다."
프렉체이스가 다그치듯 되물었다.
"어서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사실대로 처음부터 말씀드리자면, 제가 켄트로고스로 가보라는 왕명을 받들기 한 달전에 클레노스의 카라스 왕궁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네튠과, 그와 가까운 장군들은 수도인 클레노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카를론드에 서역의 검은 군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면서, 수도 클레노스 근처에 중앙군부의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를 신임하시던 왕께서는 그를 허락하셨고 게다가 네튠이 필요한 시기에 카를론드에 수도의 병력을 차출해주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만, 저와 피어스, 드레드 두 장군은 반대하셨습니다.
특히 저는 불과 몇 달전에 그 곳에 감시탑에 주둔한 적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원정기사단을 이끌던 때에는 적의 군대는 고사하고 우리 기사단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들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네튠 장군이 도중에 무슨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나 생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그 일이 매듭지어진 이후에 저는 예정대로 제 휘하에 원정기사단을 이끌고 켄트로고스에 주둔해 있었는데, 얼마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수도와 모든 연결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제가 수도로 전령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한 명도 되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몇 주일 전 네튠이 보낸 전령으로부터 수도와 칼리낙솟스에서 서역이 개입된 큰 전쟁이 일어났다면서, 라오디폴리스 전역에 비상 계엄령이 공포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칼리낙솟스에 가서 그 곳의 부상당한 지휘관으로부터 통수권을 인계 받아 그곳의 비상 계엄군을 이끌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덧붙여서 시국이 한시가 급하니 기사단의 모든 병력은 일단 켄트로고스에 놓아두고 빨리 떠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가장 신임하는 기사 두 명만을 수행원으로 이끌고 칼리낙솟스로 급히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출발하기에 앞서 피어스,드레드 이 두 장군이 전사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식을 전한 전령은 수도를 떠난지 2일이 지나가고 있다는, 왕실휘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지만 네튠은 라오디폴리스에서 가장 유능하며, 주군의 신임을 얻는 장군이고, 또한 그의 명령은 추상같았기에 저는 일단 칼리낙솟스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출발한지 4일이 지나 칼리낙솟스에 가까워지면서 저는 한 가지 놀라운, 믿기 힘든 소문을 들었습니다. 바로 '수 만의 병력이 네튠의 지휘 하에 카타하크를 지나 카들노르 요새앞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곧 3일도 채 안 되어 카들노르를 함락시키고 클레노스로 진격해 들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치명적인 실수였지만, 당시에 저는 그 소문 자체가 너무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에 단호하게 헛소문이거나 서역에서 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칼리낙솟스 지척에 당도하고 3일이 지난 후에 저는 또 다시 왕의 전령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더군요. 그는 자신이 간신히 클레노스를 둘러 싸고 있는 감시망을 벗어났다고 말하면서, 저를 만나기 위해 밤낮없이 길을 달렸다고 하면서, 네튠이 반란을 획책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울러, '그가 성공했으며 왕께서는 휘하의 얼마 안 되는 친위대만을 이끌고 로가디아의 미슬라드 요새로 피신하셨다'고 전했습니다.
그가 돌아간 후에 저는 아무래도 미심쩍고, 사실이 믿어지기 보다는 전령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 진위를 확인하고 통수권을 인계 받기 위해 계엄 지휘관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리로 가는 도중에 투루뮬린 앞 광장에서 백성들이 계엄군들과 대치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적어도 몇 백은 될 듯한 그들은 하나같이 네튠의 퇴진과 케오릭 왕의 복귀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선두에 선 계엄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계엄군들은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믿기힘든, 아니 당시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소문을 기억해냈고, 저와 제 휘하의 두 기사는 지휘관에게 달려가 그 모든 상황을 중지시키라고 종용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공격당했던 것입니다. 계엄 지휘관의 부대가 철수하면서 뒤에 남겨둔 적지않은 병사들과 저는 격렬한 공방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저는 그 와중에 제 수행 기사 둘을 잃었고, 단신으로 남은 병사들과 절망적인 힘겨루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당신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참을성 있게 듣고 있던 프렉체이스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랬군. 서역의 어둠, 적들이 알면 상당히 기뻐할 소식이로군. 사실 젊은 케오릭은 결단력있고 소신있는 왕이지만 한편으로는 인정많고 남을 쉽사리 저버리지 않을 사람이지. 이번엔 후자의 성격이 문제를 일으킨 것 같네. 그는 항상 올바른 길에 서 있었고 빛을 추구했지만 그랬기에 어두운 면은 더더욱 쉽게 간파하지 못했을거야.
그래, 그는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이 베푼 신의를 그처럼 쉽게 꺾고 그를 위협하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일세. 중앙군부 장군 네튠은 실로 주도면밀하면서도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아닌가. 그는 왕의 신임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핑계를 삼아 '공식적'으로 클레노스에 수많은 병력을 집중시키고, 왕이 약속대로 왕실 휘하의 군대를 카를론드에 내보낼 것과, 자네가 먼 곳으로 주둔할 시기를 기다려 자기에게 걸림돌이 될 것 같은 온건한 두 장군을 숙청하고, 이어 자네를 속여서 켄트로고스에서 칼리낙솟스로 보내 자네가 수도에서 먼 길로 돌아가는 동안, 수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앞세워 수비 병력이 거의 없는 카들노르를 함락시키고, 바로 클레노스로 들어갔겠지.
자네가 여기에 도착하면 자네도 죽일 심산이었을거야. 게다가 그는 많은 백성들을 학살했고."
그는 잠깐이지만 순식간에 상황을 간파해내는 듯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프렉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군. 자네가 내려오기 전에 들었다던, 소문말일세. 보통 이런 일은 수도와 그 주변 지역에 국한되고, 그것도 비밀리에 진행되기 마련이지. 전해진다 해도 사실에 가까운 경우는 별로 없어. 일반 백성들이 그렇게 빨리 소식을 접한 것이 석연치가 않아. 그렇다면 중앙군부 내에서 누군가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노출시켰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네."
유닐이 물었다.
"왕의 전령이 전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프렉체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자네가 처음으로 자네에게 두 장군의 피살 소식(그 자는 '전사'라고 전했지만, 타살이 확실한 것 같네.)을 전한 전령은 자네 말에 따르면 도성을 떠난지 이틀이 지나가고 있는 상태였어. 그가 도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이 벌어졌을 것일세. 두번째로 자네가 칼리낙솟스 부근에서 만났다는 전령은 백성들에게 말을 전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을 걸야. 수도에서 칼리낙솟스까지는 상당한 거리지.바로 포위망을 뚫고 자네를 따라잡았다면, 도중에 쉴 틈도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시기상으로 보아도 그 친구가 여기 도착하기 이전부터 민중들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유닐이 다시 말했다.
"왕실휘하에 다른 사람들도 여기 올 여력은 없었겠군요. 수도가 함락되기 하루 전에 왕께서는 '급히', 그것도 상당히 먼 거리인 로가디아로 가셨으니까요. 하긴 수도 주변 도시 중에서 가장 강한 산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 그 곳뿐이기도 합니다만."
그들의 말을 나름대로 열심히 경청하던 주영이 프렉체이스에게 물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죠?"
프렉체이스가 대답했다.
"이 나라의 장군 하나가 반란을 일으켰어. 수도를 그가 장악하고 있네."
그러자 민이가 말했다.
"말하자면, 쿠데타네요. 그렇죠?"
프렉체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자네들 말을 빌리자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
프렉체이스가 잠시 말이 없자 유닐이 프렉체이스에게 물었다.
"저 뒤에 저 친구들은 누굽니까? 차림새로 보아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들인 것 같은데요."
그 말에 프렉체이스가 대답했다.
"아, 이런, 워낙에 중대한 일들이 앞에 놓여져 있으니 다른 일들의 순서를 잊고 있었네."
그는 몸을 일으켜 유닐을 가리키며 주영과 민이에게 말했다.
"여기, 이 기사는 유닐이라고 하네. 유닐은 저 유명한 원정기사단을 이끄는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도 무용이 뛰어나 기사단장이 되었지."
그는 다시 주영과 민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두 사람은 내가 라테의 명령으로 카타카이론으로 데려가고 있는 사람들일세. 물론, 자네가 생각한대로 아주 멀리서 왔지. 이 쪽은 서주영, 이 쪽은 최민."
주영과 민이는 차례로 유닐과 악수를 했다. 주영은 강하고 명민 해 보이는 이 기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프렉체이스."
유닐은 나직하게 사도를 불렀다. 그가 다시 말했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요. 저는 민병대를 이끌 생각입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켄트로고스의 제 부관에게도 말을 전해 백성들의 뜻을 따라 케오릭 전하를 복위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프렉체이스는 대답하지 않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식당의 창가로 걸어갔다. 저물어가는 노을 빛이 식당 한 켠의 창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일단, 저기 두 친구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생각하세나."
주영이 대꾸했다.
"벌써 돌아간다구요? 하지만......"
프렉체이스가 몸을 돌리며 주영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제 이 곳은 곧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질 거야. 자네와 저 아가씨가 여기 있기엔 너무 위험하단 말일세. 냉정하게 말해서 자네와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계의 사람들의 싸움에 휘말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돌아가서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이 일이 마무리지어진 연후에 내가 다시 자네를 찾아가겠네."
다음에 계속...
일행은 이미 푸른구릉 요새를 한참 지나 한적한 소롯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주영과 민이는 이상한 경외감과 놀라움을 느끼면서 프렉체이스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까의 권위와 힘을 모두 써버렸든지 아니면 내면 깊숙히 감추고 있든지 이미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영이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사람들은 왜 우리를 가로막은 거죠?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는 거에요?"
프렉체이스가 어깨 너머로 소롯길 너머의 들판을 예의주시하며 대답했다.
"푸른구릉에서 갈리스테스이 발견 된 이후로 단 한번도 저런 적은 없었다네. 케오릭 왕은 젊고 친절한 사람이지. 절대로 나를 가로막을 사람은 아닌데. 카타카이론과 나에게 언제나 협조적으로 따라주었고 말이야. 혹여나 클레노스에 무슨 큰 일이 생기지는 않았나 걱정일세. 그리고, 일단 우리는 이 곳의 수도인 클레노스를 거쳐서 몇 군데의 도시를 더 지나야 할 걸세. 중앙대로의 잘 포장된 도로를 타고 말을 달리든가 마차를 타든가 하면 그리 오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이미 태양은 구름 한 점 없는 창백한 하늘의 중앙에 높이 떠올라 일행의 바로 머리 위에서 뜨거운 열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민이와 주영이 약간 지친 것 같자 프렉체이스는 한 편의 커다란 나무 그늘 밑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주영과 민이가 나무 근처 풀밭에 주저 앉듯 앉자 프렉체이스가 배낭을 뒤졌다. 곧 그는 자그마하지만 길고 가는 대롱처럼 생긴, 나무로 잘 짜여진 물병 하나와 역시 나무로 만든 컵들을 여러 개 끄집어냈고, 새하얗고 깨끗한 천을 꺼내 풀어 놓고는 얇고 노릇노릇한 과자들을 펼쳐놓았다.
주영과 민이는 지난밤 기내식을 먹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지라 허기를 느끼면서 다가들었다. 주영은 노르스름한 빛을 띄는 과자를 하나 들고 살펴 보았다. 그것은 아주 얇고 둥근 타원형의 두 개의 과자 사이에 엷은 갈색 빛이 도는 두툼한 과자 하나가 끼워져 있었고, 빛을 받을 때마다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는 그것을 한 입 베어물었다. 그것은 그에게 오랜시간 갈증에 시달린 후에 마시는 냉수 한 컵과도 같았다. 생각과 다르게 단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잠시 동안이지만 즐겁게 식사를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거대한 문을 통과한 이래로 처음으로 마음을 놓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물을 한잔 들이켜면서 민이가 물었다.
"이게 뭐죠? 무슨 과자에요?"
프렉체이스는 다구를 주섬주섬 챙기면서 대꾸했다.
"그건 과자가 아니야. 이 지방에서 나는 '루' 라는 곡식의 낱알을 발효시켜 구워낸 것이니까. 여기 말로는 칸푸스라고 한다네. 칸푸스 몇 개면 적은 양으로도 얼마든지 필요한 열량은 얻을 수 있을 걸세. 여기 사람들은 가벼운 빵이나 과자들이 중요한 식사에 충분히 상응할 수 있다고 보았고, 또 어느 정도는 그 생각이 맞다네. 그들은 이런 음식들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을 훌륭하게 이뤄낸거야. 물론 약간의 공복감만 빼면 말이지."
말을 마친 프렉체이스는 중간에 떠 있는 태양을 한 번 응시하고는 태양이 약간 기울 때까지 거기서의 휴식을 허락했다.
일행은 벌써 3시간째 쉬다 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주변의 번화가와 클레노스에 가까이 이르면 곧 세 사람이 너끈히 몸을 실을 수 있는 마차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프렉체이스와 말과는 달리 이미 꽤 넓은 길에 접어들었는데도 마차는 커녕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주영이 프렉체이스에게 물었다.
" 마차는 아직 멀었나요? 제 생각에는 지금도 꽤 넓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프렉체이스가 대답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벌써 자네 말대로 마차를 구했어야 정상이지. 정말 이상하군. 칼릭낙솟스 도성에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인적이 이렇게 드물다니......"
바로 그 때였다. 주영이 프렉체이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프렉체이스? 저기 좀 보세요!"
일행이 모두 주영이 가르킨 방향을 쳐다 보았다. 그것은 일행이 걷고 있는 길에서 약 50여 미터 앞에 불쑥 솟아 있는 언덕 너머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찌보면 상당히 멀어 보이는 그 곳은 사실 일행이 서 있는 곳에서 몇 마장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 곳, 그 곳의 한 줄기 연기. 짙은 회색 빛으로, 서서히 서쪽 평원으로 붉게 저물어 가는 저 선홍빛 하늘에 녹아들고 있는 것은 분명 한 줄기 연기였다. 프렉체이스는 눈을 크게 떳다. 지팡이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성, 도성일세! 칼리낙솟스에 무슨 일이 생긴게 틀림없네. 힘들겠지만 좀 서둘러야겠네. 어서 가 봐야겠어!"
프렉체이스는 주영과 민이가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을만큼 걷는 속도를 높였다.
마침내 그들은 투루하크의 기나긴 길을 지나 투루뮬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지키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프렉체이스는 다시 황황히 주변을 살펴더니, 일행과 함께 투루뮬린 정면의 둥근 모퉁이 돌을 하나 지나 여염집 민가들에 이르는 골목을 지났다. 그들이 막 골목을 벗어나 민가들이 둘러서 있는 탁 트인 광장에 이르렀을 때, 아, 그들을 맞이한 것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주영은 나지막하게 신음소리를 냈고 민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내팽쳐져있는 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보도 블럭들을 모두 적시고도 남을 흥건한 혈흔들. 쓰러진 사람들의 몸에는 어김없이 수십개의 화살들이 박혀 있었고, 개중에는 주인 잃은 팔이나 다리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몇 백은 될 듯한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그곳에서 짙은 죽음과 절망의 한숨이 느껴졌다. 아직은 살아있는, 그러나 곧이어 죽음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몇몇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보도 위로 흥건하게 흘러넘친 검붉고 끈끈한 핏물에 엉켜들고 있었다. 바로 옆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민가 하나에는 화염이 붉은 혀를 넘실거리며 자욱한 연기를 피워냈고, 그 앞에서는 두 구의 시체 앞에서 어린 아이들이 처절하게 목놓아 울고 있었다. 핏물,핏물.시체,또 시체. 그리고 그 틈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깃발들. 대개는 찢어지고, 어떤 것은 핏물이 묻어 이미 흰 깃발이 붉게 물들고 있었으며 내용은 깃발마다 달랐으나 대개 그 글귀들은 명료하고 쉬워서 그 중 하나는 주영의 눈에도 확연하게 들어왔다.
'왕은 선정을 배푸셨다'
프렉체이스는 일행을 멈춰서게 한 뒤 혼자서 담담하게 걸어나갔다. 그는 투루뮬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깃발을 두 손으로 그러쥐고 눈을 부릅뜨고 죽은 한 노인의 시체 앞에서 멈춰섰다. 프렉체이스는 몸을 굽혀서 노인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는 노인의 등에 박혀있는 화살 대를 살폈다. 그 노인의 등에는 무려 7개나 되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화살대는 검은 광택이 돌았고, 깃은 푸르스름한 색깔이었다. 프렉체이스가 돌아서서 일행에게 돌아왔다. 그 사이 주영은 놀란 민이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주영이 고개를 들고 프렉체이스에게 물었다.
"도대체......누구의 짓이죠? 이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없었나요?"
프렉체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군대는 있었지. 바로 라오디폴리스의 군대가. 이 사람들을 학살한 건 바로 그 중앙군들이거든."
주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럴리가요! 자기 나라 백성들을 그 나라의 군인들이 죽였다구요? 이건......"
프렉체이스는 주영에게 언제 주워들었는지 거리에 놓여져 있던 화살 하나를 보여주었다.
"나도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일세. 이 화살대를 살펴 보게나."
주영이 머뭇거리면서 화살대를 받아들자 프렉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그 화살대는 분명히 라오디폴리스의 중앙군의 궁수들이 사용하는 것일세. 깃의 색을 보게. 아까 우리가 푸른구릉 요새를 거쳐올 때 무장하고 있었던 병사들의 차림새가 기억나나?"
주영이 막 뭐라고 대답하려는데, 일행이 서 있는 광장에서 몇 십미터 남짓 떨어진 반대편 모퉁이에서 소란스러운 함성이 들려왔다. 일행이 놀라서 몸을 돌리는데 골목 사이에서 화살 하나가 윙 하고 날아서 그들이 서 있는 바닥에 떨어졌다. 주영과 민이가 질겁을 하는데 갑자기 바로 그 골목에서 기사 하나가 비틀거리며 뛰쳐나왔다. 그는 골목을 달려 나오자마자 발이 엉키면서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필사적으로 찌그러진 투구와 갑옷, 화살이 여기저기 박히고 가운데가 깊이 갈라져버린 방패를 추스르던 그는 안간힘을 다해 일어서더니 들고 있던 부러진 창을 던져버리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 와아 하는 함성이 들리면서 날카로운 투구와 푸르스름한 갑옷을 걸친 10여명의 병사들이 멀찍이서 그 기사를 에워쌌다. 개 중에는 궁수들도 있는듯, 활을 든 자도 간간히 보였지만 이미 손에 잡히는 대로 화살을 거의 다 쏘아 버린듯, 활시위를 당기는 자는 매우 드물었다. 중앙에 둘러싸인 기사는 두 손으로 검을 받쳐 쥐고 힘겹게 어깨를 바로폈다. 그 둘레에 병사들은 창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둘러 싸고 있는 포위망을 좁혀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도성과 두터운 성벽 전체에 산 속과 골짜기에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거대한 메아리와 같은 울림이 저르릉 하고 울려퍼졌다. 기사를 에워싸고 있던 병사들이 당황하면서 잠시 주의가 흐트러졌다. 중앙의 기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뒤 쪽에서 창을 겨누던 병사 하나가 창을 앞으로 내밀면서 기사를 압박하려 했지만 기사의 검은 벌써 그 병사의 창대를 위로 쳐 올리고 있었다. 정확하게 휘둘러진 다음의 공격은 마치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는 거센 한 줄기 급류와도 같았다. 순간적으로 빈틈을 보인 병사는 털썩하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기사의 검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와중에도 창대를 들어 기사를 내리쳤다. 그리고 이미 지쳐 보이던 기사는 미처 그 창대를 피하지 못하고 뒤로 넘어져버렸다.
다른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그 기사를 향해 달려나가려는데, 갑자기 그 사이로 빛살과도 같은 형체가 섬광처럼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것은 쓰러져 버린 병사 하나를 타 넘어 중앙으로 쇄도했다. 어찌나 빠른 속도였던지 주위에 둘러 선 병사들은 그 형체가 지나간 다음에도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새로이 등장한 기사가 손을 번쩍 쳐들자 그의 손에 잡힌 흰 지팡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빛을 내뿜었다. 지팡이는 시퍼런 불꽃으로 빚어낸 칼날과도 같이 빛을 뿜으면서 둘러선 병사들의 창 과 무구 위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안 쪽으로 둘러선 병사들은 당황하면서 창을 고쳐 쥐고 태세를 갖추려고 했지만 삽시간에 그들의 창과 무구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맥없이 파편 조각으로 변해갔다. 궁수 하나가 물러서면서 얼마남지 않은 활을 재어 활시위를 당겼지만 지팡이를 쥔 손이 그를 가리키자 그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져 나가고 그 또한 땅에 볼품없이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남은 병사들은 지팡이를 쥔 강건한 손 앞에서 무구를 내던지고 황망히 달아나 버렸다.
쓰러져 있던 기사는 그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프렉체이스는 몸을 굽혀 그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어느정도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프렉체이스의 말대로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일행이 달려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기사는 검을 소중히 들어 검집에 넣고는 찌그러진 투구를 벗고 미처 내려 놓지 못했던 방패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기사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으나 금발과 잿빛 눈동자의 호남형의 얼굴은 전투의 피로로 많이 초췌해보였다.
그의 말은 아포스톨로스어였고, 프렉체이스가 말하던 것과는 달리 약간의 억양이 있었지만 지친 그가 약간은 천천히 말을 해서 마침 그들 가까이 온 주영과 민이도 그 말을 대강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기사가 프렉체이스에게 말했다.
"모든 희망이 꺼지고, 완전히 구석으로 몰렸다고 생각했을 때에 당신은 때 맞춰 돌아오셨군요. 감사합니다, 프렉체이스."
그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프렉체이스가 대답했다.
"자네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아직까지 희망은 남아 있는 걸세, 유닐."
말을 마친 그는 앞에 선 기사의 부상을 눈치챘고, 그가 지쳐 있으며 부상당한 자에게는 무거운 갑옷을 여전히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거기 선 모두를 이끌고 가까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식당 안에서 프렉체이스에게 유닐이라 불린 그 기사는 이제는 못 쓰게 되어 버린 갑옷을 벗어버렸다.그가 여기저기가 붉게 물들고 찢겨져 나간 얇은 천으로 된 옷 하나만을 위에 걸치게 되자, 그의 부상이 모두의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그의 옷은 갑옷의 연결 부에 해당하는 부분마다 죽죽 찢겨져 있었고, 그 부분은 어김없이 붉은 선혈로 적셔져 있었다. 그리고 팔과 어깨의 중간 부분에 날아와 박힌 후에 그가 꺾어 버렸는지 화살대가 부러져 버린 화살이 하나 깊숙히 박혀 있었다. 선혈은 이미 상처를 타고 내려와 유닐의 어깨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주영은 눈살을 찌푸렸고, 민이는 아예 돌아서 버렸다. 프렉체이스는 화살의 남은 부분을 단단히 틀어쥐고 화살을 뽑아냈다. 고통이 심할텐데도 기사는 몸을 약간 움찔할 뿐이었다. 뽑아낸 화살을 살펴보니, 화살촉에 작지만 뾰족하고 날카로운 못이 하나 달려 있었고 양 옆으로는 안쪽으로 휘어진, 날카로운 미늘이 달려 있었다. 지독하게 잔인한 화살에 주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프렉체이스는 주영이 떠온 물로 상처를 씻어내고, 배낭에서 주영과 민이로서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들어 상처에 고루 펴 발랐다. 곧 프렉체이스는 예전에 주영의 벗겨진 손바닥을 싸 맸던 붕대로 그의 몸을 감싸면서 치료를 끝냈다. 몸을 일으키면서 프렉체이스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가? 수도의 중앙군들이 왜 자네를 공격했지? 내가 도성에서 떠나고 나서 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나?"
유닐이 대답했다.
"당신이 푸른구릉 요새의 통로를 통해 떠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앙군부의 네튠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프렉체이스는 놓여져 있던 큼지막한 나무 의자에 걸터 앉아 팔걸이를 움켜쥐면서 계속 해 보라는 몸짓을 했다. 그의 눈은 염려로 더욱 무거워지고 깊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 휘하의 부대와 평소 친분이 있었던 다른 장군들과 연합해서 바로 클레노스로 진격 해 들어갔습니다. 아무런 대비가 안 되어 있던 수도는 그가 공격을 시도한지 채 3일이 못 되어 함락되었습니다."
프렉체이스가 다그치듯 되물었다.
"어서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사실대로 처음부터 말씀드리자면, 제가 켄트로고스로 가보라는 왕명을 받들기 한 달전에 클레노스의 카라스 왕궁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네튠과, 그와 가까운 장군들은 수도인 클레노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카를론드에 서역의 검은 군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면서, 수도 클레노스 근처에 중앙군부의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를 신임하시던 왕께서는 그를 허락하셨고 게다가 네튠이 필요한 시기에 카를론드에 수도의 병력을 차출해주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만, 저와 피어스, 드레드 두 장군은 반대하셨습니다.
특히 저는 불과 몇 달전에 그 곳에 감시탑에 주둔한 적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원정기사단을 이끌던 때에는 적의 군대는 고사하고 우리 기사단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들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네튠 장군이 도중에 무슨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나 생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그 일이 매듭지어진 이후에 저는 예정대로 제 휘하에 원정기사단을 이끌고 켄트로고스에 주둔해 있었는데, 얼마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수도와 모든 연결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제가 수도로 전령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한 명도 되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몇 주일 전 네튠이 보낸 전령으로부터 수도와 칼리낙솟스에서 서역이 개입된 큰 전쟁이 일어났다면서, 라오디폴리스 전역에 비상 계엄령이 공포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칼리낙솟스에 가서 그 곳의 부상당한 지휘관으로부터 통수권을 인계 받아 그곳의 비상 계엄군을 이끌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덧붙여서 시국이 한시가 급하니 기사단의 모든 병력은 일단 켄트로고스에 놓아두고 빨리 떠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가장 신임하는 기사 두 명만을 수행원으로 이끌고 칼리낙솟스로 급히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출발하기에 앞서 피어스,드레드 이 두 장군이 전사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식을 전한 전령은 수도를 떠난지 2일이 지나가고 있다는, 왕실휘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지만 네튠은 라오디폴리스에서 가장 유능하며, 주군의 신임을 얻는 장군이고, 또한 그의 명령은 추상같았기에 저는 일단 칼리낙솟스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출발한지 4일이 지나 칼리낙솟스에 가까워지면서 저는 한 가지 놀라운, 믿기 힘든 소문을 들었습니다. 바로 '수 만의 병력이 네튠의 지휘 하에 카타하크를 지나 카들노르 요새앞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곧 3일도 채 안 되어 카들노르를 함락시키고 클레노스로 진격해 들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치명적인 실수였지만, 당시에 저는 그 소문 자체가 너무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에 단호하게 헛소문이거나 서역에서 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칼리낙솟스 지척에 당도하고 3일이 지난 후에 저는 또 다시 왕의 전령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더군요. 그는 자신이 간신히 클레노스를 둘러 싸고 있는 감시망을 벗어났다고 말하면서, 저를 만나기 위해 밤낮없이 길을 달렸다고 하면서, 네튠이 반란을 획책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울러, '그가 성공했으며 왕께서는 휘하의 얼마 안 되는 친위대만을 이끌고 로가디아의 미슬라드 요새로 피신하셨다'고 전했습니다.
그가 돌아간 후에 저는 아무래도 미심쩍고, 사실이 믿어지기 보다는 전령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 진위를 확인하고 통수권을 인계 받기 위해 계엄 지휘관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리로 가는 도중에 투루뮬린 앞 광장에서 백성들이 계엄군들과 대치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적어도 몇 백은 될 듯한 그들은 하나같이 네튠의 퇴진과 케오릭 왕의 복귀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선두에 선 계엄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계엄군들은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믿기힘든, 아니 당시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소문을 기억해냈고, 저와 제 휘하의 두 기사는 지휘관에게 달려가 그 모든 상황을 중지시키라고 종용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공격당했던 것입니다. 계엄 지휘관의 부대가 철수하면서 뒤에 남겨둔 적지않은 병사들과 저는 격렬한 공방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저는 그 와중에 제 수행 기사 둘을 잃었고, 단신으로 남은 병사들과 절망적인 힘겨루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당신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참을성 있게 듣고 있던 프렉체이스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랬군. 서역의 어둠, 적들이 알면 상당히 기뻐할 소식이로군. 사실 젊은 케오릭은 결단력있고 소신있는 왕이지만 한편으로는 인정많고 남을 쉽사리 저버리지 않을 사람이지. 이번엔 후자의 성격이 문제를 일으킨 것 같네. 그는 항상 올바른 길에 서 있었고 빛을 추구했지만 그랬기에 어두운 면은 더더욱 쉽게 간파하지 못했을거야.
그래, 그는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이 베푼 신의를 그처럼 쉽게 꺾고 그를 위협하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일세. 중앙군부 장군 네튠은 실로 주도면밀하면서도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 아닌가. 그는 왕의 신임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핑계를 삼아 '공식적'으로 클레노스에 수많은 병력을 집중시키고, 왕이 약속대로 왕실 휘하의 군대를 카를론드에 내보낼 것과, 자네가 먼 곳으로 주둔할 시기를 기다려 자기에게 걸림돌이 될 것 같은 온건한 두 장군을 숙청하고, 이어 자네를 속여서 켄트로고스에서 칼리낙솟스로 보내 자네가 수도에서 먼 길로 돌아가는 동안, 수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앞세워 수비 병력이 거의 없는 카들노르를 함락시키고, 바로 클레노스로 들어갔겠지.
자네가 여기에 도착하면 자네도 죽일 심산이었을거야. 게다가 그는 많은 백성들을 학살했고."
그는 잠깐이지만 순식간에 상황을 간파해내는 듯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프렉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군. 자네가 내려오기 전에 들었다던, 소문말일세. 보통 이런 일은 수도와 그 주변 지역에 국한되고, 그것도 비밀리에 진행되기 마련이지. 전해진다 해도 사실에 가까운 경우는 별로 없어. 일반 백성들이 그렇게 빨리 소식을 접한 것이 석연치가 않아. 그렇다면 중앙군부 내에서 누군가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노출시켰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네."
유닐이 물었다.
"왕의 전령이 전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프렉체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자네가 처음으로 자네에게 두 장군의 피살 소식(그 자는 '전사'라고 전했지만, 타살이 확실한 것 같네.)을 전한 전령은 자네 말에 따르면 도성을 떠난지 이틀이 지나가고 있는 상태였어. 그가 도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이 벌어졌을 것일세. 두번째로 자네가 칼리낙솟스 부근에서 만났다는 전령은 백성들에게 말을 전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을 걸야. 수도에서 칼리낙솟스까지는 상당한 거리지.바로 포위망을 뚫고 자네를 따라잡았다면, 도중에 쉴 틈도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시기상으로 보아도 그 친구가 여기 도착하기 이전부터 민중들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유닐이 다시 말했다.
"왕실휘하에 다른 사람들도 여기 올 여력은 없었겠군요. 수도가 함락되기 하루 전에 왕께서는 '급히', 그것도 상당히 먼 거리인 로가디아로 가셨으니까요. 하긴 수도 주변 도시 중에서 가장 강한 산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 그 곳뿐이기도 합니다만."
그들의 말을 나름대로 열심히 경청하던 주영이 프렉체이스에게 물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죠?"
프렉체이스가 대답했다.
"이 나라의 장군 하나가 반란을 일으켰어. 수도를 그가 장악하고 있네."
그러자 민이가 말했다.
"말하자면, 쿠데타네요. 그렇죠?"
프렉체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자네들 말을 빌리자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
프렉체이스가 잠시 말이 없자 유닐이 프렉체이스에게 물었다.
"저 뒤에 저 친구들은 누굽니까? 차림새로 보아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들인 것 같은데요."
그 말에 프렉체이스가 대답했다.
"아, 이런, 워낙에 중대한 일들이 앞에 놓여져 있으니 다른 일들의 순서를 잊고 있었네."
그는 몸을 일으켜 유닐을 가리키며 주영과 민이에게 말했다.
"여기, 이 기사는 유닐이라고 하네. 유닐은 저 유명한 원정기사단을 이끄는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도 무용이 뛰어나 기사단장이 되었지."
그는 다시 주영과 민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두 사람은 내가 라테의 명령으로 카타카이론으로 데려가고 있는 사람들일세. 물론, 자네가 생각한대로 아주 멀리서 왔지. 이 쪽은 서주영, 이 쪽은 최민."
주영과 민이는 차례로 유닐과 악수를 했다. 주영은 강하고 명민 해 보이는 이 기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프렉체이스."
유닐은 나직하게 사도를 불렀다. 그가 다시 말했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요. 저는 민병대를 이끌 생각입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켄트로고스의 제 부관에게도 말을 전해 백성들의 뜻을 따라 케오릭 전하를 복위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프렉체이스는 대답하지 않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식당의 창가로 걸어갔다. 저물어가는 노을 빛이 식당 한 켠의 창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일단, 저기 두 친구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생각하세나."
주영이 대꾸했다.
"벌써 돌아간다구요? 하지만......"
프렉체이스가 몸을 돌리며 주영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제 이 곳은 곧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질 거야. 자네와 저 아가씨가 여기 있기엔 너무 위험하단 말일세. 냉정하게 말해서 자네와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계의 사람들의 싸움에 휘말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돌아가서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이 일이 마무리지어진 연후에 내가 다시 자네를 찾아가겠네."
다음에 계속...
안녕하세요~! olorin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