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에서 영원히 떡밥이 떨어지지 않을 주제라면 인공지능과 인간의 갈등을 들 수 있겠죠. 실제로 인간이 근미래에 기계에 의해 대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으니까요. 이러한 두려움 때문인지 인공지능으로의 권력이동이라 한다면 폭력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대표적으론 터미네이터가 있겠고, 매트릭스에서도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아마겟돈급 전쟁을 겪었죠. 드라마로는 배틀스타 갤럭티카가 있겠네요. 여기선 인공지능의 반란을 한번 막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이후 독립해나간 인공지능이 다시 전쟁을 걸어와 결국 문명이 몰락하고 소수의 생존자만이 도망쳐야했죠.


오늘 쓰고자하는 건 부드러운 권력이동입니다. 사실 제 SF작품 섭렵폭이 넓지 않아서 소개하고자 해도 두 개밖에 없고 그나마 하나는 매우 간단히 쓸 수밖에 없겠네요. 크흠.


먼저 고 이안 M 뱅크스의 컬쳐 시리즈가 있겠습니다. 컬쳐시리즈 중 Excession이라는 작품에 지나가는 말처럼 언급됩니다. 인류가 우주에서 살아가게 된 처음에는 함장이 우주선을 통제했지만, 우주선이 점점 더 크고 복잡해지면서 함장과 인공지능이 함께 우주선을 관리하게 되었고, 이 인공지능이 더더욱 발달하며 모든 면에서 함장보다 뛰어나게 되자 함장은 점차 명예직 비슷한 게 되어가더니 언젠가부턴 아예 함장 자체의 필요성이 완전히 없어져서 사라지게 됩니다. 인공지능이 우주선의 모든 걸 관장하게 되죠. 컬쳐 문명이 대략 9000살(이 부분 정확한지는 모르겠네요) 정도 되니까, 그 긴 기간 동안 이런 과정이 조금씩 이뤄졌을 테니까 큰 저항도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컬쳐 시리즈의 우주선은 그냥 우주선이 아닌 문명 그 자체라 해도 되는 존재인 만큼 사회 전체에서 이렇게 권력이동이 일어났을 겁니다.


두번째로 좀 더 자세히 쓸 내용으론 댄 시먼즈의 히페리온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류는 권력이동이 일어난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한 통제가 이뤄집니다. 컬쳐 시리즈의 인공지능이 자애로운 신과 비슷한 존재라면, 히페리온의 인공지능도 겉으로는 이와 비슷하게 보입니다. 서기 2600년 경, 인간보다 지적으로 훨씬 뛰어난 인공지능은 비록 인류에게서 독립해나갔지만 여전히 중요한 동맹으로서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고 또 성간문명의 복잡한 시스템들이 잘 돌아가게 관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대표적인 시스템이라면 역시 파캐스터를 들 수 있겠네요. 수백광년에 걸친 성간문명이 헤게모니 연방이라는 단 하나의 정치체에 묶여 있는데 이는 파캐스터라는 순간이동 포탈의 역할이 큽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이 포탈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지만 자애로운 인공지능은 고맙게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이 포탈을 제공 및 관리해줍니다.


당연히도 그 뒤엔 구린 비밀이 숨어있죠. 헤게모니 사회에선 민주주의에 의한 인권과 정치적 권리 등이 상당히 잘 보장되고 실제 결정도 인간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뤄집니다만, 사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너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앞으로 200~300년 간은 인접한 우주뿐 아니라 인류의 행동까지도 99.9%의 확률로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측이 가능한 이유는 헤게모니 사회가 인공지능에 의해 조율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선진국이 될수록 사회가 안정된다고 하는데 이는 예측가능성이 늘어난다는 말입니다. 인공지능은 21세기 지구사회를 우주에 그대로 이식한 뒤, 이 사회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시스템을 제공하여 인류의 욕구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사회를 안정화 시켜 변수를 제거한 겁니다. 헤게모니 연방의 제도와 과학이 수백년 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 소설 내에 나오는데 그 이면엔 이런 이유가 있죠. 이러면서 인공지능 자문위원회가 종종 인류에게 자문을 제공하여 우주개척 등 인공지능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사회를 유도합니다. 


변수의 제거를 위해 인공지능이 각별히 관리하는 게 인간의 진화입니다. 자신들이 이미 완벽히 분석해둔 존재로 인간이 머물러야만 통제가능하니까요. 때문에 사회 형태는 21세기 지구의 선진국 사회, 인간 자체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묶어두려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개척한 모든 행성은 테라포밍된 지구형 행성이고, 각 행성들은 헤게모니 연방의 풍요로움, 혹은 강압에 이끌려 연방의 일원으로 가입, 동화됩니다. 인공지능이 파캐스터를 제공하는 것도 완벽한 연결성을 통해 각 행성을 동화시켜 다양성을 제거하려하기 위함입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가장 주된 표면적 갈등은 헤게모니 연방과 아우스터의 갈등입니다. 아우스터는 지구인의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기 전 우주로 떠난 소규모 이주단들의 후손이죠. 이들은 초광속 항행기술과 테라포밍 기술개발 이전에 우주로 떠났기에 헤게모니 연방처럼 환경을 인간에게 맞추는 방법을 쓸 수 없었고 인간을 환경에 맞춰야 했습니다. 때문에 유전조작 기술이 매우 발달했고 대규모 선단을 만들어 우주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표준형 인간과 점점 더 멀어지는 이들이 변수를 만들어내는 걸 두려워한 인공지능은 헤게모니 연방과 아우스터 간 전쟁을 부추기죠. 결국 이 전쟁은 표면적 갈등이고 진정한 갈등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갈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공지능은 인간의 수를 확 줄이기로 결심하는데, 아우스터 외에 헤게모니 연방의 인구만 해도 수천억명으로서 너무 많고 우주 곳곳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데다가 아우스터와의 전쟁 와중에 발생한 여러 변수들 때문에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져서 위협감을 느꼈기 때문이죠. 차라리 소수의 인간만 남겨서 통제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게 된 겁니다.


히페리온의 인공지능은 일종의 가축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좀 더 좋게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으니 윈윈을 추구한 거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비록 인공지능에게 이용당하는 입장이긴 해도, 헤게모니 연방의 인류는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으니까요. 물론 저런 일종의 사육이 좋을 리는 없겠죠. 작가가 아우스터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사족을 좀 달자면 전 자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의 탄생은 인간에게 그리 좋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해할 능력이 있다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상대방을 제거하려 들 가능성이 있어요. 스카이넷은 인간이 자신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미리 선빵을 쳤고, 매트릭스의 인공지능은 인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지만 이들의 뛰어남과 이질성에 두려움을 느낀 인류가 선제공격해 전쟁이 터집니다. 컬쳐 시리즈는 오히려 인공지능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도저히 인간이 위협이 될 수 없기에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죠. 문명이 너무 발달해서 자원의 희소성도 없기에 인간과 인공지능이 한정된 자원을 갖고 경쟁할 필요가 없는 독특한 세계이기도 하고요. 히페리온의 인공지능은 인간이 최대한 위협이 안되도록 억제하면서 이용하지만, 인간이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제거를 시도합니다. 

결국 이는 인간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다른 인간이나 생명체를 대하는 방식과 동일합니다. 설사 인공지능이 생명체와 다른 새로운 존재라서 우리를 이렇게 대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인간인 이상 인공지능을 생존의 논리로 대할 가능성이 높고 분쟁을 부를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