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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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복원한 스피노사우루스는 지느러미 달린 평범한 수각류였습니다.]
사람들은 거대 포식자에 열광하곤 합니다. 그래서 공룡계의 인기 스타는 대형 육식 공룡들이죠. 이들의 흔한 이미지를 떠올려 봅시다.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는 숲 속, 그만큼 커다란 초식공룡들이 돌아다닙니다. 초식공룡들은 무리를 지어 평화롭게 풀을 뜯습니다. 가끔 작은 새끼들이 어른들 밑에서 장난 치고, 꽥꽥거리고, 소화도 못 시키는 억센 풀을 뜯으려고 애씁니다. 저 멀리서 한가로이 익룡 몇 마리가 줄을 긋고 날아갑니다. 평화로운 광경이지만, 얼마 가지 못합니다. 턱에서 군침을 뚝뚝 흘리며, 육식공룡이 다가오기 때문이죠. 육식공룡은 초식공룡을 앞에 두고 우렁차게 포효합니다. 혼란에 빠진 초식동물들은 우르르 도망갑니다. 육식공룡은 두 발로 쿵쿵거리며 쫓습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억센 턱으로 물어뜯고, 녹색 숲이 피바다가 됩니다. 장기자랑과 함께 고기 잔치가 열립니다.
대중이 매료되는 대형 수각류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위와 같습니다. 쥐라기의 케라토사우루스부터 백악기의 기가노토사우루스까지 전부 그렇죠. 허나 커다란 덩치와 달리 선입견을 뒤집는 녀석들이 있으니, 바로 스피노사우루스 무리입니다. 바리오닉스와 수코미무스가 속했는데, 이름답게 제일 대표적인 동물이 스피노사우루스죠.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장 흔한 모습은 영화 <쥬라기 공원 III>일 겁니다. 생김새가 독특한데, 앞발이 큼지막하고, 등에 커다란 등지느러미가 달리고, 얼굴이 길고 갸름해요. 수영에도 능해서 물 속에 들어가 갑자기 먹이를 덮치는 수중전도 벌이고요. 다큐멘터리 영상에 나온 것으로는 <플래닛 다이노소어>가 유명합니다. 여기서는 불곰처럼 강가에서 기다리다 지나가는 거대 가오리를 낚아채서 잡아 먹습니다. 앞다리가 길고, 발톱까지 크기 때문에 바리오닉스처럼 턱보다 앞다리를 주무기로 사용합니다. 발톱으로 가오리를 헤치고, 다른 공룡과도 앞다리로 싸웠죠.
사실 스피노사우루스를 처음부터 저런 모습으로 복원한 건 아닙니다. 2차 대전 당시
박물관이 폭격을 맞은 탓에 화석과 자료를 잃어 버렸거든요. 그나마 등지느러미가 달렸다는 사실만 남았죠. 그래서 옛날 복원도를 보면, 알로사우루스나
티-렉스 체형에 등지느러미만 그려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유명한 고생물 삽화가 윌리엄 스타우트도 이런 식으로 그렸죠. 하지만 같은 무리인 바리오닉스
화석이 나왔고, 곧이어 양호한 화석까지 찾아냅니다. 이를 근거로 스피노사우루스를 다시 고증했고, 영화에 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죠. 하지만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돌기가 훨씬 작다거나, 등지느러미 모양이 다르다거나, 뒷다리가 짧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어요. 어쨌거나 그런 이야기가
나오든 말든 스피노사우루스가 크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최고/최강의 수각류로 공룡 애호가들의 지지를 받았죠.
[새로운 학설은 스피노사우루스를 전혀 다른 낚시꾼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2014년 혁신적인 이론이 등장합니다. 새로 발굴한 화석으로 신체 비례를
측정했더니, 뒷다리가 엄청나게 짧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동시에 상체는 상당히 무겁고, 턱힘도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뒷다리 발가락은
비교적 납작했습니다.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스피노사우루스가 4족 보행을 했으리라 추측합니다. 앞발을 어떻게 지면에 디뎠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발톱이
상당히 깁니다. 그래서 고릴라나 개미핥기처럼 너클 보행을 했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앞발가락 관절로 걷는 보행이죠. 하지만 뒷다리가 짧고
너클 보행이면, 아무래도 속도를 내기 어렵습니다. 사냥감을 쫓아갈 수 없다는 뜻이죠. 설사 쫓아간다 해도 턱힘이 약해서 대형 먹이를 쓰러뜨리기
어렵고요. 학자들은 스피노사우루스가 저렇게 생겨먹은 건 수상 활동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악어처럼 물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물고기를 잡아 먹으니까
짧은 다리나 긴 주둥이가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스피노사우루스가 수생 포식자이며, 물고기를 잡는다는 사실이야 예전부터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턱힘이 너무 약한 데다가 다리가 짧고 네 발로 걷는다는 소식은 다소 충격적이죠. 그 동안의 최강 수각류 타이틀과 완전히 정반대니까요. 어쨌든
새로운 연구 결과, 이 놈은 굉장히 기이한 수각류로 발돋움했습니다. 수각류 중에 희한한 놈으로는 갈퀴처럼 길다란 발톱에다가 초식하는 테리지노사우루스를
꼽습니다만. 물고기가 주식인 스피노사우루스도 만만치 않죠. 아니, 스피노사우루스는 시대에 따라 계속 변했고, 예전 모습과 현재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똑같은 종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말입니다. 물론 새로운 학설(체형 복원)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이언스>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과학 잡지에 실린 기사를 보면, 4족 보행이 주류로 자리잡을 듯해요. 앞으로 스피노사우루스 삽화는 악어처럼
헤엄치는 모습으로 그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짧은 뒷다리와 지느러미 달린 뒷발로 말이죠.
이 놈이 하필 수중 낚시꾼이 된 이유는 먹이 부족 때문이었다고 추측합니다. 지상에 대형 초식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대신 물속에 몇 m짜리 물고기들이 돌아다녔으니, 그걸 잡아먹었다고 하네요. 물론 수생 포식자라고 해서 육상 동물에게 관심을 끊은 건 아닐 겁니다. 수달 같은 동물도 잡을 수만 있다면, 작은 포유류나 조류를 사냥합니다. 헤엄치도록 진화했지만, 근본은 족제비니까요. 스피노사우루스도 마찬가지겠죠. 근처에 먹을만한 초식공룡이 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바리오닉스 화석에서 육상 동물을 잡아먹은 흔적도 나왔고요. 만약 물이 마르거나, 지상에 잡기 쉬운 먹이(어리거나 다친 동물)이 있다면, 육상 사냥도 얼마든지 했을 테죠. 턱이 약해서 문제지만, 어차피 상체가 육중하고 앞발톱은 강하잖아요. 병든 동물이면, 발톱으로 쓰러뜨릴 수 있을 겁니다. <플래닛 다이노소어>처럼 완전히 주무기로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가능성은 높죠.
[대중매체의 이런 모습은 로망이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또 모릅니다. 앞으로 더 완전한 화석이 나오거나, 기술이 발달하면, 학설이
고정되거나 바뀔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까지 연구로 보면, 쉽사리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마 대형 수각류 중에서 스피노사우루스는 시대에 따른
외형/습성 변화가 가장 심한 종일 듯합니다. 이런 점이 고생물학의 매력이면서도 단점이겠죠. 완전하지 않은 흔적으로 유추해야 하니까요. 고생물학자를
탐정에 비유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학설이야 그렇다 치고, SF 창작물은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느라 골치 아프겠습니다. 스피노사우루스의 저런 모습은 솔직히 일반적인 대형 수각류와 거리가 멉니다. 멀어도 한참이나 멀죠. 지상을 활보하며, 초식공룡을 잡아야 할 녀석이 물속에서 물고기나 쫓아다니니…. 앞으로 인기 육식공룡으로서 입지가 위태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 <쥬라기 월드> 찰영 사진에 스코미무스 골격이 나와서 요즘 화제이던데요. 이 녀석은 스피노사우루스 무리 중 하나입니다. 아마 3편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같은 무리지만, 다른 종을 출현시키는 것 같네요. 그래서인지 바리오닉스도 출현 목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만일 3편처럼 스피노사우루스가 그대로 나왔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최신 학설처럼 4족 보행으로 나올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사전 작업을 한참 진행한 영화라서 미리 정해놓은 디자인을 바꾸기 어려울 것 같거든요. 설사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짧은 네 다리로 걷는 수각류는 매력이 떨어지죠. 벨로시랩터가 깃털 없이 나오듯 스피노사우루스도 예전 모습으로 나올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결국 창작물은 로망(!)이 우선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수중 괴물을 좋아해서 짧은 다리와 물갈퀴, 4족 보행도 좋지만, 너무 마이너한 로망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