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물에는 로봇이나 사이보그 등 수많은 기계 캐릭터들이 나옵니다. 이런 기계 캐릭터의 특징 중 하나는 독특한 시각 인터페이스입니다. 기계 눈으로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연출이죠. 로봇이나 사이보그는 시각 인터페이스에 오만 가지 정보를 나열하기 마련이거든요. 따라서 이런 정보를 읽으면 해당 캐릭터가 현재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앞으로 무얼 할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속마음이 없는 로봇이나 감정 표출이 제한된 사이보그, 아예 육체가 없는 인공지능 등을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준다고 할까요. 시각 인터페이스가 없어도 이야기 흐름상 로봇과 사이보그의 행동거지를 유추할 수야 있습니다만. 이런 게 있다면 한결 이해가 쉽고 빠를 겁니다. 비단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것만 아니라 때로는 시각 장치 때문에 안구 구조가 바뀌어서 인상까지 달라지죠. 더 나아가 독특한 인터페이스는 그 캐릭터의 상징으로 자리잡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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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화면에 온갖 정보를 나열하며 분석하는 T-800의 시각 장치.]



가령,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T-800이 그렇습니다. 작중에서 사이보그라고 지칭하는데, 사실 외부 표피를 벗겨내면 알맹이는 쇳덩이 로봇이죠. 본래 목적이 암살과 살육이라서 그런지 T-800의 시각 장치는 사물을 계속해서 분석합니다. 화면에 갖가지 정보가 줄줄 나와서 일일이 읽기조차 힘들어요. 관객이 읽어야 할 중요 정보는 한가운데 큼지막한 글씨로 깜빡이지만, 그 외에는 깨알같이 쏟아지다가 순식간에 사라지죠. 그런 문자들에 실제 의미가 있는지야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터미네이터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다니고 인식한다는 이미지를 형성하긴 충분합니다. 감독이 의도한 것 역시 이런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과 달리 반복적으로 사고하는 기계라는 모습 말입니다. 게다가 시각 인터페이스가 있는 덕분에 T-800이 지금 무엇에 관심을 쏟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대략 파악할 수 있죠. 존 코너 얼굴을 스캔해서 확대하면, 아무 말이나 표정 없이도 표적을 제거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정보 나열은 심리를 드러내는 유용한 방법입니다. 터미네이터는 미래에서 온 암살 기계라 누군가와 대화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단편적인 대화야 나누지만, 카일 리즈처럼 사라 코너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죠. 시종일관 혼자 있고, 무뚝뚝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관객은 이놈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겁니다. 그럴 때 시각 인터페이스에 문자를 띄우면 대사가 없어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편에서는 존과 사라를 만나 말수가 늘어나느라 시각 인터페이스가 잘 안 나옵니다만. 옷가지와 탈것을 챙기거나, 경찰 특공대를 처리하거나, T-1000과 대적하는 등 혼자 떨어져서 행동할 때는 으레 시각도 보여주기 마련입니다. 말없는 로봇의 심리를 알려주는 보조 연출이라고 해야 하나. 희한한 점은 똑같이 터미네이터인데 T-1000에게는 이런 게 없다는 겁니다. 두 로봇이 전부 시각 인터페이스를 드러내면 헛갈릴 우려가 있어서 그럴까요. 혹은 액체 금속이라는 작동 방식이 기이한 만큼, 시각(을 비롯한) 장치도 구현하기 힘들었을지도.



정보 처리 외의 특징은 붉은 색감입니다. T-800의 시각 장치는 붉은색이라 어두운 장소나 야간에도 훤히 볼 수 있습니다. 단색이어도 딱히 문제는 없는 듯. 편리하고 중요한 기능이긴 한데, 문제는 세상이 전부 새빨갛다는 거죠. 적대감, 흥분, 출혈, 경고 등을 암시하는 색상인데, 이걸로 외부세계를 인식하다니요. 그야말로 악당이라고 대놓고 인증한 거죠. 엔도 스켈레톤만 해도 해골 형상이라 무시무시한데, 두 눈까지 뻘겋게 번뜩이니 괴물이 따로 없습니다. 만약 시각 장치가 회색이나 녹색이었다면, 작중의 공포 분위기가 상당히 희석되었을 거에요. 붉은 시각으로 노려보는 거하고, 회색 시각으로 보는 거하고 뭐가 무서울지 상상하면 답이 나오죠. 더군다나 엔도 스켈레톤의 두 눈에 녹색불이 들어오는 건… 음, 어쩐지 별로인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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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답게 지령을 준수하는 화면입니다만, 이게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하죠.]



이 방면으로 유명한 다른 캐릭터로는 로보캅이 있죠. 터미네이터가 살인 기계라면, 이쪽은 민중을 지키는 든든한 경찰입니다. 그것도 통짜 로봇과 달리 실제 경찰관인 알렉스 머피를 바탕으로 만든 사이보그. 그 때문인지 로보캅의 시각 인터페이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주요 지령입니다. 사회 안녕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탄생했으니, 그와 관련된 원칙을 준수하는 게 당연하겠죠. 어쩌면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서 따온 걸 수도 있겠는데, 공교롭게도 주요 지령이 3가지입니다. 첫째, 공공 선에 봉사할 것. 둘째, 무고한 이를 보호할 것. 셋째, 법을 준수할 것. 이는 로보캅이 처음 기동할 때부터 화면에 뜬 문구이며, 존재 가치이기도 합니다.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작동이 멈추는 안전장치가 걸린 듯합니다. 거기다 기밀로 숨겨놓은 넷째 지령도 있는데, 이게 나중에 발목을 잡는 반전으로 작용하죠. 넷째 지령이 인터페이스에 뜨면서 무력화되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아예 시각에 노이즈까지 끼는데, 사물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모양입니다.



로보캅은 터미네이터에 비해 정보 나열은 적은 편입니다. 화면 구석에 명령어나 상태가 가끔 뜰 뿐이며, 그것도 한두 줄에 불과해요. 대신 그리드 기반인 표적 시스템이 있어서 총격전할 때, 뭘 어떻게 조준하는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탄약을 벽에 튕겨서 맞추는 묘기 같은 솜씨도 구구절절 설명 없이 인터페이스 하나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이보그와 싸울 때 약점을 표적 삼아서 어디를 공략해야 할지 알려주기도 하고요. 이는 별다른 대사 없이도 관객이 로보캅의 액션을 원활히 따라가는 길잡이 역할이죠. 또한 재생 기능이 있어서 녹화한 영상을 돌려보며, 영화 속 중요 장면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다만, 알렉스 머피의 기억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지라 옛날 생각도 불쑥 떠오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사람처럼 그냥 회상하는 거라면 차라리 추억이라고 하겠습니다만. 기계가 영상을 재생하는 식이라 한층 괴리감이 커 보이죠. 사이보그의 비애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데 로보캅은 사이보그라서 생체 안구일 텐데, 저런 인터페이스가 왜 뜨는지 모르겠습니다. 터미네이터야 기계니까 그렇다 쳐도, 사람 안구에 문자나 영상이 주르륵 나올 수는 없지 않나요. 어차피 개조하는 과정에서 장치를 삽입했다고 설정하면 되긴 합니다. 아울러 붉은색으로만 인식하는 터미네이터와 달리 총천연색으로 보지만, 도트가 좀 튑니다. 화질이 그렇게까지 선명하지 않아요. 이는 기계가 보는 세상이란 걸 강조하려고 일부러 도트를 넣은 게 아닐까 싶네요. 참고로 작중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로보캅이 ED-209에게 두들겨 맞고 난 후, 바이저가 깨졌죠. 그러면서 새파란 눈동자가 드러나는데, 그저 기계가 아닌 인간임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고장 났다고 오해한 경찰들의 총격을 맞으며 눈(인간성)을 보호하려는 모습은 가련하기도 했죠. 역시 눈은 마음의 창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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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말없이 두 사람을 감시하는 듯한 할. 섬뜩하고 오싹한 시선(?)입니다.]



시선을 강조한 또 다른 기계 캐릭터로는 <2001 우주대장정>에 나오는 할 9000도 있죠. 다만, 터미네이터나 로보캅과는 다른 경우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체랄 게 없는 인공지능이니까요. 시각 장치가 뚜렷한 로봇이나 사이보그와 달리 사실상 눈이랄 게 없죠. 굳이 비유하자면, 우주선 디스커버리가 몸뚱이고, 탐지기나 센서가 눈이라고 할까요. 이 점은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승무원 데이빗 보먼은 할과 대화할 때 항상 조종석을 바라봅니다.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습관상 그러는 것이지만, 조종석은 할의 눈이 아니에요. 보먼 자신도 그 점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허공에 대고 떠들 수도 없어서 예의상 조종석을 볼 뿐이죠. 영화에서는 으레 잘 알려진 둥그런 붉은 등으로 나옵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적색등일 뿐이지만, 어쩐지 보는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면모가 있어요. 붉은색이 자극적이기도 하고, 말없는 감시자 같은 느낌을 주니까요.



특정한 시각 인터페이스가 나왔던 T-800이나 로보캅과 달리 할에겐 이런 게 없습니다. 말했던 것처럼 시각 장치랄 게 따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할이 승무원을 지켜본다는 분위기를 연출해야 했고, 그래서 인공지능 시점으로 바라보는 듯한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 어안렌즈로 찍은 것마냥 둥근 화면인데, 반구형 등에 맞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이는 나중에 중요한 암시이자 복선이 되는데, 보먼과 프랭크가 의논할 때 둥그런 창문 너머로 할의 붉은 등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걸 인공지능이 감시하는 듯한 의구심을 풍기죠. (사실 감시하는 게 맞고요.) 할은 승무원을 스캔하거나, 분석하거나, 저장하는 등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만. 둥근 창문 너머로 가끔 비치는 붉은 눈알(?) 때문에 감시자 같은 인상이 생깁니다. , 터미네이터나 로보캅의 시선이 캐릭터의 의도를 내비치는 간접 수단이라면, 할의 시선 처리는 오히려 꿍꿍이가 있음을 알리는 수단이라 하겠습니다.



작중에서 할은 특별한 비밀 임무가 있었기에 이런 연출을 시도한 것 같습니다. 승무원은 물론이고 관객조차 속여야 했고, 터미네이터마냥 온갖 정보를 나열하면 안 되겠죠. 별다른 인터페이스 없이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함을 부각하여 꽤나 조마조마합니다. 만약 여러 가지 정보가 화면에 줄줄이 떴다면, 이런 건조함도 없었을 테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아슬아슬한 분위기도 사라졌겠죠. 하얀 바탕에 붉은 원만 부릅뜬 모습은 이후 할 9000의 상징이 되었고, 후대 창작물에서 사람을 감시하는 인공지능들이 오마쥬하기도 했습니다. 간단한 디자인이면서도 섬뜩한 터라 만들기도 쉽거든요. 아쉽게도 소설판에서는 조종석이 할의 시선을 대신한다고만 할 뿐, 이렇게 자극적인 디자인이나 시선 처리는 없습니다. 하긴 영상이 아니라 글로 읽으면 저런 색감이나 분위기가 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해요.



SF물에 쌔고 쌘 게 기계 캐릭터입니다만. 시선 연출 기법이라면 저 셋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할은 나머지 둘과 거리가 있으나 그래도 시각 연출로는 빼놓을 수 없죠.) 터미네이터는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고, 로보캅은 정보가 나오긴 하지만 넘칠 정도는 아닙니다. 할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 기계답게 보이죠. 사소하다고 간과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연출이 있기에 비로소 저런 캐릭터들도 정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T-800의 시뻘건 시각이나 지령을 준수하는 로보캅의 상태창이 없었다면, 글쎄요. 성격이나 심리를 금방 파악하지 못했을 듯합니다. 침묵하는 감시자인 할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나저나 할은 그렇다 치고, 로보캅이나 터미네이터는 리부트 이야기가 한창 나오는 중이죠. 과연 새로운 영화에서는 저런 시각 연출을 어찌하려는지 궁금해집니다. 캐릭터 성격을 잡기 위해서는 저런 것도 소홀히 하면 안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