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로 4주차에 들어서는 SF 소재론 강의... 작년에 비해서 나름대로 생각을 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 진행했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첫 시간의 ‘종합 선물 세트’(SF 소재론의 전반적인 부분을 ㅎㅜㅌ어 보는 것)를 거쳐 두 번째 시간.(10월 11일) 크게 두 가지 주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는 SF, 판타지, 무협이라는 ‘상상 장르’들에 대한 이야기.
  과연 이들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으며 서로 어떻게 다른가? SF는 뭔가? 와 관련된 이야기도 되겠군요.

두 번째는 SF(혹은 판타지나 무협이라도 좋음) 세계관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무엇인가? 흔히 세계관을 짠다고 하시는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우선 첫 번째 이야기 만을 소개해 보지요. 두 번째는 좀 더 정리를 해서(뜸을 들여서^^) 다음 기회에…


1. SF 소재론 – SF라는 장르

  게임을 제작하는데 있어(또는 소설을 쓰거나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있어) 매우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소재를 관점으로 살펴볼 때- 가장 대표적인 것은 SF, 판타지, 무협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밖에, 밀리터리, 호러, 스릴러, 미스터리 등의 장르가 존재하고 있지만, 세계관으로서의 소재를 생각한다면, 이들은 각각 SF, 판타지, 무협에 포함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썸 오브 올 피어스. 테러범의 손에 핵폭탄이 넘어갔다는 가정으로 상당히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가령, “붉은 10월”이나 “썸 오브 올 피어스(공포의 총합)” 등 톰 클랜시 스타일의 테크노 스릴러 밀리터리 작품들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일을 사실적으로(과학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절반쯤 ‘SF’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호러는 그 공포의 대상이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SF, 판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에일리언”이나 “인베이젼”은 호러 SF, “엑소더스”나 “식스센스”는 호러 판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릴러는 그 공포의 대상이 인간이며,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상상 세계’의 작품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미스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그것은 스릴러나 미스터리의 재미가 “현실 세계에서 접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니콜 키드먼 주연의 인베이젼. 비현실적인, 그러나 가능할지도 모르는 공포를 보여준다.  지금 우리 세계의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는 일. 혹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SF나 판타지의 세계를 무대로 스릴러, 미스터리를 제시할 수 있지만, 이 경우는 앞서 말한 호러처럼 미스터리 SF, 스릴러 판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담으로 호러와 스릴러의 차이는, 그 대상이 현실 속의 어떤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나눈다고 보면 되겠지요. 가령, “옆 집에 미치광이가 있어서 톱을 들고 날뛴다.”면 그것은 스릴러나 미스터리가 될 것이며, “옆 집에 사람이 있는데 알고 보니 외계인이다.”라면 그것은 호러가 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상상 세계를 다루는 작품을 SF, 판타지, 무협. 이 세가지로 한정하였고 그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각각 어떤 이야기인가?

  이들의 특성은 매우 다양하지만, 이 세 가지에 있어 각각 공통될 수 있는 요소는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것”

  다시 말해 “바램(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 오직 상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을 꿈꾸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다만, SF와 판타지는 그러한 바램을 ‘실현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가령 “하늘을 날고 싶다.”는 바램이 있을 때, SF에서는 날개를 달거나, 기구를 사용하거나, 반중력 등 무언가 과학적인 기술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반면, 판타지에서는 마법을 사용하거나, 새를 타고 나르거나, 기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게 되지요.

  전자와 후자의 차이, 그것은 과학적인가 아닌가.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제로 가능할 것 같은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행기처럼 날개를 달거나, 기구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해 보입니다. 반중력의 경우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바로 이런 ‘언젠가-또는 어디선가- 실현될 것 같은 가능성’이 바로 SF의 세계에는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일까요? 대개 판타지에서는 이미 실현된다는 것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반면, SF는 그 실현하는 과정, 그리고 실현되었을 때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가령, SF에도 ‘마법’이라는 요소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현재 ‘마법’은 과학이라고 이야기되고 있지 않지만, 시대나 상황에 따라 ‘마법이 가능한 상황’이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SF라면, 그 마법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지, 그리고 마법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어떤 가능성이 나오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판타지는 마법 그 자체는 ‘그냥 된다’는 말로 넘어가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는 것이지요.(물론, 모든 작품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SF에서 ‘가능해 보이는 것’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당시 기준으로 ‘가능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SF 중 하나인 달세계 여행. 그 상상력은 놀랍지만 지금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가령 “줄 베른”의 “달 세계 여행”에서는 대포를 쏘아서 달로 날아가고, 달 세계에는 공기가 있는데다 외계인이 살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폴로 탐사선이 달에 다녀온 지금은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 되지만, 당 시대 사람들에게는 왠지 가능하게 느껴졌기에 이 작품은 ‘고전 SF’로 불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SF의 ‘방법’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가능해 보이는 것”이라는데 초점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고지라. 이 작품은 핵무기에 대한 반성도 포함하고 있다.  일본의 특촬영화 “고지라”를 생각해 보지요.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괴수인 ‘고지라’는 수중에 살고 있는 생명체가 핵폭탄의 방사능에 노출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킨 나머지 거대해진 것으로 묘사됩니다.(이는 ‘인류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한 자연의 처벌’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상당히 깊은 느낌을 주었고, 후일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고지라” 같은 생물은 실제로 생겨날 수 있는가?

  과학적인 관점에서 고지라는 불가능합니다. 크기를 단순히 키우면 안 된다는 생각은 접어둡시다.(돌연변이를 일으킨 세포가 본래의 세포와 같은 강도를 가지고 있으란 법도 없으니까요.)

  일단 불가능한 것은, ‘방사능에 의한 돌연변이로 커질 수 없다.’는 것이 되겠군요. 이에 대해서 “공상과학 대전”이라는 책에서는 ‘암에 걸릴 뿐’이라고 하는데, 여하튼 돌연변이로 인해서 갑자기 커지는 일은 생겨날 수 없습니다. 방사능을 쬐었을 경우, 그것이 지나치게 강력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괴상한 후손이 태어나는 정도. 어찌되었든 물 속에 살던 공룡이 돌연변이로 인해서 갑자기 커진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방사능”이라는 것은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상식(선입견)을 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겠지요. 특히 ‘고지라’가 처음 방송되었을 때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선입견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이들에게 ‘방사능으로 인해 커진 괴수’는 왠지 “가능해 보이는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이고, 그래서 고지라는 SF 특촬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지요.
(* 같은 관점에서 디워(D-War)가 SF가 될 수 없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디워는 가능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제쳐두고, 천상 세계니 전설이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 놓는 디워는 과학적인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림 속에서 출현하는 병사니 괴수니 하는 것도 그렇지요. 이러한 요소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디워는 ‘작품 자체의 정합성’에서도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별개로 하더라도 “이야기가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에서 SF는 아닙니다.)


  물론, “선입견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SF다”라는 말은, 보다 복잡하고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는 하드 SF 팬들에게는 타당한 이야기라 할 수 없겠지만, “스타워즈”나 “고지라” 같은 것을 보고 즐기는 이들에게는 결코 잘못된 주장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자. 이렇게 판타지와 SF를 간단히 구분해 보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꿈꾸는데, 그 중에서도 SF는 ‘사람들이 가능하다고 믿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현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

  그런데 한가지, “왜 무협 얘기는 안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무협은 SF나 판타지와 대등한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해 두겠습니다.

  무협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미안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무협은 판타지나 SF처럼 ‘보편적인 장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고대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바다 속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는 판타지나 SF와는 달리, ‘무협’은 상당히 제한된 장소와 제한된 시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이야기했듯, 무협의 원류는 “수호전”인데…(물론, 현재 우리가 ‘무협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김용 등을 중심으로 20세기에 시작된 것입니다.)

  “수호전”을 시작으로 하는 무협 작품들을 살펴보면 ‘무협물’이라는 것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무술(武術)’을 도구로 삼아 ‘의(義)’와 ‘협(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여기에 '불합리한 사회'라는 것이 포함되면 금상 첨화입니다.^^)


  여기서, 무협이 SF나 판타지와 구별되는 장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판타지에서 ‘마법’은 등장하지 않아도 좋습니다.(주술이나 영력, 초능력이나 기타 여러 가지 특수한 능력이 등장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이런 힘이 아예 등장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SF에서 로봇이나 우주 전투기가 나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무협(武俠)’에서는 ‘의와 협’이라는 목표, 그리고 ‘무술’이라는 도구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무술’을 사용하여 의와 협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모두 ‘무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흔히 무협을 ‘중국’을 무대로 하고 있지만, 이것은 ‘중국’이라는 환경이 ‘무협’이라는 요소를 탄생시키는데 적절한 환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뿐. 반드시 과거의 중국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협은 동시에 SF나 판타지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가령, 우주 시대를 무대로 ‘협객의 이야기’를 펼쳐나간다면, “무협 SF”, 기사들의 시대를 배경으로 ‘협객들의 이야기’(가령 “로빈 후드” 같은 이야기)를 펼쳐나간다면, “무협 판타지”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혹자는 이것을 퓨전 장르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저는 그냥 ‘무협이라는 양념을 친 SF’, ‘무협이라는 양념을 친 판타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상상의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크게 나누어 SF와 판타지가 존재합니다.

  이들은 모두 “꿈의 가능성”을 소재로, 그리고 주제로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인간이 하늘을 나는 것을 ‘꿈’이라고 한다면,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 또는 하늘을 날게 되었을 때 겪을 수 있는 일, 그리고 인간이 하늘을 날게 되었을 때 세계의 변화 같은 것들을 이야기로 꾸며내는 것이지요.
(참 흥미로운 일이지만, ‘왜 하늘을 나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은 일단 제외되는 듯 합니다. 물론 이런 것을 다루지 않는다기보다는, 별로 중요한 주제는 아니라는 말이 될까요?)

  그런데 SF와 판타지는 그 ‘꿈’을 실현하는 방법에서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SF는 ‘가능해 보이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현하고, 판타지는 ‘허구의 방법’으로 실현한다는 점에서….

  ‘가능해 보이는 방법’은 ‘허구의 방법’에 포함된다고 생각해서, 흔히 SF가 판타지에 속하는 장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지만 이것은 또 다릅니다.

이카루스 신화. 물론 비현실적이지만, 신화에는 SF의 요소도 들어 있다.  사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SF와 판타지의 구분은 어려워 집니다. 가령, “이카루스 신화”에서는 밀납으로 새의 깃털을 붙이고 하늘을 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판타지의 세계가 되겠지만, 당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믿었을지도 모릅니다.(‘다이달로스 정도의 발명가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지.’라고…)

  “걸리버 여행기” 같은 작품에서도 그런 소인과 거인은 과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당 시대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은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꿈’에 대해 상상할 때, 어떻게든 가능한 것처럼 꾸미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SF가 먼저 등장한 것이고, 판타지는 그런 노력에 실패한(또는, 노력을 무시한) 작품들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물론, 어느 것이 먼저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SF와 판타지라는 ‘상상의 세계를 다룬 작품’은, 결국 작가 자신의 “꿈”을 반영하며, 그것을 소재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과학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 SF와 판타지로 나누게 되었지만, 그 원류는 결국 ‘꿈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라고 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추가로, 그 꿈 속에는 ‘무술을 사용하는 협객으로서 세상을 구원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 작품에는 “무협”이라는 타이틀을 걸 수 있게 되고,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동양의 일부 국가에서 좀 더 독특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지요.

  ‘무협물’은 대개 중국이라는 나라의 과거 특정한 시대(대개는 국가의 권력이 약해져서 혼란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부 인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민들의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수호전”의 영웅들이 그렇듯, 무협물의 주역들은 모두 서민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협객’들이니까요.

한때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인간 시장. 현대 사회를 무대로 한 협객물이 아닐까?  그것이 우주 시대라면 SF가 될 것이고, 기사들이 활약하는 시대라면 판타지가 될 것입니다.(네, 그렇습니다. 국가에 속하지 않은 자유 기사 판이 검술로 활약하는 “로도스 섬 전기”는 무협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김홍신씨의 “인간 시장”처럼 현재를 무대로 협객의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도 있겠지요.(사람들은 그것을 무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근본 정신은 일치합니다.)


  장르의 구분, 그것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정말로 중요한 것은 SF이다 아니다…라기보다는 어떤 소재, 어떤 주제의 작품인가가 되겠지요. 가령, 고지라가 SF라고 해도 괴수물은 싫어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고, 디워가 판타지라지만, 괴수물 만큼은 무조건 보는 사람이 있듯이…)

  하지만, 각각의 장르에서 그 핵심적인 요건을 살펴보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러한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무협이라는 건 무술을 사용해서 의와 협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 배경이 어떻든 무협의 기본적인 요건을 잘 녹여낼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SF나 판타지, 호러나 스릴러, 미스터리나 밀리터리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P.S) 위의 내용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SF와 판타지를 구분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엄격한 형태의 하드 SF라면 모를까 상당 수의 SF에는 판타지와 같은 –가능성이 없는- 요소가 충분히 포함되어 있으며, 완성도 높은 판타지일수록 ‘가능성 있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면서 SF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SF 작가가 쓴 것은 모두 SF”라는 이야기나 “SF라는 말이 붙은 건 모두 SF”라는 말도 틀린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라면 –선전 문구에 관계없이- ‘처음에 SF라고 생각되는 것이 SF’ 정도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판타지라고 생각되었다면 판타지로 보면 되겠지요.
(이를 테면 “스크랩트 프린세스” 같은 작품은 사실 SF이지만, 처음에 접하게 되면 판타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굳이 ‘나중에 이렇게 되니 SF’라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해도 상관은 없고요.)

  또는, 이야기 속에서 ‘과학적인 도구’가 등장하고 ‘과학적인 현상’이나 ‘이론’이 나온다면 SF이고, 그렇지 않으면 판타지… 이렇게 보아도 좋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의 문제일 뿐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작품에 녹아 있는 사상(주제)과, 그 작품을 이루고 있는 도구(소재)가 아닐까 합니다.


p.s) 위의 내용에서 '무협'을 따로 넣은 것은 개인적인 취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는 '무협'을 별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로빈훗"이나 "수호전"은 무대 만 다를 뿐 그 코드는 동일하기 때문에, 별도의 장르라고 구분하기는 어렵지요.(만일 아프리카 인들이 봤다면 '그게 뭐가 달라?'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그런 무협 만의 코드를 판타지 세계에 재현한 것이, 어쩌면 코에이사의 "환상 수호전"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무협의 외적인 틀'(중원이나 중국 무술 등)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이처럼 다양한 가능성을 펼쳐낼 수 있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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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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