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속의 상상 과학과 그 실현 가능성, 그리고 과학 이야기.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 이 게시판은 최근에 의견이나 덧글이 추가된 순서대로 정렬됩니다. )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 이 게시판은 최근에 의견이나 덧글이 추가된 순서대로 정렬됩니다. )
글 수 8,076
아래에 긱스님이 재미있는 발제를 하셨군요. 인간이 음악을 향유하는 이유.
사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뭔고하니 다른 발제에서도 여러번 나왔지만 '인간의 유니크함'을 말하는 지표중 하나가 바로 음악을 포함하는 예술이니까요.
먼저 짚고 넘어갈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창작은 유니크함의 결과이지 그 증거는 아니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 유니크 하므로 예술 창작이 가능하다'
는 것이지
' 예술 창작이 가능하므로 유니크하다'
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게, 예술의 창작과 향유(정확히는 감상)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 더하면 비평도 들어가지요.
이 세가지는 예술이라는 분야의 존재론적 지위를 메기는데 너무나도 커다란 몫을 담당하고 있으며 어느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그것은 진짜 예술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피해갈 수 없게 만듭니다. (현대 미술을 설명하는데 너무나도 어렵고 긴 논문, 최소한 교양 다이제스트라도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해 성공적으로 답하는가 마는가는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닙니다. (참고로 말하면 대부분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예술 향유의 목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인간의 정서를 즐겁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수많은 대답이 있어 왔지만 '인간은 왜 특정 환경에서 선호할만한 모종의 정서를 갖는가?'라는 물음에는 아직까지 그 어떤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의 예술 철학이나 미학에서는 이 물음을 '수학에서 0의 개념에 대해 의문을 갖는것'처럼, 물을 필요가 없는 대전제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 물음에 대답 하려 드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 이유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적절한 반성을 해 보면 그러한 정서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식 가능하다'는, 버트란드 러셀이 정의한, 논리학에서의 '명제의 정의'를 받아 들이기 때문입니다.
좌우지간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거기에 딴지를 거는 것은 아닙니다.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머리 좋은 사람들도 그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질문에 제가 대답할 재주는 없죠.)
저는 여기서 중점을
'인간이 최초의 예술을 행한 동기와, 그것을 인식한 때는 언제인가?'
라는 물음에 두려고 합니다.
다분히 고고학적일 수도 있는 물음입니다만, 전 역사에 문외한이고 여기서 그 시기가 몇만년전이다 하는 숫자는 중요치 않습니다.
일반적 견해는 최초 예술인 가무를 즐기는 과정이 사냥의 시뮬레이션이었고 그 안에서 체력을 키우고 언제나 승리로 끝나는 의식속에서 자신감과 사기를 증강 시켜며 의식의 말미에 모의 사냥 대상을 잡는 행위등을 함으로서 훈련까지 겸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으로 나뉘었으며 전자가 사냥에서 보다 나은 결과를 보였고 사회형성에서 우위를 차지 하였다는 설명입니다. 한마디로 '예술은 필요에 의해 발생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 견해는 유목과 수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온 지극히 서구중심적인 해석이며 수렵 단계를 거의 단번에 건너뛰다 시피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농경으로 접어든 동남아의 그것은 적절히 설명해 내지 못합니다.
어찌 되었든간에 이러저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예술 작품의 창조와 향유는 별개의 문제임을 전제하면서) 예술에 대한 향유, 혹은 감상은 선험적인 것인가, 경험적인 것인가?'
라는 겁니다. 덧붙이면, 그 예술이란 것이 보편성을 득하는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다만 향유시에 '인간의 정서에 모종의 바람직한 감정을 유발 시키는 것'이면 됩니다. (한마디로 베토벤인지 메탈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적어도 이 논의에서는 말입니다.)
먼저, 선험적이라고 보면 설명되는 것들(즉, 경험으로 설명이 안되는 것들):
1. 음악이라고는 처음 듣는 아이나 강아지들도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신체를 동원하여 그 리듬을 타기 위해 노력합니다.
2. 어떤 예술작품(보통, 초현실 주의 회화나 조각, 혹은 고전주의, 고딕 양식의 건축.)의 경우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이 없는 갓난아이들 조차도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하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3. 시대와 문화 차이에 상관없이 특정 예술 작품들은 인간에게 경이와 감탄을 불러 일으킵니다.
4. 인간은 효율적 공간보다 감동적 공간을 더 선호 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거기서 평생 살아야 할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5. 특정 자연현상등에 대해 겪어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최초임에도 불구하고)그것을 단지 지각 하는 것 만으로도 비슷한 정서를 갖습니다. (대체로 장엄함, 경이로움, 경건함.)
등등...
설명이 안되는 것들.(그러나 경험론으로는 설명이 가능한 것들.):
1. 분야를 막론하고 그 예술 분야에 대해 정보를 더 많이 가지는 등의 훈련으로 예술품의 깊이를 더 잘, 그리고 정확히 알게 됩니다.
2. 감상 능력은 종종 창조능력의 발견으로 이어 집니다.
3. 선험적으로 지각하는 예술들간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4. 뇌의 특정 부분이 손상 받을 경우 특정 분야의 예술품에 대해 아무런 정서를 갖지 않습니다.
5. 특정 예술 분야가 존재치 않는 문화-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조소'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가 그 분야를 접했을 경우도 예술 작품을 접할 경우의 정서를 유발하지 않습니다.
등등...
현재로서는 예술의 창조와 달리 감상은 선험적인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든 예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인데, 감상 능력을 선험적인 것이라고 간주 하지 않을 경우 예술 향유의 목적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는 경험론을 주장하는 학자건 선험론을 주장하는 학자건간에 '인간은 어찌 되었든 예술작품, 더 정확히는 미적 대상을 향유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예술 작품과 미적 대상은 다른 것입니다.)
이는 분석 미학자건 실험 미학자건, 해체 미학자건간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미적 대상에 대해 무감동적인 인간'은 단 한명도 관찰된 적이 없어서 입니다. (다분히 경험적인 데이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리라 믿는 학자는 없는것 같더군요. 이는 근본적으로 '미적 대상'이라는 것이 매우 주관적이며 개인 정서에 의존한다는 데에 그 문제가 있습니다. )
그 지각과 향유가 경험적이라면 훈련 없이는 그 대상에 대해 '정서'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정말로 선험적이라면 도대체 '언제부터' 선험적이었느냐 하는 겁니다. 즉, 인간이 목적없이 미적 대상에 대해 정서를 갖고 싶어하는 욕구는 인정을 하지만 그 욕구는 생존 욕구와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욕구의 지위가 생존욕 보다 저열하거나 양적으로 낮은 위치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지요.
생존의 어려움 속에서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행위는 사실 생물의 존재 본성에 크게 어긋납니다만,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은 필요하건 하지 않건, 배가 고프건 고프지 않건 예술 행위를 하며 그 향유도 했습니다. (비록 중세나 파시즘 체제 하에서 예술이 권력의 시녀가 되는 등의 암울한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와중에서도 개인들은 그런 것들을 향유하려 노력 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예술 향유 욕구의 선험성을 말하는 가장 좋은 증거지요. 시대가 어려울 수록 그런 노력은 더했으니까요. 요즘에는 그것들에 스포츠, 스크린, 섹스가 침투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말이 길었군요. 그러니까 결론을 내려 보면 이런 겁니다.
'이유 없이 예술을 향유하려 드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고 말하려면 예술 향유의 선험성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예술 향유가 장차 미래에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즐긴다'
는 개념이 가능하려 해도 선험성이 필요해 집니다.
왜냐하면 후건 명제가 성립 하려면 최초로 예술을 즐기기 전부터 그 사실을 '본성적'으로 알고 있어야만 후일을 위해 당장의 '비생산적 에너지 투여'를 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런데 후자가 가능 하려면 그러한 정보를 물리적인 체계안에, 가령 유전자 안에 담고 있어야 합니다만, 그것을 알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문화권에서도 예술이라 불릴만한 행위가 존재 했으며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과, 어느정도 뇌 용적을 가진 동물들도 '지각'이라는 측면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볼때 만약 그 정보가 유전자 안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이전, 아주 오래전 부터 존재 해 왔음이 틀림 없습니다.
예술의 '창조'는 언감 생심, 꿈도 꾸지 못할 그 시절부터 말이지요.
사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뭔고하니 다른 발제에서도 여러번 나왔지만 '인간의 유니크함'을 말하는 지표중 하나가 바로 음악을 포함하는 예술이니까요.
먼저 짚고 넘어갈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창작은 유니크함의 결과이지 그 증거는 아니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 유니크 하므로 예술 창작이 가능하다'
는 것이지
' 예술 창작이 가능하므로 유니크하다'
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게, 예술의 창작과 향유(정확히는 감상)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 더하면 비평도 들어가지요.
이 세가지는 예술이라는 분야의 존재론적 지위를 메기는데 너무나도 커다란 몫을 담당하고 있으며 어느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그것은 진짜 예술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피해갈 수 없게 만듭니다. (현대 미술을 설명하는데 너무나도 어렵고 긴 논문, 최소한 교양 다이제스트라도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해 성공적으로 답하는가 마는가는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닙니다. (참고로 말하면 대부분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예술 향유의 목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인간의 정서를 즐겁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수많은 대답이 있어 왔지만 '인간은 왜 특정 환경에서 선호할만한 모종의 정서를 갖는가?'라는 물음에는 아직까지 그 어떤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의 예술 철학이나 미학에서는 이 물음을 '수학에서 0의 개념에 대해 의문을 갖는것'처럼, 물을 필요가 없는 대전제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 물음에 대답 하려 드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 이유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적절한 반성을 해 보면 그러한 정서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식 가능하다'는, 버트란드 러셀이 정의한, 논리학에서의 '명제의 정의'를 받아 들이기 때문입니다.
좌우지간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거기에 딴지를 거는 것은 아닙니다.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머리 좋은 사람들도 그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질문에 제가 대답할 재주는 없죠.)
저는 여기서 중점을
'인간이 최초의 예술을 행한 동기와, 그것을 인식한 때는 언제인가?'
라는 물음에 두려고 합니다.
다분히 고고학적일 수도 있는 물음입니다만, 전 역사에 문외한이고 여기서 그 시기가 몇만년전이다 하는 숫자는 중요치 않습니다.
일반적 견해는 최초 예술인 가무를 즐기는 과정이 사냥의 시뮬레이션이었고 그 안에서 체력을 키우고 언제나 승리로 끝나는 의식속에서 자신감과 사기를 증강 시켜며 의식의 말미에 모의 사냥 대상을 잡는 행위등을 함으로서 훈련까지 겸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으로 나뉘었으며 전자가 사냥에서 보다 나은 결과를 보였고 사회형성에서 우위를 차지 하였다는 설명입니다. 한마디로 '예술은 필요에 의해 발생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 견해는 유목과 수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온 지극히 서구중심적인 해석이며 수렵 단계를 거의 단번에 건너뛰다 시피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농경으로 접어든 동남아의 그것은 적절히 설명해 내지 못합니다.
어찌 되었든간에 이러저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예술 작품의 창조와 향유는 별개의 문제임을 전제하면서) 예술에 대한 향유, 혹은 감상은 선험적인 것인가, 경험적인 것인가?'
라는 겁니다. 덧붙이면, 그 예술이란 것이 보편성을 득하는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다만 향유시에 '인간의 정서에 모종의 바람직한 감정을 유발 시키는 것'이면 됩니다. (한마디로 베토벤인지 메탈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적어도 이 논의에서는 말입니다.)
먼저, 선험적이라고 보면 설명되는 것들(즉, 경험으로 설명이 안되는 것들):
1. 음악이라고는 처음 듣는 아이나 강아지들도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신체를 동원하여 그 리듬을 타기 위해 노력합니다.
2. 어떤 예술작품(보통, 초현실 주의 회화나 조각, 혹은 고전주의, 고딕 양식의 건축.)의 경우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이 없는 갓난아이들 조차도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하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3. 시대와 문화 차이에 상관없이 특정 예술 작품들은 인간에게 경이와 감탄을 불러 일으킵니다.
4. 인간은 효율적 공간보다 감동적 공간을 더 선호 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거기서 평생 살아야 할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5. 특정 자연현상등에 대해 겪어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최초임에도 불구하고)그것을 단지 지각 하는 것 만으로도 비슷한 정서를 갖습니다. (대체로 장엄함, 경이로움, 경건함.)
등등...
설명이 안되는 것들.(그러나 경험론으로는 설명이 가능한 것들.):
1. 분야를 막론하고 그 예술 분야에 대해 정보를 더 많이 가지는 등의 훈련으로 예술품의 깊이를 더 잘, 그리고 정확히 알게 됩니다.
2. 감상 능력은 종종 창조능력의 발견으로 이어 집니다.
3. 선험적으로 지각하는 예술들간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4. 뇌의 특정 부분이 손상 받을 경우 특정 분야의 예술품에 대해 아무런 정서를 갖지 않습니다.
5. 특정 예술 분야가 존재치 않는 문화-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조소'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가 그 분야를 접했을 경우도 예술 작품을 접할 경우의 정서를 유발하지 않습니다.
등등...
현재로서는 예술의 창조와 달리 감상은 선험적인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든 예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인데, 감상 능력을 선험적인 것이라고 간주 하지 않을 경우 예술 향유의 목적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는 경험론을 주장하는 학자건 선험론을 주장하는 학자건간에 '인간은 어찌 되었든 예술작품, 더 정확히는 미적 대상을 향유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예술 작품과 미적 대상은 다른 것입니다.)
이는 분석 미학자건 실험 미학자건, 해체 미학자건간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미적 대상에 대해 무감동적인 인간'은 단 한명도 관찰된 적이 없어서 입니다. (다분히 경험적인 데이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리라 믿는 학자는 없는것 같더군요. 이는 근본적으로 '미적 대상'이라는 것이 매우 주관적이며 개인 정서에 의존한다는 데에 그 문제가 있습니다. )
그 지각과 향유가 경험적이라면 훈련 없이는 그 대상에 대해 '정서'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정말로 선험적이라면 도대체 '언제부터' 선험적이었느냐 하는 겁니다. 즉, 인간이 목적없이 미적 대상에 대해 정서를 갖고 싶어하는 욕구는 인정을 하지만 그 욕구는 생존 욕구와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욕구의 지위가 생존욕 보다 저열하거나 양적으로 낮은 위치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지요.
생존의 어려움 속에서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행위는 사실 생물의 존재 본성에 크게 어긋납니다만,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은 필요하건 하지 않건, 배가 고프건 고프지 않건 예술 행위를 하며 그 향유도 했습니다. (비록 중세나 파시즘 체제 하에서 예술이 권력의 시녀가 되는 등의 암울한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와중에서도 개인들은 그런 것들을 향유하려 노력 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예술 향유 욕구의 선험성을 말하는 가장 좋은 증거지요. 시대가 어려울 수록 그런 노력은 더했으니까요. 요즘에는 그것들에 스포츠, 스크린, 섹스가 침투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말이 길었군요. 그러니까 결론을 내려 보면 이런 겁니다.
'이유 없이 예술을 향유하려 드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고 말하려면 예술 향유의 선험성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예술 향유가 장차 미래에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즐긴다'
는 개념이 가능하려 해도 선험성이 필요해 집니다.
왜냐하면 후건 명제가 성립 하려면 최초로 예술을 즐기기 전부터 그 사실을 '본성적'으로 알고 있어야만 후일을 위해 당장의 '비생산적 에너지 투여'를 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런데 후자가 가능 하려면 그러한 정보를 물리적인 체계안에, 가령 유전자 안에 담고 있어야 합니다만, 그것을 알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문화권에서도 예술이라 불릴만한 행위가 존재 했으며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과, 어느정도 뇌 용적을 가진 동물들도 '지각'이라는 측면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볼때 만약 그 정보가 유전자 안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이전, 아주 오래전 부터 존재 해 왔음이 틀림 없습니다.
예술의 '창조'는 언감 생심, 꿈도 꾸지 못할 그 시절부터 말이지요.
@rogahdia
2008.03.19 15:40:10
어디서부터 예술이라고 인정을 해야 할까요.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구분이 힘든 느낌입니다. 최소한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괴성을 지르면서 얼씨구나 하고 상상되는 장면은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_-
글쎄요 그냥 제 관점은 그래요. 예술은 창조하는 자신이 자신의 행위가 예술이라는 개념을 인지할때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냥을 위한 의식은 그저 사냥이 잘 되게 해달라는 목적의 의식일 뿐입니다. 벽화또한 그런 사냥이 잘 되게 해달라는 의식의 목적이 될 수 있겠지만, 전세계에 퍼져있는 벽화중에 그래도 한둘은 예술창조나 향유의 목적으로 그려진게 아무리 적어도 한 두개쯤은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벽화가 예술의 시초라고 생각하는겁니다. 뭔가 막연한 생각이군요.
그리고 솔직히 예술창조 -> 유니크와 유니크 -> 예술창조 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문제 같습니다. 제 생각엔 예술창조를 함과 자신이 유니크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계속해서 순환한다고 생각을 해요. 자신이 유니크 하고 밑바닥에 깔려있는 예술 위에 더 새롭고 발전된 고급의 예술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나요. (이런 예시가 틀린것 같네요. 내가 쓴글이 묘하게 내 자신이 이해가 안가버리는 이상한 상황.)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쓸 글이 없습니다아아.
글쎄요 그냥 제 관점은 그래요. 예술은 창조하는 자신이 자신의 행위가 예술이라는 개념을 인지할때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냥을 위한 의식은 그저 사냥이 잘 되게 해달라는 목적의 의식일 뿐입니다. 벽화또한 그런 사냥이 잘 되게 해달라는 의식의 목적이 될 수 있겠지만, 전세계에 퍼져있는 벽화중에 그래도 한둘은 예술창조나 향유의 목적으로 그려진게 아무리 적어도 한 두개쯤은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벽화가 예술의 시초라고 생각하는겁니다. 뭔가 막연한 생각이군요.
그리고 솔직히 예술창조 -> 유니크와 유니크 -> 예술창조 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문제 같습니다. 제 생각엔 예술창조를 함과 자신이 유니크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계속해서 순환한다고 생각을 해요. 자신이 유니크 하고 밑바닥에 깔려있는 예술 위에 더 새롭고 발전된 고급의 예술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나요. (이런 예시가 틀린것 같네요. 내가 쓴글이 묘하게 내 자신이 이해가 안가버리는 이상한 상황.)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쓸 글이 없습니다아아.
2008.03.19 15:40:10
일단 기준은 먹고사는것과 상관이 없어야 하겠지요.
가령 둥지를 이쁘게 꾸며서 암컷을 유혹하는 새들이 있읍니다. 그 경우는 그 둥지가 예술이라기 보다는 번식을 위한 도구이겠지요.
그렇다면 생계와 관련없는 행위가 예술이 되겠군요. 그건 '유희'라고 말할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생존과 관련이 없는 유희를 예술이라고 단정(!)짓는다면
인간만이 유희를 지니느냐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어도 유희를 지니는 생물이 지구상에는 있다고 보고(즉 생존과 관계없는 엉뚱한? 행위) 그러한 행위의 반복이나 변종이 그 생물에게난 나름의 예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술은 물론 인간의 유니크함과 선험성과 경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바(어차피 로가디아님이 한말과 같은 의미이겠지만) 인간만의 것이라고도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림을 그리는 침판지(실존함 그림 판매도 함)의 경우 침판지는 예술을 아는걸까요? 적어도 생존과 관련없는 유희인듯 합니다.침판지에게는.
가령 둥지를 이쁘게 꾸며서 암컷을 유혹하는 새들이 있읍니다. 그 경우는 그 둥지가 예술이라기 보다는 번식을 위한 도구이겠지요.
그렇다면 생계와 관련없는 행위가 예술이 되겠군요. 그건 '유희'라고 말할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생존과 관련이 없는 유희를 예술이라고 단정(!)짓는다면
인간만이 유희를 지니느냐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어도 유희를 지니는 생물이 지구상에는 있다고 보고(즉 생존과 관계없는 엉뚱한? 행위) 그러한 행위의 반복이나 변종이 그 생물에게난 나름의 예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술은 물론 인간의 유니크함과 선험성과 경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바(어차피 로가디아님이 한말과 같은 의미이겠지만) 인간만의 것이라고도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림을 그리는 침판지(실존함 그림 판매도 함)의 경우 침판지는 예술을 아는걸까요? 적어도 생존과 관련없는 유희인듯 합니다.침판지에게는.
2008.03.19 15:40:10
유희가 예술이라고 한적은 없습니다. 관련지어 말하면 유희의 부분집합이 되겠지요. 다시말하지만, 자신이 창조적 생각을 가지고 예술이라는 개념을 인지하고 하는 행위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침팬지는 경우가 다릅니다. 침팬지 그림은 인위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손을 물감에 묻혀 그림에 어떻게는 그어보라고 시킵니다. 그 행위를 하면 침팬지는 먹이를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침팬지는 그 행위를 하게되고 먹이를 얻게 됩니다. 만약 그 행위에 대한 대가 또는 하지 않을 시의 응징이 없고 또한 억지로 교육받은게 아니라고 한다면 침팬지는 그림그리는 행위 자체를 생각하지 않을것입니다. 기껏해야 나뭇가지에 침묻혀서 힌개미나 긁어먹는 수준의 침팬지가 예술을 깨우칠 수는 없겠죠.
침팬지는 경우가 다릅니다. 침팬지 그림은 인위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손을 물감에 묻혀 그림에 어떻게는 그어보라고 시킵니다. 그 행위를 하면 침팬지는 먹이를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침팬지는 그 행위를 하게되고 먹이를 얻게 됩니다. 만약 그 행위에 대한 대가 또는 하지 않을 시의 응징이 없고 또한 억지로 교육받은게 아니라고 한다면 침팬지는 그림그리는 행위 자체를 생각하지 않을것입니다. 기껏해야 나뭇가지에 침묻혀서 힌개미나 긁어먹는 수준의 침팬지가 예술을 깨우칠 수는 없겠죠.
2008.03.19 15:40:10
※ 유사 사냥 행위나 제천 행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든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부족의 구성원들이 모두 춤과 노래를 즐기게 되고, 여기에서 문학과 기타 예술이
발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합니다.
유목 생활을 했든 정착해서 농경 생활을 했든 구성원들이 춤과 노래를 즐기는 행위는 남아
있었다는 거죠.
이 때는 부족의 구성원들이 모두 춤과 노래를 즐기게 되고, 여기에서 문학과 기타 예술이
발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합니다.
유목 생활을 했든 정착해서 농경 생활을 했든 구성원들이 춤과 노래를 즐기는 행위는 남아
있었다는 거죠.
2008.03.19 15:40:10
그림을 그리는 침팬지는, 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유희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침팬지가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것은 종이와 물감 뿐으로, 그것만 준비해 주면 따로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적어도 인간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재미있게 갖고 노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의 예술성은 별개의 문제지만요.
(대체로 보면, 무언가를 그린다기보다, 물감을 뭍혀서 문지르니까 색깔과 모양이 생긴다는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같습다.)
요컨데, 창작과는 별도로 '놀이'라는 것이 인간에 국한된 행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능이 높을 수록 많이 보여지긴 하지만, 적어도 육식 포유류 전반에 걸쳐 상당히 넓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침팬지가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것은 종이와 물감 뿐으로, 그것만 준비해 주면 따로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적어도 인간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재미있게 갖고 노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의 예술성은 별개의 문제지만요.
(대체로 보면, 무언가를 그린다기보다, 물감을 뭍혀서 문지르니까 색깔과 모양이 생긴다는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같습다.)
요컨데, 창작과는 별도로 '놀이'라는 것이 인간에 국한된 행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능이 높을 수록 많이 보여지긴 하지만, 적어도 육식 포유류 전반에 걸쳐 상당히 넓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8.03.19 15:40:10
자싸/ 그건 본인도 인정하셨다시피, 개인적 생각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로 -비록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술이라 하는 것은 ' 그 시대의 문화와 정서에 부합하는, 의지가 들어간 무목적적 창조' 입니다.
윈시인들의 가무는 종국적으로 보면 사냥 훈련이었다고는 해도 그들이 그 효율성을 알고 가무를 즐긴것은 아니므로 무목적적이라고 간주하며 그것을 최초의 예술활동이라 봅니다. 회화의 경우 역시 사냥 교육을 위한 시각 자료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상당 경우 투창 표적 연습의 대상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비록 괴성과 꽥꽥임이라 해도 그건 노래가 맞습니다. (그걸 인정하기 억울하다면 콧노래의 터프 버전 쯤으로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야구아/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현대 미학의 설명은 수렵 종족 중심으로 설명을 하기에 말씀하신 농경 민족의 기원 행사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뭐, 어찌되었건 향유 행위건 창조 행위건 무목적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지지만 말입니다.
윈시인들의 가무는 종국적으로 보면 사냥 훈련이었다고는 해도 그들이 그 효율성을 알고 가무를 즐긴것은 아니므로 무목적적이라고 간주하며 그것을 최초의 예술활동이라 봅니다. 회화의 경우 역시 사냥 교육을 위한 시각 자료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상당 경우 투창 표적 연습의 대상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비록 괴성과 꽥꽥임이라 해도 그건 노래가 맞습니다. (그걸 인정하기 억울하다면 콧노래의 터프 버전 쯤으로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야구아/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현대 미학의 설명은 수렵 종족 중심으로 설명을 하기에 말씀하신 농경 민족의 기원 행사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뭐, 어찌되었건 향유 행위건 창조 행위건 무목적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지지만 말입니다.
예술의 개념을 떠나서 단순히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은
선험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전제를 제시하지 않는다 한들,
단순한 원초적 상태에서의 호불호 하나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증명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뭔가 말이 꼬인 것 같은데,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재수정하겠습니다.
지금은 딱 부러지게 이걸 설명할만한 말이 생각 안 난다고요-_-;;; -
하지만, 예술을 한다는 것은 결국 어느 정도 사회적인 개념이 첨가되어야만 하는 것으로서,
단순한 감성의 공유와 같은 것으로는 정의하기 힘든 것이라 생각됩니다.
간단히 말해서-_-;
로가디아님의 말에 거의 대부분 공감합니다.
- 반박이고 자시고도 없이-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