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무협 포럼
판타지, 무협... 그 자유로운 꿈의 이야기.
판타지, 무협 세계의 정보나 설정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그 다채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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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시 전투(1346), 칼레 전투(1349), 푸아티에 전투(1356)를 모두 승리로 이끈 흑태자 에드워드.
이 양반은 창세기전의 흑태자의 모태가 되기도 했죠.
(다만 창세기전에서 사용한게 왜 그리스 홉라이트 대 홉라이트 때 가장 효율적인 사선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양반 하면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잉글랜드 롱보우!! 죠.
하지만 실제로는 롱보우가 풀플레이트를 제대로 뚫지 못했답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철의 질 차이 였습니다.
프랑스의 기사들은 막 제련법이 알려진 강철로 만들어진 풀플레이트를 사용했고 프랑스 귀족들이 경멸하며
부른 '농투성이'들인 영국 롱보우맨들의 화살 촉은 흔히 사용되던 주철이였습니다.
국가에서 화살촉을 비싼 강철로 일괄적으로 지급하였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는 국가 재정 (정확히는 자신 영지 자산이겠지만;; ) 파탄나서 약탈로 충당할려고
프랑스로 건너간 것이였기에 그런데까지 돈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농투성이들이 짐승 사냥하던 그 화살촉을 가지고 약탈하러 뛰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중세 때 약탈은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기회가 된다면 시도했습니다. 명분만 있으면 합법적인 것 이었습니다.;
어느 영주가 이웃 영주를 대장장이 닮았다고 했다가 전쟁나서 한쪽은 쫄딱 망했다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중세 초 기사 출신 음유시인은 약탈에 대해서 찬미하는 시까지 지었으니 말다했죠.
뭐 자신과 영지를 검 하나로 지켜내야 하는 마당에 이웃 영주의 도발에 응대 못하면 쪽박차는 세상이라서
어쩔 수 없기도 했겠습니다만.;)
이 주철 화살촉으론 강철 풀플레이트를 뚫을 순 없었지만 대신 뚫을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말이죠. 달리는 말이 죽어 낙마하여 땅에 내동댕이 쳐질 때 견뎌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하지만 이런 것보다 프랑스군 지휘에 더 큰 문제점 있었습니다.
크레시 전투 때는 흑태자 에드워드는 기병 돌격을 막기 위래 크레시 마을의 산등성이에 진을 쳤습니다.
산등성이 중앙 부근에는 경작을 위해 만들어진 3단 언덕이 있어 적 기병의 돌파를 막을 수 있었거든요.
게다가 서쪽을 등지고 있어서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채 진격하게 만들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쪽에는 운없는 이야기지만 비까지 내려서 프랑스 정찰병이 영국군을 찾지못해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발견한 것은 비가 멈춘 후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였습니다. 근데 솔직히 방어하고 시간을 끌면서 협상을
벌였다면 프랑스 군에 유리한 상황으로 협상을 종결짓고 전쟁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영국군 보다
3배나 많은 병력을 가진 프랑스는 수를 믿고 기사들을 산등성이로 돌격시킵니다.
비에 젖은 땅에 경작지 3단짜리 더해진 산등성이로 돌격하지만 아무리 말이라 하더라도 저건 좀 무리한 것
이죠; 기동력 잃고 말은 장궁맞아 넘어가고 기사도 같이 넘어지고 마지막으로 햇빛 덕택에 적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도 없었죠. 어쩌다 소수 올라가는데 성공한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서 기다리고 있던 영국 기사들
에게 쓰러지게 됩니다. 기사들의 15차례 돌격이 끝나고 프랑스는 패배하게 되죠.
푸아티에 전투 때는 크레시 전투 때를 교훈삼아 약간의 기사만을 남기고 기사들을 말에서 내려 돌격하게
합니다.
물론 그 교훈이란 영국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전투했기에 진 것이란거죠.;;
지형도 안보고 무리하게 돌격한 건 전혀 안중에도 없는 프랑스 귀족분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흑태자 에드워드 자리 잘 잡았습니다. 전리품 가지고 튈려다 뒷덜미 잡힌 흑태자였지만
협상하는 척 시간 끌면서 포도밭으로 자리 잡습니다. 경사가 진 전면을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오른쪽은 마차로
막고 왼쪽은 개울이 있었습니다. 전면 울타리 사이사이에 통과 가능한 샛길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좋은 목표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선두는 말을 탄 기사들의 돌격 이였지만 격퇴 당했습니다.
두번째는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였지만 거기까지 돌격하느라 진 빠져서 영국군에 상당한 피해를 주긴 했지만
격퇴당합니다.
세번째는 두번째 공격 실패한 것보고 부대 데리고 Orleans 공작님 도망합니다.;;
네번째 확실하게 붙었고 영국군을 패주 시킬뻔 했습니다만 배후에서 공격 들어오는 영국 기병대의 공격에
영국군의 매복이 있는 것으로 오인해 militia ( 아마도 각 영지에 징집한 농민병일 것입니다. ) 들이 도망가게
되었는데 이들의 도주가 전군으로 확대되어 결국 프랑스군은 전군이 도망가게 됩니다.
프랑스왕 john과 그 휘하 기사들은 끝까지 싸웠지만 흑태자의 포로로 잡히고 푸아티에 전투는 끝납니다.
만약, 프랑스 쪽 지휘관들이 좀더 지형을 보고 전장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영국의 장궁 신화
는 존재치 않았을 지도 모르겠군요 ;;
p.s 이건 카더라 이야기이긴 한데 크레시 전투 때 실제 프랑스군 사망자 다수의 사인은 압사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믿거나 말거나겠죠;
이 양반은 창세기전의 흑태자의 모태가 되기도 했죠.
(다만 창세기전에서 사용한게 왜 그리스 홉라이트 대 홉라이트 때 가장 효율적인 사선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양반 하면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잉글랜드 롱보우!! 죠.
하지만 실제로는 롱보우가 풀플레이트를 제대로 뚫지 못했답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철의 질 차이 였습니다.
프랑스의 기사들은 막 제련법이 알려진 강철로 만들어진 풀플레이트를 사용했고 프랑스 귀족들이 경멸하며
부른 '농투성이'들인 영국 롱보우맨들의 화살 촉은 흔히 사용되던 주철이였습니다.
국가에서 화살촉을 비싼 강철로 일괄적으로 지급하였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는 국가 재정 (정확히는 자신 영지 자산이겠지만;; ) 파탄나서 약탈로 충당할려고
프랑스로 건너간 것이였기에 그런데까지 돈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농투성이들이 짐승 사냥하던 그 화살촉을 가지고 약탈하러 뛰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중세 때 약탈은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기회가 된다면 시도했습니다. 명분만 있으면 합법적인 것 이었습니다.;
어느 영주가 이웃 영주를 대장장이 닮았다고 했다가 전쟁나서 한쪽은 쫄딱 망했다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중세 초 기사 출신 음유시인은 약탈에 대해서 찬미하는 시까지 지었으니 말다했죠.
뭐 자신과 영지를 검 하나로 지켜내야 하는 마당에 이웃 영주의 도발에 응대 못하면 쪽박차는 세상이라서
어쩔 수 없기도 했겠습니다만.;)
이 주철 화살촉으론 강철 풀플레이트를 뚫을 순 없었지만 대신 뚫을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말이죠. 달리는 말이 죽어 낙마하여 땅에 내동댕이 쳐질 때 견뎌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하지만 이런 것보다 프랑스군 지휘에 더 큰 문제점 있었습니다.
크레시 전투 때는 흑태자 에드워드는 기병 돌격을 막기 위래 크레시 마을의 산등성이에 진을 쳤습니다.
산등성이 중앙 부근에는 경작을 위해 만들어진 3단 언덕이 있어 적 기병의 돌파를 막을 수 있었거든요.
게다가 서쪽을 등지고 있어서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채 진격하게 만들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쪽에는 운없는 이야기지만 비까지 내려서 프랑스 정찰병이 영국군을 찾지못해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발견한 것은 비가 멈춘 후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였습니다. 근데 솔직히 방어하고 시간을 끌면서 협상을
벌였다면 프랑스 군에 유리한 상황으로 협상을 종결짓고 전쟁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영국군 보다
3배나 많은 병력을 가진 프랑스는 수를 믿고 기사들을 산등성이로 돌격시킵니다.
비에 젖은 땅에 경작지 3단짜리 더해진 산등성이로 돌격하지만 아무리 말이라 하더라도 저건 좀 무리한 것
이죠; 기동력 잃고 말은 장궁맞아 넘어가고 기사도 같이 넘어지고 마지막으로 햇빛 덕택에 적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도 없었죠. 어쩌다 소수 올라가는데 성공한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서 기다리고 있던 영국 기사들
에게 쓰러지게 됩니다. 기사들의 15차례 돌격이 끝나고 프랑스는 패배하게 되죠.
푸아티에 전투 때는 크레시 전투 때를 교훈삼아 약간의 기사만을 남기고 기사들을 말에서 내려 돌격하게
합니다.
물론 그 교훈이란 영국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전투했기에 진 것이란거죠.;;
지형도 안보고 무리하게 돌격한 건 전혀 안중에도 없는 프랑스 귀족분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흑태자 에드워드 자리 잘 잡았습니다. 전리품 가지고 튈려다 뒷덜미 잡힌 흑태자였지만
협상하는 척 시간 끌면서 포도밭으로 자리 잡습니다. 경사가 진 전면을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오른쪽은 마차로
막고 왼쪽은 개울이 있었습니다. 전면 울타리 사이사이에 통과 가능한 샛길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좋은 목표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선두는 말을 탄 기사들의 돌격 이였지만 격퇴 당했습니다.
두번째는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였지만 거기까지 돌격하느라 진 빠져서 영국군에 상당한 피해를 주긴 했지만
격퇴당합니다.
세번째는 두번째 공격 실패한 것보고 부대 데리고 Orleans 공작님 도망합니다.;;
네번째 확실하게 붙었고 영국군을 패주 시킬뻔 했습니다만 배후에서 공격 들어오는 영국 기병대의 공격에
영국군의 매복이 있는 것으로 오인해 militia ( 아마도 각 영지에 징집한 농민병일 것입니다. ) 들이 도망가게
되었는데 이들의 도주가 전군으로 확대되어 결국 프랑스군은 전군이 도망가게 됩니다.
프랑스왕 john과 그 휘하 기사들은 끝까지 싸웠지만 흑태자의 포로로 잡히고 푸아티에 전투는 끝납니다.
만약, 프랑스 쪽 지휘관들이 좀더 지형을 보고 전장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영국의 장궁 신화
는 존재치 않았을 지도 모르겠군요 ;;
p.s 이건 카더라 이야기이긴 한데 크레시 전투 때 실제 프랑스군 사망자 다수의 사인은 압사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믿거나 말거나겠죠;
글쎄여..지금은 복학준비중인 알바생..--
본래부터 서양의 무(武) 계급과 동양의 무(武) 계급의 차이가 아닙니까 -_-
서양에서는 힘만 잘 쓰면 무였지만 동양에서는 무(武)만 아니라 문(文)도 함께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동양 사람들로 봤을 때에는 중세시대 기사들이 무식하게 보이는 것일지도...
서양에서는 힘만 잘 쓰면 무였지만 동양에서는 무(武)만 아니라 문(文)도 함께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동양 사람들로 봤을 때에는 중세시대 기사들이 무식하게 보이는 것일지도...
기사 특히나 말을 탄 기사는 만능이 아닙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만능으로 보았죠 그때 영국군이 내려서 쌍운건 왜냐하면 숫적으로 밀렸기 때문일겁니다 차라리 말을 타고 싸우느니 내려서 보병으로써 단단한 진형을 구사하면 효과적 이란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롱보우보다 석궁의 구성이 영군은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만 (틀릴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 석궁병이 나오는데 프랑스에 석궁명은 방패막이가 없었습니다 (이것도 가물가물 죄송합니다 ㅠㅠ) 대신 영국은 궁병대를 무척이나 아꼇지요^^ 그래서 방패막이 아니면 적의 기사를 막아줄 최소한의 말뚝을 박아놓고 사용했습니다 이것의 차이는 아시는 분은 아실거라 믿고;; 그리고 월래부터 화살은 직선으로 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1:1 이나 숲 그리고 근접이 아닌 바에야.. 멀리있을땐 탄막에 월리와도 비슷합니다 쏘고 걸리면 맞는거죠. 그러니 그런걸로 기사의 갑주를 뚤기는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강철로 만든 화살촉이라 해도 말입니다^^ (잘못안것이면 낭패 ;;)
ps: 물론 프랑스기사대의 머리가 나쁜것은 인정 (로망에만 빠진놈들..)
ps: 물론 프랑스기사대의 머리가 나쁜것은 인정 (로망에만 빠진놈들..)
출처가 어디인지 밝혀 주시겠습니까? 제가 읽은 책(서양 중세 전투사)에서는 조금 다르게 서술되어 있어서요. 프랑스 군대가 자리를 잡은 곳이 진흙 뻘밭이어서(아마도 비가 왔다는 그 부분에서 그렇게 되었지 않나 싶습니다만) 오도 가도 못하고 당했다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동양의 무가 과연 서양의 무보다 앞도적이었다고는 저는 생각지 않습니다. 무라는 것이 이기는 것이 당면 과제라고 한다면, 서양쪽 무도 역시 그러한 것을 목적으로 나름대로의 발전을 했다고 봅니다. 흔히 중세 서양의 기사들이 갑옷을 두른채 대형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매우 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형의 검의 사각을 만회하기 위한 여러가지 바리에이션이 있었던걸로 압니다.(하프 스워딩같은.)
동양의 무가 과연 서양의 무보다 앞도적이었다고는 저는 생각지 않습니다. 무라는 것이 이기는 것이 당면 과제라고 한다면, 서양쪽 무도 역시 그러한 것을 목적으로 나름대로의 발전을 했다고 봅니다. 흔히 중세 서양의 기사들이 갑옷을 두른채 대형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매우 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형의 검의 사각을 만회하기 위한 여러가지 바리에이션이 있었던걸로 압니다.(하프 스워딩같은.)
fazzgd님 이 말씀하시는 결국 프랑스가 이긴 것의 의미가 잔다르크가 나온 시대를 의미하신다면
시간 차가 좀 있습니다.; 백년전쟁 이름 하에 들어가는 전쟁들이지만 시작은 에드워드3세
(흑태자 아버지 되는 사람이죠) 가 영국과 프랑스 왕을 자칭한 1340년부터 ( 혹은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던 1339년 ) 끝은 1453년에 끝났습니다. 약 백십여년 동안 일어난 전쟁들을 뭉뚱거려
백년전쟁으로 부르고 잔다르크가 활동한 건 백년전쟁 끝나기 직전이었으니 백여년동안 적의
전술 그대로 당한다면 지휘관에게 문제가 있겠죠;;
p.s 백년전쟁도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왕가 사이의 왕위 계승 및 영토 문제를
중심으로 독일 및 네덜란드,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 브르타뉴공가, 스코틀랜드왕가
등 여러 세력들이 끼어들은 전쟁이라 솔직히 중싱축만 없다면 일종의 유럽 대전
으로까지 비약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쿨럭;
시간 차가 좀 있습니다.; 백년전쟁 이름 하에 들어가는 전쟁들이지만 시작은 에드워드3세
(흑태자 아버지 되는 사람이죠) 가 영국과 프랑스 왕을 자칭한 1340년부터 ( 혹은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던 1339년 ) 끝은 1453년에 끝났습니다. 약 백십여년 동안 일어난 전쟁들을 뭉뚱거려
백년전쟁으로 부르고 잔다르크가 활동한 건 백년전쟁 끝나기 직전이었으니 백여년동안 적의
전술 그대로 당한다면 지휘관에게 문제가 있겠죠;;
p.s 백년전쟁도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왕가 사이의 왕위 계승 및 영토 문제를
중심으로 독일 및 네덜란드,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 브르타뉴공가, 스코틀랜드왕가
등 여러 세력들이 끼어들은 전쟁이라 솔직히 중싱축만 없다면 일종의 유럽 대전
으로까지 비약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쿨럭;
동양의 무가 서양의 무보다 압도적이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서양에서는 무를 상징하는 계층인 기사들은 문보다는 무를 중요했지만 동양에서는 무를 상징하는 계층(대표적인 것이 양반)은 무만 아니라 문을 함께 수양하며 문과 무의 조화를 중요시 한 차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양에서 무관이 문을 무시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시대 때 만부장, 천부장 같은 무관들도 학식은 대단했습니다. 다만 중세시대의 무관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기사들이 문을 천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약간의 변질이 생겨 무를 천하시 여기게 된 것도 있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양에서 무관이 문을 무시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시대 때 만부장, 천부장 같은 무관들도 학식은 대단했습니다. 다만 중세시대의 무관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기사들이 문을 천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약간의 변질이 생겨 무를 천하시 여기게 된 것도 있죠.)
중세 장원사 란 책의 20장 백년전쟁 : 14세기의 전투들 이란 챕터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책은 상, 하로 두권으로 되어있는데 집에 있는건 하권에서 필요한 몇개 장만 복사한 거라 저자는
적어 놓지 않았네요; 프랑스 역사 교수로 2차대전 끝나고 좀 있다 죽은사람인데;;
정확히는 이리 적혀 있네요
" (중략..)
에드워드가 진영을 배치하고 있는 동안, 프랑스군은 솜므강변의 아베비유(Abbevile)을 떠나
크레시의 숲 서쪽으로 지나는 길을 따라서 북진하기 시작했다. 필립은 영국군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고, 단지 여전히 플랑더즈로 급히 가고 있으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북진하는
도중에 영국군이 숲 동쪽으로 지나는 길 가까이의 북쪽 숲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이에 즉각
프랑스군에게 그곳으로 가로질러 가라고 명령했다. (중략..)
영국군이 막 시야에 들어온 때였다. 그는 형인 왕의 명령에 복종하여 진군을 멈추었으나, 그의
뒤에 있던 부대들이 모두 가능한 한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바람에 상황은 완전한 혼란에 빠졌다.
필립은 그곳에 도착하여 적의 모습과 휘하 기사들이 진격하지 못해 안달하는 광격을 보고는,
판단력을 상실하여 알량송에게 공격을 명하였다. (중략..) "
입니다. 아마도 적의 모습이란 수가 적은데다 농투성이가 섞인 영국군 모습을 뜻하지 않나 싶습니다;;
책은 상, 하로 두권으로 되어있는데 집에 있는건 하권에서 필요한 몇개 장만 복사한 거라 저자는
적어 놓지 않았네요; 프랑스 역사 교수로 2차대전 끝나고 좀 있다 죽은사람인데;;
정확히는 이리 적혀 있네요
" (중략..)
에드워드가 진영을 배치하고 있는 동안, 프랑스군은 솜므강변의 아베비유(Abbevile)을 떠나
크레시의 숲 서쪽으로 지나는 길을 따라서 북진하기 시작했다. 필립은 영국군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고, 단지 여전히 플랑더즈로 급히 가고 있으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북진하는
도중에 영국군이 숲 동쪽으로 지나는 길 가까이의 북쪽 숲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이에 즉각
프랑스군에게 그곳으로 가로질러 가라고 명령했다. (중략..)
영국군이 막 시야에 들어온 때였다. 그는 형인 왕의 명령에 복종하여 진군을 멈추었으나, 그의
뒤에 있던 부대들이 모두 가능한 한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바람에 상황은 완전한 혼란에 빠졌다.
필립은 그곳에 도착하여 적의 모습과 휘하 기사들이 진격하지 못해 안달하는 광격을 보고는,
판단력을 상실하여 알량송에게 공격을 명하였다. (중략..) "
입니다. 아마도 적의 모습이란 수가 적은데다 농투성이가 섞인 영국군 모습을 뜻하지 않나 싶습니다;;
음, 오늘 크레시전투에 관한 서적들을 좀 읽어보았습니다. 레포트 써야하는데..;;
기술하신 잉글리쉬 롱보우가 프랑스 기사들의 갑주를 뚫지 못했다는 맞긴 맞더군요. 화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죽어간 기사들도 많았지만 큰 피해를 주지 못한 화살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건 프랑수 갑주들이 양질의 철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식할정도로 두텁게 껴입은 갑주들 때문에 화살이 미쳐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을뿐이더군요. 다만 기사들을 태운 말들은 기사들만큼 보호받지못했고 말들은 잉글리쉬 롱보우 앞에 우수수 쓰려저버립니다. 화살에 맞아죽은 기사들보다는 낙마해서 죽게된 기사들이 더 많을듯 하군요. 기절했거나 낙마의 충격으로 죽거나 반병신이 된 기사들은 맨몸으로도 죽일 수 있는 고정표적밖에 더 됐겠습니까..
기술하신 잉글리쉬 롱보우가 프랑스 기사들의 갑주를 뚫지 못했다는 맞긴 맞더군요. 화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죽어간 기사들도 많았지만 큰 피해를 주지 못한 화살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건 프랑수 갑주들이 양질의 철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식할정도로 두텁게 껴입은 갑주들 때문에 화살이 미쳐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을뿐이더군요. 다만 기사들을 태운 말들은 기사들만큼 보호받지못했고 말들은 잉글리쉬 롱보우 앞에 우수수 쓰려저버립니다. 화살에 맞아죽은 기사들보다는 낙마해서 죽게된 기사들이 더 많을듯 하군요. 기절했거나 낙마의 충격으로 죽거나 반병신이 된 기사들은 맨몸으로도 죽일 수 있는 고정표적밖에 더 됐겠습니까..
실제 갑주가 두터워지기 시작한 것은 총의 사용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무식할 정도로 두텁게 껴입은 갑주는 풀플레이트 메일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전 플레이트가 부분 갑주 나머지 체인 메일이라면 이쪽은 전신 갑주 약간의 체인메일 의미
하거든요
갑주를 두텁게 껴입어 봤자 어차피 30-40kg 중량 정도이니 실제적으로 몇밀리짜리 철판에
불과합니다. 안에 가죽갑옷으로 부분 체인메일이 들어간 옷을 따로 입긴 하지만요.;
무식할 정도로 두텁게 껴입은 갑주는 풀플레이트 메일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전 플레이트가 부분 갑주 나머지 체인 메일이라면 이쪽은 전신 갑주 약간의 체인메일 의미
하거든요
갑주를 두텁게 껴입어 봤자 어차피 30-40kg 중량 정도이니 실제적으로 몇밀리짜리 철판에
불과합니다. 안에 가죽갑옷으로 부분 체인메일이 들어간 옷을 따로 입긴 하지만요.;
후음... 어디선가 줏어들은 이야기이지만.... 안에 체인메일을 입고 그 위에 풀 플레이트까지 입으면
그 무게로인해 한번 쓰러지면 못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있는데... 제가 틀린건가요?
제가 들은바로는 두꺼운 갑주를 뜷고 생명에 위협이 될정도의 상처를 입힐수 있는 공격은
상당히 적어서 보통 기사들을 상대할땐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해서 죽음 이라 알고 있었는데
좀더 알아봐야겠군요. (게다가 또 어디선가 줏어들은 말에 의하면 갑주가 엄청 두꺼워서
관절등 약한 부분을 제외하면 뚫기가 불가능이라 들은적도;;;;)
그 무게로인해 한번 쓰러지면 못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있는데... 제가 틀린건가요?
제가 들은바로는 두꺼운 갑주를 뜷고 생명에 위협이 될정도의 상처를 입힐수 있는 공격은
상당히 적어서 보통 기사들을 상대할땐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해서 죽음 이라 알고 있었는데
좀더 알아봐야겠군요. (게다가 또 어디선가 줏어들은 말에 의하면 갑주가 엄청 두꺼워서
관절등 약한 부분을 제외하면 뚫기가 불가능이라 들은적도;;;;)
플레이트가 충분히 보호가 않되는곳(사타구니 같은곳)은 체인을 덧데지만 같이 입는다는건 아직 본적이
없군요 집에 갑옷을 입는데 대한 책이 한권 있습니다 거기선 그냥 무장용 웃옷(갑옷을 걸치기 위해 끈이
달린 옷입니다) 을 입을 뿐이더군요 물론 그옷이란것도 갑옷의 틈이 있을곳에 체인이 달린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체인과 같이 입는다라.. 체인메일이 총무게가 그래뵈도 풀풀에 거의 버금가니까요 (체인
메일이 무거운건 특성상 무게가 걸리는 지점에만 걸리는 이유도 있습니다) 같이 입으면 아마 못잡아
60kg 이거 쓰러져서 못움직이기 보다 서있어도 갑옷 무게로 인해서 못움직일거 같습니다..
그리고 풀플레이트은 생각보다 두껍지 않습니다 의외로 생각보다 얇습니다 두꺼워지기 시작한것은 화기
의 등장이죠 이땐 그냥 가슴보호대만 입고 말았습니다 대신 두께는 무지 두꺼웠죠..
아 약간 딴소리지만 풀플레이트메일을 입어도 낙마가 아니라면 넘어져도 일반 보병과 틀릴게 별로 없이
움직일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갑옷에 무게가 온몸으로 분산됬거든요 실제 체감 갑옷무게는 링메일 보다
훨씬 가벼웠을 것입니다
없군요 집에 갑옷을 입는데 대한 책이 한권 있습니다 거기선 그냥 무장용 웃옷(갑옷을 걸치기 위해 끈이
달린 옷입니다) 을 입을 뿐이더군요 물론 그옷이란것도 갑옷의 틈이 있을곳에 체인이 달린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체인과 같이 입는다라.. 체인메일이 총무게가 그래뵈도 풀풀에 거의 버금가니까요 (체인
메일이 무거운건 특성상 무게가 걸리는 지점에만 걸리는 이유도 있습니다) 같이 입으면 아마 못잡아
60kg 이거 쓰러져서 못움직이기 보다 서있어도 갑옷 무게로 인해서 못움직일거 같습니다..
그리고 풀플레이트은 생각보다 두껍지 않습니다 의외로 생각보다 얇습니다 두꺼워지기 시작한것은 화기
의 등장이죠 이땐 그냥 가슴보호대만 입고 말았습니다 대신 두께는 무지 두꺼웠죠..
아 약간 딴소리지만 풀플레이트메일을 입어도 낙마가 아니라면 넘어져도 일반 보병과 틀릴게 별로 없이
움직일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갑옷에 무게가 온몸으로 분산됬거든요 실제 체감 갑옷무게는 링메일 보다
훨씬 가벼웠을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원래 체인(혹은 링)메일을 안에 입고, 그 위에 철판을 입는게 정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철판만을 따로 입는게 아니라 겹쳐 입는다는 것입니다. 보셨다는 그 책은 정석이 아니라 대규모를 위한 표준절약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석은 헝겁갑옷 + 링(혹은 체인) + 철판 의 순서로 덮어씁니다.
재료가 줄어든 것은 여러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일겁니다. 무게의 문제, 재료의 문제, 효율(?)문제 등등..
그 철판만을 따로 입는게 아니라 겹쳐 입는다는 것입니다. 보셨다는 그 책은 정석이 아니라 대규모를 위한 표준절약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석은 헝겁갑옷 + 링(혹은 체인) + 철판 의 순서로 덮어씁니다.
재료가 줄어든 것은 여러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일겁니다. 무게의 문제, 재료의 문제, 효율(?)문제 등등..
전장 배치도입니다.
이차카와 사다하루의 The History of Warries 에서 발췌.
크레시 전투
http://www.sfwar.com/zboard/icon/member_image_box/3875/i007-1.GIF
푸아티에 전투
http://www.sfwar.com/zboard/icon/member_image_box/3875/i007-2.GIF
이차카와 사다하루의 The History of Warries 에서 발췌.
크레시 전투
http://www.sfwar.com/zboard/icon/member_image_box/3875/i007-1.GIF
푸아티에 전투
http://www.sfwar.com/zboard/icon/member_image_box/3875/i007-2.GIF
갑옷 입는 순서에 대해 오해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갑옷이 플레이트메일에서 풀플레이트메일로 변천하였는데요.
플레이트메일은 말씀하시는 대로 체인메일 위에 플레이트를 약간 걸칩니다.
풀플레이트메일은 철판만으로도 충분히 부위를 가릴정도로 발전하여 안에 체인메일은 걸치지 않습니다.
저 시대 때는 풀플레이트의 시기이기에 안에 체인메일은 걸치지 않습니다.
갑옷이 플레이트메일에서 풀플레이트메일로 변천하였는데요.
플레이트메일은 말씀하시는 대로 체인메일 위에 플레이트를 약간 걸칩니다.
풀플레이트메일은 철판만으로도 충분히 부위를 가릴정도로 발전하여 안에 체인메일은 걸치지 않습니다.
저 시대 때는 풀플레이트의 시기이기에 안에 체인메일은 걸치지 않습니다.
크레시 전투는 당시 기사들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머리나쁜가를 보여주느 전적인 사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