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시 전투(1346), 칼레 전투(1349),  푸아티에 전투(1356)를 모두 승리로 이끈 흑태자 에드워드.

이 양반은 창세기전의 흑태자의 모태가 되기도 했죠.

(다만 창세기전에서 사용한게 왜 그리스 홉라이트 대 홉라이트 때 가장 효율적인 사선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양반 하면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잉글랜드 롱보우!! 죠.

하지만 실제로는 롱보우가 풀플레이트를 제대로 뚫지 못했답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철의 질 차이 였습니다.

프랑스의 기사들은 막 제련법이 알려진 강철로 만들어진 풀플레이트를 사용했고 프랑스 귀족들이 경멸하며

부른 '농투성이'들인 영국 롱보우맨들의 화살 촉은 흔히 사용되던 주철이였습니다.

국가에서 화살촉을 비싼 강철로 일괄적으로 지급하였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는 국가 재정 (정확히는 자신 영지 자산이겠지만;; ) 파탄나서 약탈로 충당할려고

프랑스로 건너간 것이였기에 그런데까지 돈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농투성이들이 짐승 사냥하던 그 화살촉을 가지고 약탈하러 뛰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중세 때 약탈은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기회가 된다면 시도했습니다. 명분만 있으면 합법적인 것 이었습니다.;

어느 영주가 이웃 영주를 대장장이 닮았다고 했다가 전쟁나서 한쪽은 쫄딱 망했다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중세 초 기사 출신 음유시인은 약탈에 대해서 찬미하는 시까지 지었으니 말다했죠.

뭐 자신과 영지를 검 하나로 지켜내야 하는 마당에 이웃 영주의 도발에 응대 못하면 쪽박차는 세상이라서

어쩔 수 없기도 했겠습니다만.;)

이 주철 화살촉으론 강철 풀플레이트를 뚫을 순 없었지만 대신 뚫을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말이죠. 달리는 말이 죽어 낙마하여 땅에 내동댕이 쳐질 때 견뎌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하지만 이런 것보다 프랑스군 지휘에 더 큰 문제점 있었습니다.

크레시 전투 때는 흑태자 에드워드는 기병 돌격을 막기 위래 크레시 마을의 산등성이에 진을 쳤습니다.

산등성이 중앙 부근에는 경작을 위해 만들어진 3단 언덕이 있어 적 기병의 돌파를 막을 수 있었거든요.

게다가 서쪽을 등지고 있어서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채 진격하게 만들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쪽에는 운없는 이야기지만 비까지 내려서 프랑스 정찰병이 영국군을 찾지못해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발견한 것은 비가 멈춘 후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였습니다. 근데 솔직히 방어하고 시간을 끌면서 협상을

벌였다면 프랑스 군에 유리한 상황으로 협상을 종결짓고 전쟁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영국군 보다

3배나 많은 병력을 가진 프랑스는 수를 믿고 기사들을 산등성이로 돌격시킵니다.

비에 젖은 땅에 경작지 3단짜리 더해진  산등성이로 돌격하지만 아무리 말이라 하더라도 저건 좀 무리한 것

이죠; 기동력 잃고 말은 장궁맞아 넘어가고 기사도 같이 넘어지고 마지막으로 햇빛 덕택에 적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도 없었죠. 어쩌다 소수 올라가는데 성공한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서 기다리고 있던 영국 기사들

에게 쓰러지게 됩니다. 기사들의 15차례 돌격이 끝나고 프랑스는 패배하게 되죠.

푸아티에 전투 때는 크레시 전투 때를 교훈삼아 약간의 기사만을 남기고 기사들을 말에서 내려 돌격하게

합니다.

물론 그 교훈이란 영국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전투했기에 진 것이란거죠.;;
  
지형도 안보고 무리하게 돌격한 건 전혀 안중에도 없는 프랑스 귀족분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흑태자 에드워드 자리 잘 잡았습니다. 전리품 가지고 튈려다 뒷덜미 잡힌 흑태자였지만

협상하는 척 시간 끌면서 포도밭으로 자리 잡습니다. 경사가 진 전면을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오른쪽은 마차로

막고 왼쪽은 개울이 있었습니다. 전면 울타리 사이사이에 통과 가능한 샛길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좋은 목표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선두는 말을 탄 기사들의 돌격 이였지만 격퇴 당했습니다.

두번째는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였지만 거기까지 돌격하느라 진 빠져서 영국군에 상당한 피해를 주긴 했지만

격퇴당합니다.

세번째는 두번째 공격 실패한 것보고 부대 데리고 Orleans 공작님 도망합니다.;;

네번째 확실하게 붙었고 영국군을 패주 시킬뻔 했습니다만 배후에서 공격 들어오는 영국 기병대의 공격에

영국군의 매복이 있는 것으로 오인해 militia ( 아마도 각 영지에 징집한 농민병일 것입니다. ) 들이 도망가게

되었는데 이들의 도주가 전군으로 확대되어 결국 프랑스군은 전군이 도망가게 됩니다.

프랑스왕 john과 그 휘하 기사들은 끝까지 싸웠지만 흑태자의 포로로 잡히고 푸아티에 전투는 끝납니다.

만약, 프랑스 쪽 지휘관들이 좀더 지형을 보고 전장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영국의 장궁 신화

는 존재치 않았을 지도 모르겠군요 ;;

p.s 이건 카더라 이야기이긴 한데 크레시 전투 때 실제 프랑스군 사망자 다수의 사인은 압사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믿거나 말거나겠죠;  

글쎄여..지금은 복학준비중인 알바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