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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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시대에 느릿느릿한 수중전은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파이락시스가 <엑스컴 2>를 발표하자, 수많은 유저들이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고, 일부는 이렇게 물었죠. "아니, 왜 크툴루가 안 나와요?" 하긴 그렇게 물어보는 것도 당연합니다. <에너미 언노운>은 <UFO 디펜스>와 흡사하죠. 당연히 유저들은 속편이 <테러 프롬 더 딥>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온 속편은 <에너미 언노운>처럼 지상전 위주입니다. 비록 지구방위대에서 지구 레지스탕스로 바뀌었지만, 잠수복도 안 입고, 물 속으로 안 내려가고, 커다란 두족류 괴물이랑 싸우지 않습니다. 덕분에 많은 유저들이 왜 수중전을 치르지 않는지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파이락시스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왜 <테러 프롬 더 딥>을 계승하지 않는지 그저 추측만 난무하죠. 물론 대체 역사를 만드는 게 흥미로워서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1편의 철인 난이도를 돌파한 사람은 얼마 없다고 하고, 레지스탕스 플레이도 꽤 로망이니까요.
하지만 좀 더 다른 이유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수중전을 연출하려면, 그만큼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수중은 지상과 다릅니다.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물리 법칙이 달라집니다. 우사인 볼트가 아무리 총알 인간이라도 물 속에서 똑같은 속도를 낼 수야 없습니다. 저항력 때문에 물 속에서 사람의 움직임은 둔해집니다. 우아하게 헤엄칠 수는 있지만, 빠르고 격렬한 동작은 불가능하죠. 물 속에서 그렇게 움직이려면, 유선형 몸과 삼각형 지느러미와 초승달 꼬리와 매끄러운 피부가 필요합니다. 인간 형태로 물 속에서 날렵하게 이동하기란 힘듭니다. 이런 물리 현상은 게임 속 환경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만약 엑스컴 대원들이 수중 전투를 치른다면, 그들은 모두 느릿느릿 움직일 겁니다. 필름을 느리게 돌리듯 천천히 걸어가고, 조준하고, 엄폐하겠죠. 문제는 <에너미 언노운>이 경쾌한 연출을 중시하는 게임이라는 겁니다. 유저가 이동 장소를 클릭하면, 엑스컴 대원들은 재빨리 뛰어가죠.
만약 배경이 수중이라면, <에너미 언노운>처럼 후다닥 뛰어가는 연출은 불가능합니다. 달리는 건 고사하고, 바다 밑바닥을 서서히 걸어야 합니다. 공기 거품을 부글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1편과 분위기가 너무 달라지겠죠. 1편은 가볍고 경쾌하고 빨랐는데, 2편은 느리고 무겁고 둔하게 보일 겁니다. 이런 분위기 차이 때문에 1편으로 유입된 유저들은 적응하기 힘들 겁니다. 요즘에 누가 느리고 둔한 연출을 보고 싶겠어요. 다들 화끈하고 격렬한 걸 좋아하죠. 고전 1, 2편에서는 이게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전 1, 2편에서는 대원들이 전부 걸어다녔거든요. 그때는 그래픽이라든가 동영상 연출이 그리 대단하지 않은 시절이었죠. 그래서 도트가 팍팍 튀는 엑스컴 대원이 딱딱한 동작으로 움직여도 하등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단 <엑스컴>만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1990년대 후반까지의 게임에서는 걷는 캐릭터가 많았습니다. 요즘에야 걷는 캐릭터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자연스러웠습니다. (요즘에 걸어다니는 롤플레잉 캐릭터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네요.)
즉, 배경이 수중이면, 캐릭터가 뛰지 못하고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라이트한 분위기를 중시하는 시대에서는 걷는 캐릭터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1990년대 중반이라면 모를까, 2016년에는 어림 없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파이락시스가 <테러 프롬 더 딥>을 포기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수중전의 느릿느릿한 연출을 피하기 위해서, 지상전의 빠르고 격렬한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근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캐릭터 움직임이 느릿느릿한 게임은 그리 인기를 끌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그건 누구나 동의할 겁니다. 일례로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에서는 우주 해병대의 이동 애니메이션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우주 해병대는 터미네이터 갑옷을 입었는데, 본래 터미네이터 갑옷은 굉장히 무겁습니다. 당연히 천천히 걸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가 천천히 걷느라 시간 낭비하고 싶은 유저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동 애니메이션을 빠르게 조절할 수 있고, 유저들은 대개 빠르거나 중간 속도로 조절합니다.
음산한 수중 전투를 선호하는 유저에게 <엑스컴 2> 소식은 좀 아쉽습니다. 하지만 수중 전투가 대중적이냐 하면, 그건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정신적 계승작이라도 나왔으면 좋겠지만, 이걸 누가 만들지 모르겠네요.
격렬하게 만들지 못하는 연출 문제 보다는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드는 시각화의 문제가 더 클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닷속은 데이터가 적은 만큼 자료도 적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게 바다 라는 느낌을 잡기도 애매하죠. 쉽게 말해 A를 설명하려 하는 사람도 A에 대해서 잘 모르고, 듣는 사람은 A에 대해서 더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리니, 더더욱 시각화 하기가 어렵다 이거죠.
비슷한 예로, 지상을 배경으로 한 게임과 바닷속이나 우주를 배경으로 한 게임의 숫자를 잘 살펴봅시다. 어떤쪽으로 극단적으로 모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