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하고 화끈한 액션, 정교한 시간여행, 새로운 가족애…. 사람들이 흔히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떠올리는 테마입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왔고, 암살 기계가 그 뒤를 쫓고, 강인한 어머니가 아들을 지키는 내용이니까요. 다만,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관통하는, 보다 근본적인 주제가 바닥에 깔렸습니다. 바로 인류의 종말입니다. 스카이넷이 시간여행을 선택한 이유도, 암살 기계가 특정 인물을 죽이려는 계획도, 주인공들이 한사코 누군가를 지키려는 의도도 종말 때문입니다. 스카이넷은 인류를 끝장내려고 하고, 인류는 어떻게든 그걸 저지하죠. 그나마 희대의 지도자를 만나 인류가 기계를 이겼지만, 그렇다고 서광이 한껏 비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중 분위기는 상당히 어둡고 침울합니다. 미래에서 이겼지만, 현재에서 마지막 싸움이 벌어지고, 이번 싸움에서 진다면 모든 전쟁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이긴다고 하더라도 기계가 인류를 몰살하는 과정 자체는 변함이 없죠. 어차피 핵전쟁은 1997년에 터집니다.


이런 암울함을 반영하기 때문인지 1편은 공포물에 가깝습니다. 2편이 워낙 대박을 쳤기 때문에 1편도 액션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허나 이 영화의 갈등 양상은 불사의 괴물이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편에 가깝습니다. 터미네이터는 멈추거나, 죽이거나, 설득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목표가 눈 앞에 나타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치하려고 덤벼듭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잠깐 앞길을 막아섰다가 피범벅이 되는 것뿐입니다. 작중에서 터미네이터를 막으려고 수많은 경찰들이 덤볐지만, 제대로 된 피해조차 입히지 못했습니다. 터미네이터와 얽히는 인물은 어떻게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나마 카일 리즈가 간신히 대등한 싸움을 펼치지만, 사실 싸웠다는 표현보다 처절하게 저항했다는 말이 옳을 겁니다. 살아날 구멍을 뚫으려고 무진장 안간힘을 썼죠. 게다가 카일조차 터미네이터를 끝내 부수지 못했습니다. 이런 구도는 외계 괴물이나 괴수가 일방적으로 인류를 때려부수는 것과 상통하죠.


그러니까 T-800의 행위는 일방적인 액션물과 다릅니다. 파괴를 통해 쾌감을 얻는 게 아니라 학살을 이용해 두려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고지라가 도쿄를 불바다로 만드는 거랑 다름이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고지라를 보며 느끼는 불안과 절망처럼요. 물론 고지라도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액션물로 변하기에 저런 불안과 절망, 공포는 사라집니다만. 어쨌든 시리즈 1편은 인류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감성을 부각합니다. 분위기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인류가 얼마나 급박한 상황에 처했는지 보여줍니다. 주요 시간대가 현재(1984년)라서 미래 모습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카일의 꿈이나 진술로 어떤 지경인지 계속 환기시킵니다. 기계가 인류를 거진 쓸어버리고, 도시는 잿더미로 변하고, 헌터 킬러들이 돌아다니고, 인간은 한낱 노예로 전락합니다.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근근이 목숨을 연명하며, 밤에만 몰래 돌아다닙니다. 저항군 은신처조차 허름하기 그지 없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은신처도 거지꼴이고, 여기에 터미네이터 하나만 난입하면….


이렇게 절망적인 미래가 다가오기에 1984년의 싸움이 중요합니다. 카일이 터미네이터를 막지 못하면, 예정된 종말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번복하거나 돌이킬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시간여행은 이제 불가능하고, 카일이 죽으면 사라를 지켜줄 그 누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줄기 희망을 놓치지 않습니다. 1편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가 이것일 겁니다. 존 코너가 (카일 리즈를 통해) 사라에게 말하죠. 암울한 시기에 희망을 줘서 고맙고, 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라고. 인류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앞날이 바뀔 수 있다고. 그러니 힘을 내서 살아가라고 말하죠. 그리고 이 대사는 2편에서도 비슷하게 반복합니다. 사라 코너는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죠. 비록 미래가 어찌 되었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암울한 종말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활약이 <더 터미네이터>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폭풍이 몰려온다는 대사, 그리고 먹구름으로 향하는 사라 코너의 모습이 마지막 장면인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절망적인 연출은 다소 느슨해졌지만, 2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군이 든든한 첨단 기계라서 액션물로 변했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주제는 이어집니다. 사라 코너가 강인한 어머니로 나오고, T-800이 존과 유사 부자 사이라서 가족물이 핵심 주제라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1편에서 카일과 사라는 부부의 인연을 맺고, 미래의 아들과 과거의 어머니가 상통하기도 하니까요. 당연히 가족의 화합이라는 메시지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앞선 주제는 역시 종말일 겁니다. 괜히 부제가 <심판의 날>이겠어요. 2편에서는 1편보다 규모를 키워 아예 초장부터 미래 전쟁의 묵시록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인류가 한꺼번에 죽었다는 해설, 두개골을 짓밟는 T-800, 브래드 피델의 감성적인 음악과 모든 게 불타는 광경까지…. 작중에서도 끊임없이 사라는 핵전쟁 악몽에 시달리고, 인류에게 파괴적인 속성이 잠재했다며 고찰합니다. (이 고찰을 보조하는 주체가 암살 기계인 T-800이라는 것도 골 때립니다.) 비록 속편이라서 액션의 비중이 커지고 스케일도 늘었지만, 묵시록의 인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여행이란 주제 역시 종말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시간여행물로서의 재미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시간 패러독스를 훌륭히 활용했고, 현재와 미래를 오가는 중요한 분기도 갈리니까요. 2편에서 존이 터미네이터를 확인하고 놀라는 장면이나, 사라 코너가 T-800의 기시감에 질려 뒤로 나자빠지는 장면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특히, 1편에서 사라의 사진은 현재가 곧 미래로 이어진다는 상징이죠. 현대에 만들 수 없는 첨단 기계들끼리 싸운다는 것부터 시간여행이 아니면 불가능한 설정이고요. 이렇듯 시간여행물로서 자잘한 재미를 충분히 갖추었습니다. 다만, 시간개입 자체는 비중이 적은 편입니다. 작중에서 주로 나오는 배경은 현대이며, 과거의 영향으로 미래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죠. 시간여행자들이 과거로만 일반통행할 뿐입니다. 서로 다른 시간대가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대에서 어떻게 종말에 대처하는지 강조합니다. 미래가 변했으리라 희망을 품을 뿐,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3, 4편이 좋은 소리를 못 듣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암울한 묵시록 분위기를 상당히 희석했기 때문이죠. 3편은 어디로 보나, 그저 그런 액션물일 뿐입니다. 설정 자체야 인류가 파멸한다는 식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결말만 그렇게 처리하면 뭐 하나요. 2편도 액션 위주였으나, 기저에는 종말을 향한 두려움을 담았습니다. 인간은 파괴적인 성향이고, 스카이넷을 막든 핵전쟁을 막든 결국 폭력으로 멸망할 거라고 고민하죠. 사이버다인을 없애도 이런 고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막판에 한줄기 서광이 비치긴 합니다. 터미네이터가 생명의 가치를 깨달았으니, 우리 인류에게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죠. 안타깝게도 3편에는 이런 고뇌나 갈등이 없습니다. 종말에 대비하려고 바쁘게 싸우지만, 어째서 그런 문제가 생겼는지,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파고들지 않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들입다 총만 쏴대는 것 같습니다. 전작의 카일 리즈나 사라 코너처럼 참상을 회의하는 인물이 없다는 것도 단점이죠. 3편의 존 코너는 그저 징징대기만 할 뿐이니.


4편은 아예 난장판이 된 미래를 보여줍니다. 드디어 현대를 벗어나 미래로 시간대를 옮겼습니다. 겉보기에는 폐허와 사냥 로봇, 꾀죄죄한 생존자들, 은밀한 저항군 등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분위기를 한껏 꾸몄습니다. 문제는 그런 설정이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그친다는 겁니다. 존 코너를 포함한 저항군들은 당장 현실을 벗어날 해결책만 생각합니다. 스카이넷을 무너뜨리고 승리할 방법만 찾기 바쁩니다. 어쩌다 인류가 이 지경에 처했는지 반성하지 않고,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방법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3편처럼 종말을 다루긴 하지만,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고 해야 하나요. 게다가 작중 시기는 저항군이 어느 정도 스카이넷과 그래도 싸움이 붙는 시점이죠. 덕분에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저항한다기 보다 대놓고 맞서 싸운다는 느낌도 들어요. 무엇보다 1, 2편에서는 공포로 작용하던 터미네이터의 역할이 3, 4편에서는 단순한 악당으로 머무르는 것도 단점이죠. 1편의 공포 요소는 완전 날아가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나마 4편 막판의 T-800은 그럴 듯했지만, 대세는 이미 액션물이라.


사실 이런 문제는 비단 터미네이터 시리즈에만 생기는 건 아닙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떠들지만, 정작 멸망 문제를 뒷전이고 액션에 치중하는 창작물은 수두룩해요. 어지간한 연출력이 없으면, 무시무시한 괴물을 만드는 것도 어렵고요. 공포물로 시작했다가 액션물로 전환하는 시리즈가 얼마나 많습니까. 위에서 언급한 <고지라> 시리즈도 그렇죠. (그런 점에서 가렛 에드워즈가 <고지라>를 만든 건 얼마나 다행인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얼마 전에 개봉한 <제네시스> 때문입니다. 소감문이나 평론을 읽어보니, 묵시록 느낌을 희석하고 액션물로 변했다고 하더군요. 옛 추억을 자극하는 영화라는 평가가 자자하지만, 특유의 암울함이 사라졌다고 하니 아쉽습니다. 심지어 개그 장면도 많다고…. 아니,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개그라니. 물론 정당한 평가를 내리려면 직접 영화를 관람해야 하겠지만, 평론을 읽어보면 어떤 분위기일지 다소 뻔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