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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술 게임을 롤플레잉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요.]


CRPG 북 프로젝트라는 게 있습니다. 게임 제작자, 기자, 유저 등이 합심해서 300개가 넘는 게임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이름답게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이 주로 나옵니다. <위저드리>, <마이트 앤 매직>, <울티마>, <바드 테일>, <발더스 게이트>, <엘더 스크롤> 등등 알만한 게임들은 거진 포함했습니다. 거기다 소수만이 열광하는 동인 게임까지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롤플레잉을 좋아하는 유저에게 정말 반가운 책일 듯합니다. 현재 알파 빌드가 나와서 조금 읽어봤는데, 목록에 조금 낯선 이름이 끼어 있습니다. 바로 <엑스컴: UFO 디펜스>와 <재기드 얼라이언스 2>가 당당하게 들어있거든요. 이것들은 다른 게임들과 비교하면 모양새가 전혀 다릅니다. 롤플레잉이 아니라 턴 방식 전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게임들은 모험가들이 파티를 이뤄서 던전과 야외를 탐사합니다. 몬스터를 잡고 보물을 얻는 내용이죠. 저들 두 게임은 기지에서 병력을 운영하고, 기술과 병기를 연구하고, 전장으로 부대를 급파해서 싸우죠.


그럼에도 두 전술 게임을 롤플레잉 책에서 소개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캐릭터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롤플레잉과 통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엑스컴>은 신병을 뽑아 정예병으로 키우는 과정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병사라고 해서 바둑돌처럼 모두 똑같은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능력치가 다르고, 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싸웠는가에 따라 해당 특기가 올라가고, 계급까지 상승하죠. 고참 대원 없이 후반부의 강력한 외계인을 상대하다가는 탈탈 털리고 맙니다. 이런 성장 개념은 리메이크에도 이어지는데, <에너미 언노운>도 경험치를 쌓고 계급이 올라가며, 그때마다 새로운 기술까지 부여합니다. 또한 전장에서 외계인을 생포하거나 무기를 수집해 더 나은 병기도 만들 수 있죠. 이는 롤플레잉 게임의 모험가들이 몬스터와 싸워 경험을 쌓고 레벨 올리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모험가들도 레벨이 올라갈수록 능력치가 상승하고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죠. 장비 개발은 던전에서 신비한 무구를 얻고, 마을로 돌아와 확인하는 것과 닮았고요.


<재기드 얼라이언스 2>는 용병을 모아 독재 국가를 해방시키는 줄거리입니다. 여러 용병을 운영하는데, <UFO 디펜스>처럼 이들도 성장합니다. 전장으로 출동하고, 경험을 쌓으면 능력치가 올라가고, 더 강한 적들과 싸우는 등등 <엑스컴>과 비슷한 면이 많죠. 신입 용병을 고용해 갖가지 훈련을 시키고, 숱한 전장에서 죽도록 구르다가 마침내 고참이 되는 결말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합니다. 장비 역시 중요해서 전장에서 비싼 총기를 운 좋게 얻는가 하면, 적당한 총기를 찾아 상점을 누비고 다녀야 합니다. 모험가에게 어떤 무기와 갑옷을 장비할지 고민하는 것처럼요. 또한 용병들은 엑스컴 대원보다 한층 인간적인데, 제각기 성격과 대사가 있습니다. 서로 좋아해서 죽이 잘 맞는 친구들도 있고, 대놓고 으르렁거리는 원수지간도 있습니다. 저런 대사가 재미있어서 능력치가 다소 안 좋음에도 고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롤플레잉 유저가 자기 캐릭터들을 소중히 다루듯 <엑스컴>과 <재기드 얼라이언스 2>의 유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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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플레잉 게임에서 전술 게임으로 파생한 사례입니다.]


사실 <재기드 얼라이언스 2>는 택티컬 롤플레잉이라는 말도 듣습니다. 각종 NPC와 퀘스트 시스템까지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모험을 하는 게 아니라 용병 집단을 운영하지만, 플레이 방식과 분위기는 롤플레잉을 빼닮았다는 뜻이죠. <UFO 디펜스>는 비록 NPC가 없지만, 각종 임무와 무작위 전장은 전술적인 로그라이크 느낌이고요. 따라서 두 게임이 롤플레잉 관련 책자에 들어간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겠죠. 그렇다고 성장 요소가 들어가면 무조건 롤플레잉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문명>이나 <적색경보>도 병사들이 싸워서 경험치를 얻고 승급합니다. 하지만 이들 게임을 택티컬 롤플레잉이라고 부르지 않죠. 관건은 캐릭터의 비중입니다. <문명>과 <적색경보>에 나오는 병사는 그냥 소모품일 뿐입니다. 승급을 많이 한 병사가 죽었다고 해서 게임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애초에 모습도 똑같고, 이름조차 없습니다. 반면, <UFO 디펜스>의 병사는 형식적이나마 이름이 있고 생김새도 다르며 성별과 인종 구분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문명>이나 <적색경보>는 경험치와 성장은 있으나, 캐릭터가 아니라 모두 똑같은 유닛에 불과합니다. 유닛에게 성격을 부여하지 않아요. <에너미 언노운>에서는 전작을 계승해서 대원 조합 기능까지 추가했죠. 유저가 애정을 붙이도록 자기 마음에 드는 갑옷, 얼굴, 별명, 모습, 색깔 등을 조합할 수 있습니다. <재기드 얼라이언스 2>의 용병들은 이미 말했다시피 뚜렷한 개성이 있습니다. 어떤 용병은 지적이고, 어떤 용병은 무식합니다. 고용주(유저)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다른 용병들 험담도 합니다. 서로 친근하게 지내기도 하고, 당연히 성별과 생김새도 저마다 다르죠. 애써 정예병으로 승급시킨 대원이나 용병이 죽으면 그 손실은 뼈아픕니다. 그럴 때면, 눈물을 머금고 저장한 게임을 불러와야 합니다. <에너미 언노운>은 아예 추모실까지 마련했죠. 뿐만 아니라 유저가 전술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단순히 용병들의 대화를 보고 싶어서 선택하기도 합니다. 롤플레잉 유저가 게임에서 제일 처음 하는 일이 캐릭터 제작임을 생각하면, 이건 엄청난 차이죠.


따지고 보면, 전술 게임과 롤플레잉 게임의 관계는 초기부터 상호 관계가 뚜렷했습니다. 본격적인 최초의 롤플레잉 게임이 <던전스 앤 드래곤스>입니다. 그런데 <디앤디>는 <체인메일>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합니다. 중세 전쟁물인데, 병사들이 땅굴을 파고 잠입해서 싸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던전탐사를 떠올렸고,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모험가 캐릭터를 만들었죠. 경험치와 레벨 개념을 도입하고, 유저가 직접 역할에 몰입하도록 설정했습니다. 최초의 롤플레잉 게임이 전술 게임에서 파생했으니, 서로 조합하거나 역으로 파생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디앤디>는 나중에 미니어처 전쟁물도 나왔죠. 롤플레잉 게임에 나왔던 다양한 종족과 괴물을 이용할 수 있어요. 소규모 던전탐사에서 대규모 지상전으로 커졌다고 할까요. 전쟁물에서 파생한 롤플레잉 게임이 다시 전쟁물을 낳았으니, 서로의 상관 관계를 알 수 있죠. 미니어처 전쟁물의 대표인 <워해머 40K> 역시 롤플레잉 버전이 있습니다. 부대 단위의 전쟁에서 모험이나 임무 수행으로 줄거리가 바뀌죠. 각 종족 유닛을 캐릭터로 체험할 수 있으며, 원판이 그렇듯 화끈한 전투를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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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게임에게 큰 영향을 받은 롤플레잉 게임의 경우입니다.]


테이블 게임만 이런 건 아닙니다. 컴퓨터 게임 중에도 전략과 롤플레잉이 서로 영향을 끼치는 예시가 있죠. <폴아웃 택틱스>가 그런 경우입니다. 본래 <폴아웃> 1, 2편은 주인공이 홀로 멸망한 세상을 떠도는 모험물입니다. <폴아웃 택틱스>는 주인공 혼자가 아니라 6명의 분대가 등장하고, 모험보다 특정 지역의 임무 수행으로 진행 방식을 바꿨습니다. 아쉽게도 이런 전환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폴아웃 택틱스>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원판인 <폴아웃>은 드넓은 지역과 수많은 캐릭터, 다양한 사건들이 널렸습니다. 하지만 <폴아웃 택틱스>는 분대 전술을 도입하면서 오히려 분량이 줄어들었습니다. 전투 자체가 <재기드 얼라이언스 2>마냥 세세한 것도 아니니, 유저들이 실망한 것도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 게임성이 아주 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에너미 언노운>이 선보인 엄폐 방식은 나중에 <웨이스트랜드 2>와 <쉐도우런> 같은 롤플레잉에서 본받았죠. 엄폐물에 숨고, 그 상태로 서로 싸우는 방식이 똑같습니다. 이것도 전술과 롤플레잉의 관계를 나타내는 사례겠죠.


물론 전술과 롤플레잉의 비율을 어떻게 구분할지 절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엑스컴>과 <재기드 얼라이언스 2>는 전술 게임이지, 롤플레잉이랑 하등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유저도 있을 겁니다. <웨이스트랜드 2>와 <쉐도우런>이 그저 롤플레잉일 뿐, <폴아웃 택틱스> 같은 전술과 연관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아이스윈드 데일>은 전투 위주인데, 이걸 택티컬 롤플레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발더스 게이트>는 그냥 RPG일까요. 대답하기 애매한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탐험보다 전투가 중점이면 택티컬 롤플레잉이라고 생각합니다. 본거지에서 대원이나 장비를 얻고, 대열과 위치 선정이 중요하고, 임무나 퀘스트를 전투 위주로 해결하면, 택티컬에 속합니다. 그러니 <발더스 게이트>와 <웨이스트랜드 2>는 탐험이고, <아이스윈드 데일>과 <폴아웃 택틱스>는 전술이죠. 말빨로 퀘스트를 해결하는 부류를 전술 게임으로 분류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제 생각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니고, 다르게 생각하는 유저도 있겠죠.


전술과 롤플레잉 이외에도 게임 장르가 바뀌는 사례는 더러 있습니다. <레니게이드>처럼 전략이 슈팅으로 바뀌거나, <스페이스 마린>처럼 전술이 액션으로 바뀔 수도 있죠. 반대로 <헤일로 워즈>처럼 슈팅이었다가 전략이 될 수도 있고요. <듄>처럼 어드벤처가 전략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슈팅이나 액션, 어드벤처는 전술과 접점이 별로 없습니다. 플레이 방식이 확연히 다르니까요. 반면, 전술과 롤플레잉은 서로 다를지언정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수의 아군 유닛을 조종해 상대 병력을 격파한다는 근본은 동일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롤플레잉 자체가 전술 게임에서 파생했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다수의 아군 유닛을 조종하기 위한 방식도 전술과 롤플레잉에서 발달했습니다. 턴 방식이나 실시간 정지는 다른 장르에서 거의 쓰지 않는 기법입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면, 전술과 롤플레잉 게임은 턴 방식, 실시간 정지, 실시간 중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유저 혼자서 다수 캐릭터를 한꺼번에 적용하는 게 어려우니, 상당히 중요한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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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게임인 건 분명한데, 이걸 롤플레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서구(미국) 게임을 주로 이야기했는데, 일본 게임들도 상당수입니다. 이른바 SRPG, 그러니까 시뮬레이션 롤플레잉이라고 부르죠. 일본 게임계가 시뮬레이션이란 용어를 좀 남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택틱스 오우거>라든가 <파이어 엠블렘>, <슈퍼 로봇 대전>, <랑그릿샤>, <샤이닝 포스>, <파랜드>, <파워돌> 등이 있네요. 다만, 서구의 택티컬 롤플레잉과 일본의 시뮬레이션 롤플레잉은 시스템이나 분위기, 설정 등이 매우 다릅니다. 마치 JRPG를 독자적인 장르로 분류하는 것처럼요. 의외로 서구에서 택티컬 롤플레잉은 그리 인기 높은 장르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아직도 유저들이 <엑스컴>과 <재기드 얼라이언스>의 모드와 정신적 후계작에 매달리겠어요. 게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택티컬 롤플레잉은 그리 많지 않고, 유명작도 별로 없습니다. <사일런트 스톰>이나 <신디케이트> 정도가 알려졌을 따름이에요. <쉐도우 워치>라든가 <솔져 오브 아나키> 같은 게임도 있지만, 대박 흥행작이라고 하기 힘들죠.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입니다.


택티컬 롤플레잉의 인기가 낮은 이유는 시스템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상당히 매니악하고 어려우니 초보자가 손대기 쉽지 않고, 입문하기 어렵죠. 잘못 쏜 총탄에 아군이 쓰러지거나, 산탄총 조준을 엉터리로 했다가 분대원들 피가 줄줄이 깎이거나, 전장에 진입하자마자 폭탄이 날아오는가 하면, 95% 명중률을 믿고 쏜 마지막 한방이 빗나가서 오히려 얻어터지거나…. 거기다 진행이 신나고 통쾌한 것도 아닙니다.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니, 포복으로 대기하고, 슬금슬금 정찰하고, 항상 엄폐물과 사각을 고려해야 합니다. 진행이 빠른 게임도 있지만, 그건 그거대로 손이 바빠서 어렵죠. 더군다나 화면 밖에서 저격수가 쏜 총알에 맞아 죽을 때는 마우스 집어던지고 싶죠. 아니, 이건 누가 죽이는지는 최소한 보여줘야…. 텍스처나 그림체 역시 살벌한 전장 상황에 걸맞게 사실적이고 쇳덩이 냄새가 풍깁니다. SRPG의 아기자기한 모양새와 거리가 멀어요. 이러니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신규 유저가 섣불리 손댈 수 없는 구조입니다.


모험물 롤플레잉은 검마 판타지가 많은데, 택티컬 롤플레잉은 테크노 스릴러 위주인 것도 차이점이죠. 위에서 언급한 게임들만 따져도 그렇습니다. 서구 제작사가 PC 위주로 만든 게임들을 한 번 찾아봤는데, 판타지보다 우주전쟁, 사이버펑크,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훨씬 많더라고요. 현대나 근미래 테크노스릴러도 많고요. 이거야 이름 그대로 '택티컬한' 방식을 추구하니, 자연스레 20세기나 근미래 전장을 소재로 삼겠죠. 뭔가 특수부대가 떠오르는 단어잖아요. 하지만 대중에게 어필하기에는 테크노 스릴러보다 검마 판타지가 훨씬 나을 겁니다. 가뜩이나 전술이라는 단어도 골치 아파 보이는데, 고폭탄, 철갑탄, 관통탄 따지면 골치가 더 아플 테니까요. 일반 유저에게는 강화복 입은 군인보다 활을 든 엘프 아가씨가 더 그럴 듯하지 않겠습니까. 강화복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아리따운 엘프는 다들 알잖아요. 그렇다고 검마 판타지가 소재인 택티컬 롤플레잉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굳이 비중을 가리자면, SF나 테크노 스릴러가 더 많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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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티컬 롤플레잉은 어려워서 그런지 대중적 인지도가 낮습니다.]


과연 택티컬 롤플레잉이 어떻게 명맥을 이어갈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엑스컴>과 <재기드 얼라이언스>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할지…. 요즘에는 쉽고 가벼운 게 대세니까요. 솔직히 저 두 개 게임에만 매달리는 것도 좋은 현상은 아니죠. 하긴 따지고 보면, 친척 관계인 턴 방식 전략도 그리 인기가 많다고 할 수는 없겠네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매니악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그래도 리메이크나 킥스타터 등으로 꾸준히 나오니까 다행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