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을 그저 싯귀로만 생각하곤 했었지만...

2014년의 봄은 대한민국 사람에게 너무나도 잔인했고,
또한 너무나도 괴로운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잔인하고 길고 길었던 봄이 가고, 어느새 폭염의 여름이 왔습니다.

아직도 그 봄의 괴로움은 끝나지 않았고,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어느새 여름이 오면서 차츰 잊혀지고 있고, 벌써부터 월드컵을 이야기하며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글쎄요... 저희 가족은 세월호 사고 후 애도하는 의미에서, 봄 시즌 내내 극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아주 기대했었던 스파이더맨 2편도 고질라 리메이크도 모두 얌전히 패스했더랬죠.
그 대신 주말이면 되도록 가족과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죠 - 저는 본래 마음 속 깊이 무신론에 가깝지만,

교회든 성당이든 절이든 어디든 간에 하여간 간절히 빌어보기라도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심지어 양심에 찔려서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을 가진 책들은 아예 버려두고 읽지 않으려 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들고 다닌 책은 지난 20 년 동안 뭔 얘기인지 몰랐던 칸트와 쇼펜하우어였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와 그 사건 관계자를 과연 그 징벌론자 칸트라면 어떻게 응징하자고 말할 지 궁금하기도 했고,
쇼펜하우어라면 이 파탄적인 마음과 괴로움을 어떻게 강한 의지와 수양으로 이겨내도록 말해줄 지 궁금했습니다.

무언가 이성적으로 그 사건을 살피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냉철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줄 촉매가 필요했습니다. 
그 결과 칸트와 쇼펜하우어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고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생각을 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마도 칸트라면 선장은 당연히 사형, 관련된 선원들도 대부분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을 선고했을 것 같습니다.
- 칸트는 무시무시한 징벌론자인데, 죄를 지었다면 그 죄값을 100% 지불해야 사회가 바로 선다고 봤거든요.
쇼펜하우어는 외부의 괴로움도 슬픔도 노여움도 헛된 것이니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뚜렷한 주관과 강력한 자아를 가져야만이  비로소 험한 세상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쇼펜하우어는 세상에 대한 관심도 개인적 욕망도 죄다 버리고 자신의 의지를 세워서 쫓으라고 하는데,

저는 처자식을 무척 사랑해서 가족을 버릴 수 없으며 의무감에서 탈출할 수 없으므로 별로 위로가 안되더군요.

            

그런데, 그랬던 봄이 가고 여름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주말에 내내 기도만 하고 있기 보다는 영화도 보고 놀러도 가고 싶다고 하고,
저도 출근길에 "이제는 SF나 장르문학을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망설이며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합니다. 
뭔 말인지도 잘 모르겠는 책을 마음수양한다고 들고서 꾸역꾸역 억지로 읽는 것에도 지쳤고,
솔직히 어느새 차츰 엔터테인먼트에 마음이 쏠리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세월호의 아픔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애도 기간을 끝내도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잊고, 또 즐기고, 월드컵을 지내면서 완전히 망각해도 괜찮을까요?
아직도 죄책감 때문에, 너무 미안해서, 마음놓고 웃고 떠들고 즐기기 어렵습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던 T. S. 엘리어트는 1차 대전 직후 유럽의 모습을 <황무지>라고 칭하며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생명이 깨어나는 봄"을 맞이하는 마음을 눈물겹게 이야기했습니다.    
"4월은 잔인한달"이라고 했던 엘리어트의 심정이 싯귀를 들은 지 거의 25년 만에 이해됩니다
- 그도 살아남은 죄책감 때문에 괴로왔던 것이죠.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새로운 계절이 옵니다 - 그런데 새로운 시절은 살아남은 사람에게만 허락될 수 밖에 없죠.
그는 새로운 시절이 시작되는 것을 죄책감 속에 맞이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그 죄책감을 곰씹어야 할 의무가 있고,
그것을 통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최상의 반성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자 다짐하며, 너무나도 잔인했던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