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했던 박완서 작가가 어제 작고했습니다.

 

TV 뉴스에서는 천편일률적으로 "중산층과 노년의 삶을 다룬 문학으로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러고 있습니다.

글쎄요... 박완서라는 작가를 소개하는 아나운서의 멘트를 듣고는 대뜸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어머니께서 박완서의 책을 거의 싸그리 다 읽다시피 하셨기 때문에 저 역시 이 작가의 책을 많이 접한 편이었지만,

TV 뉴스에서 소개되는 멘트는 박완서라는 작가를 설명하기에 조금 부족하고, 방향이 안맞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사실 박완서라는 작가는 1970년대와 1980년대가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이미 나이 60을 넘기고 가정에 불행이 닥치면서 창작력이 떨어지는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요즘 젊은 사람들의 경우 <싱아>를 제외하면 박완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죠.

또 1970년대에 쓰여진 박완서의 작품들의 경우 일부러 찾아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박완서 작가의 책은 거의 TV 드라마에 가까운 스타일과 소재를 갖고 있는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시의성이 떨어지는 작품들의 경우 지금 읽는다고 해서 크게 와 닿지도 않거든요.

또한 박완서의 작품들의 이야기는 지나칠 정도로 비관적인 경우가 많아서,

과연 요즘 독자들이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할까 싶기도 합니다.

 

박완서의 책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근본적으로 "산업화 시대의 여성문제"라고 해야 합니다.

1960년대 부터 경제 개발이 시작되어 대한민국이 산업화되고 가부장적인 사회가 개방되고 전환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스스로 일어섰는가, 어떻게 가정을 지키려고 했는가, 어떻게 짖밟히고 피해를 입곤 했는가...

대략 이러한 대목을 작품 한 편 한 편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박완서의 소설이었습니다.

중산층의 속물 의식을 풍자하거나 산업화 시대를 선도하는 가정, 뒤쳐지는 가정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것은,

현대 사회의 여성문제를 다루다 보니 '여성들의 가치관의 변화'를 따라가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죠.

 

<도시의 흉년(1977)>에서는 남편이 일제시대 징병 이후 이어지는 고초 속에 몸과 마음이 병들자

닥치는 대로 일하여 부를 축적한 아내가 연로한 시어머니와 무능한 남편 위에 올라서고 주역으로 활약합니다.

한 가정에서 여성의 권위가 그 여자가 쌓아 올린 경제력과 돈을 바탕으로 윗어른과 남편을 능가하게 되지만,

여성의 성공의 바탕이 되었던 물질에 대한 집착이 결국 가정을 파국으로 몰아 넣습니다.

막내딸이 화자 역할을 하는데, 이 막내딸은 언니의 남편인 형부에게 학교 축제에서 강간당한 적이 있고,

포목상으로 돈을 많이 번 어머니는 운전 기사와 바람이 나 있고, 아버지도 밖에 첩을 몰래 거느리고 있고,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하자 아버지는 되려 어머니를 두들겨 패서 불구로 만들어 버리고...

부유한 삶의 기반이 되는 돈은 있지만 모두가 불륜으로 서로 얽히고 섥힌 관계가 되고,

결국 그 속에서 가정은 파탄나고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게 됩니다.

오로지 막내딸만이 간신히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게 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죠.

 

<휘청거리는 오후(1978)>는 교직에서 은퇴하고 작은 기업을 경영하는 남편이 추구하는 검소한 삶과,

물질적인 소비에 사로잡힌 아내와 딸들의 가치관의 차이와 대립을 다루는 작품입니다.

1970년대에 쓰여진 작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와 닿지 않는 대목이 꽤 많이 눈에 띄는데,

"자가용 가진 남자는 멋지고, 걷는 사람 버스 타는 사람보다 매력있다"는 식의 서술과 같은 게 그렇습니다.

사실 이 대목 하나만으로도 작품을 발표하던 당시에 꽤 화제가 되었던 바 있었다고 하고,

오늘날 부유층 중매쟁이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는 "마담 뚜"라는 말을 탄생시킨 작품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맏딸은 오로지 돈만 쫓다가 애 둘 딸린 늙은 남자와 결혼하더니 외도를 통해 임신을 하고,

속도위반으로 사고를 친 다음 결혼을 한 둘째 딸은 무능한 남편 때문에 별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막내 딸은 정상적인 결혼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집안이 어찌 되든 무리한 돈을 들여 결혼하더니

부모님이나 자신의 형제들이 어떻게 살든 말든 그냥 자기는 알바 아니라는 식으로 이민을 가 버립니다.  

자식들을 대학 졸업 시키고 결혼까지 시켰는데도, 항상 자식들의 돈 이야기에 시달리는 불쌍한 아버지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는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여성의 권익을 외치면서 소비에 열을 올리고 바가지 긁는 게 특기인 아내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는 작가의 전성기 끝자락에 나온 작품으로, 여성 문제를 전면에서 다룹니다.

여기에서는 '남편과 이혼한 여인'과 '아내와 사별한 남자'가 만나 사랑을 합니다 - 본래 이 둘은 대학 동기였죠.

각자 인생살이의 아픔을 겪고 난 후 만난 이 남녀는 과거의 우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랑을 싹틔우는 듯 했지만,

여자가 임신한 직후 남자는 부모님이 주선한 돈 많은 다른 여자와의 재혼 자리가 들어오자 그 여자와 결혼해 버립니다.

홀로 된 여자는 아들을 낳고 그 사실을 남자에게 알리지만, "거짓으로 협박하지 말라"는 편지를 받고 모든 것을 포기하죠.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들이 성장해 가고, 아들이 아쉬웠던 남자 집안에서는 여자의 아들을 빼앗기 위해 소송을 겁니다.

재판 자리에서 여자가 아들 출산 사실을 알린 직후 남자가 여자에게 "거짓으로 협박하지 말라"고 보냈던 편지가 공개되고,

그 편지 한 장으로 법정에서 치욕을 당한 남자 집안이 더 이상의 재판 진행을 포기하면서 소송을 취하하게 되죠.

나름 여자의 승리로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을 잃고 불륜으로 낳은 아들 하나만 바라보면서

떳떳하지 못한 여자라는 주변의 질타어린 시선 속에 어렵게 살아가는 여자의 인생이 괴롭기만 합니다.

 

박완서를 특징짓는 또 한 가지 테마는 6.25 이야기입니다.

특히 6.25 와중에 세상을 떠난 오빠에 대한 사랑과 트라우마 때문에,

박완서의 작품 중 상당 수는 전쟁 문학, 그리고 전쟁의 상처를 다루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두 권의 연작 장편 소설은

유년 시절의 추억과 6.25 전쟁의 끔찍한 상처를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좌익 운동에 투신했다가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실망하고 망신창이가 되어 이데올로기를 저주하면서

공산당 치하의 서울에 숨어서 괴로워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작가의 오빠의 모습이 너무나도 절절하게 쓰여 있죠.

이후 <엄마의 말뚝>과 같은 작품에서도 전쟁의 상처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사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다루어집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에서는 6.25 와중에 어린 여동생을 버리고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리는 주인공을 다룹니다.

전쟁으로 인한 이산 가족의 삶을 질곡을 주제로 하고 있는 멜로 드라마라고 할 수 있죠.

 

<나목(1970)>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장편으로, 작가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입니다.

작품 제목 자체가 박수근의 그림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 소설 속 등장인물명은 다르지만요.

사실 작가가 <나목>을 쓰던 시절만 해도 박수근 화백의 전설이 구체화되기 전이었고, 

당시 박수근은 좋은 화가로 이름을 조금 알리긴 했지만 평생 가난과 싸우다가 죽은 직후였습니다.

오늘날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가로 꼽히며 한국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되고 있는 박수근 전설의 시발점은

1970년의 박수근 회고전과  박완서가 박수근 화백을 소재로 쓴 <나목>이 발표되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군 PX 매점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6.25 와중에 오빠가 죽은 것은 자기 때문이라고 크게 상심해 있는데,

그 곳에서 미군들의 초상화가로 일하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무명 화가 옥희도(박수근)을 만나게 됩니다.

언젠가 진정한 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하던 옥희도를 지켜보며 죽은 오빠에게 느꼈던 감정과 연정을 갖게 된 주인공은,

이후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옥희도와는 이별하고 나름대로 가정 속에서 행복을 찾게 됩니다.

세월히 흐른 뒤 작고한 옥희도의 유작전에서 그의 작품을 접하고, 과거 본 옥희도의 그림이 '나목'이었음을 깨닫죠.

 

그 밖에 박완서가 쓴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미망(1990)>이 있습니다.

본래 작가가 필생의 라이프워크로 생각했던 "개성 상인의 삶을 다루어 보겠다"는 테마를 다룬 야심작인데,

하필이면 작품을 쓸 때 남편과 아들을 잇달아 비극적으로 먼저 보내게 되면서 조금 힘이 떨어진 면이 있습니다.

화려한 도입부에 비해 한일합방과 해방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굴곡을 다루는 이야기 중반부가 어설픈 면이 있죠. 

해방 이후 개성의 인삼 상인들의 재배 기술을 강화도로 옮겨오게 된다는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어떤 면에서는 <토지>를 의식하고 쓰여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큰 소설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 작품 역시 주인공은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되어 있고, 개성 상인의 후예인 여장부의 모습이 당당하게 나타나죠.

  

 

사족으로...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워낙에 TV 드라마 스타일의 멜로물이어서, TV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 것이 꽤 많습니다.

<도시의 흉년>은 1988년 무렵 드라마로 방영되었는데, 처제를 범한 뻔뻔한 맏사위 역으로 유인촌이 나왔죠.

당시 인기 상종가였던 유인촌이 드물게 맡은 악역이어서 오히려 더 화제가 되었고 인기 몰이를 했습니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2003년 무렵 배종옥 주연의 아침 드라마로 방영되었는데 꽤 인기가 좋았습니다.

극단적인 막장 설정이 많은 아침 드라마로 선택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 작품의 멜로성을 대변하고 있죠.

원작 소설과는 달리 드라마에서는 막판에 아들을 위해 화해를 선택한 것이 이색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망>의 경우 1990년대 중반 인기 절정이었던 채시라 주연으로 대하드라마로 제작되었는데,

원작의 비중 때문에 이름있는 연기자가 총출동했지만 그 성과는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습니다.

<휘청거리는 오후>는 원작이 한창 화제를 뿌리던 1978년에 최불암 주연의 영화로 개봉해서 성공했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도 원작 발표 직후인 1984년 곧바로 이미숙 안성기 주연의 영화로 개봉해 성공했습니다.

이 영화의 경우 1983년부터 전국민적인 화제였던 "이산가족 찾기"와 소재가 통해서 더욱 탄력을 받았더랬죠.

<나목>은 단막극 드라마로 여러 번 제작되었죠 - 가장 최근 것은 박근형이 옥희도(박수근) 화백으로 나왔습니다.

 

 

[결론]

개인적으로 박완서의 책들을 그 동안 꽤 재미있게 읽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 분이 작고했다는 소식에 이렇게 언론이 호들갑을 떨 정도로 대단한 작가인 것이 과연 맞나,

또는 많은 사람들이 이 작가의 책이나 한 번 제대로 읽고 난리를 치는 것인가 그런 생각도 좀 듭니다. 

정작 읽어보면 여성 취향의 TV 연속극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데 말이죠 - 그 재미도 값어치도 말입니다.

문학적으로는 데뷔작 <나목>과 전성기를 다 보내고 말년에 쓴 <싱아> 자전소설 연작이 최고작일런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박완서씨가 쓰기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1970~1980년대의 작품들은 너무 통속적이어서 좀 그렇습니다.

박완서라는 작가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순문학과 통속 멜로물의 경계에 있었던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