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계획도시는 7년 전 소멸한 가람시를 대체하기 위해 건설 된 국가 계획도시이다.

도시는 정중앙에 위치한 대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도로로 인해 4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 북쪽구획은 학교와 연구소 도서관 등 각종 학문관련 기관이 주로 자리한 학원 구역, 동쪽은 가람시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거의 대부분 수용하는 아파트나 빌라 등이 밀집한 주거구역, 남쪽은 초고층 빌딩들이 빼곡하게 자리한 경제구역, 서쪽은 백화점이나 시장 등 온갖 가게들이 밀집한 상업구역이 그것이다. 의도적으로 건설된 도시인만큼 자연스러움 보다는 극도의 편의성을 추구한 도시의 구조.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대부분의 찬사와 약간의 조소가 뒤섞인 그런 것이었다.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힘으로 만든 보이지 않는 레일을 달리는 전차가 텅빈 도시 거리를 가로지르고, 상업구역과 주거구역을 나누는 도로위로 크고도 두꺼운 침대 매트릭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후우-에요.”

 

그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다홍색 보브 컷 머리를 가진 소녀가 자신이 목표로 하는 빌라를, 정확히는 그 건너편에 있는 빌라를 어둠속에서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본다.

 

히힛, 지금쯤 자고 있는 걸까요-.”

 

자신의 운명을 알 리 없는 맹한 얼굴의 소년을 떠올리며 소녀는 쿡쿡- 하고 웃음을 흘린다.

 

으이쌰-!”

 

다시 매트리스를 들어올리는, 아니 그 속으로 몸을 숨긴 소녀가 횡단보도를 천천히 건넌다.

 

한편, 예의 맹한소년- 기찬은 실의에 빠져있었다. 방세며 각종 공과금을 내고 나자 지갑에 남은 돈은 2만원. 아르바이트를 하고는 있지만 이 돈으로는 도저히 다음 월급까지 버틸 수 없다. 매일 먹던 점심 도시락을 포기하고 저녁을 먹으면- 아니 안되지 차라리 점심을 먹고 일찍 자면 하루 두끼나 한끼 정도로 식비를 아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등하교는 도보로하고 이번달에 사고 싶었던 게임 타이틀이나 만화를 다음달로 미루고-.

“1037번째 파산위기로군.”

 

살짝 눈물이 맺힌 눈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맹물을 입으로 가져간 바로 그 순간-.

 

와장창-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호에에에- 큰일이에요-.”

 

바작 쨍그랑 콰쾅 우지끈.

 

기찬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으며 부엌겸 거실로 향하는 방문을 열었다.

기찬의 눈에 들어온 그 광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필요했다.

 

혼돈,

 

절망,

 

파괴,

 

나락 ,

 

망가 아니, 망가는 제하고.

 

무너져 내린 싱크대와 여지없이 깨져 널브러진 그릇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방범창이 설치된 창문을 창틀 째 없앨 수 있는지 궁금하다. 디자인보다 내구성을 우선하여 구매한 탁자가 두 동강 난 사연을 전력으로 청취하고 싶다. 그런 참사를 저질러 놓고도 미안함은커녕 너무도 해맑은 미소를 띈 얼굴에 이르러서는 신을 원망하고 싶다.

 

우와아아 동생이에요-. , 엣햄.”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는 효은.

 

누나왔어, 기찬아.”

 

기찬의 몸이 가볍게 떨린다.

 

,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합니다, . . .”

선배가 아니고 누나야, 누나.”

 

한때는 사용되던 것이었으나 이제는 폐허 더미의 일부가 된 난장판 위에서 소녀는 있지도 않은 가슴을 활짝 피며 대답했다. 기찬이 큰 걸음으로 척척 하며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호빵처럼 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볼을 꼬집어 들어올린다.

 

. . . . . . . . .”

후에에에-. 느나개로피지마흐-.”

 

말캉말캉한 호빵을 좌우로 쭈욱 잡아당기는 기찬.

 

아하, 아흐하호

 

눈물을 글썽이며 바둥거리는 효은이었지만 애처로울만큼 짧은 팔다리는 그저 의미없이 허공을 가를 뿐이다.

 

로리 꼬맹이 주제에 대체 무슨 짓을…….”

 

-. 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아니, 분명 착각이겠지.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 따위가 들릴리 없다. 하지만 자신의 손 안에 잡혀있는 소형동물계 소녀, 아니 소형동물계였던 소녀는 명백히 포식자의 기질로 바뀌어 있었다.

 

............”

 

할 수만 있다면, 이미 입을 떠나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효은의 손안에 나타난 화염구를 보면서 생각하는 기찬이었다.

 

, 선배 일단 진정하세요. 잘못했으니까요, 제가 죽일 놈 입니다요!”

, 헤헿... 이 내가 로리... 가슴도 없는 로리꼬맹이...”

거기까지는 말 안했어요!”

 

LCD평면 TV급으로 평평한 자신의 가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효은이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기찬을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이딴 세상 따위 멸망해버리라죠!”

, 앙대-.”

 

요즘 빌라는 화재 대비에 충실하다는 점과 물이 들어간 전자제품은 사용할 수 없다는 큰 교훈과 함께 기찬의 절규가 새벽, 가람시의 밤하늘을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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