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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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유빅>의 문구를 새긴 휴가철 사은품인데, 약간 의외로군요.]
모 도서 판매 사이트에서 요즘 휴가철 사은품을 주나 봅니다. 그 중에 해변이나 계곡에 가져가기 좋은 가방도 있더군요. 도서 판매 사이트답게 가방에 소설 문구도 넣어줍니다. 원하는 대로 넣어주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고 미리 준비한 3개를 주는 듯하네요. 그 3개는 바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그리고 필립 딕의 <유빅>입니다. 사진에 나온 것처럼 말입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휴가철 사은품 가방에 새기는 소설이 하필 필립 딕 작품이라니요. 왜 좀 더 유명하고 대중적이고 친근한 작가를 놔두고, 하필 저 양반을 골랐는지 모르겠습니다. 헤밍웨이야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작가입니다. 소설을 안 본 사람도 이름은 들어봤을 테고, 특히 <노인과 바다>는 국내에도 친숙하죠. 왕년에 게 맛을 아느냐는 광고로 유명세도 치렀고요. 코난 도일의 인기도 설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국내에도 <셜록 홈즈> 완역본이 여러 판본으로 나왔고, BBC 드라마도 잘 나가고요.
하지만 필립 딕은 헤밍웨이나 코난 도일과 다릅니다.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일단 SF 작가이고,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SF 장르는 그리 큰 인기가 없습니다. 로봇과 초인이 나오는 영화, 게임 등이야 흥행하지만, 사변적인 내용을 강조하는 소설은 그리 대중적이지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필립 딕은 골치 아픈 작품을 쓰기로 잘 알려졌습니다. 도대체 이 양반이 쓰는 책치고 만만하게 볼만한 게 별로 없습니다. <유빅>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머리 아파서 몇 장 안 읽어봤으니 뭐라고 평가는 못 하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미로>나 <화성의 타임슬립>, <닥터 블러드머니> 등을 읽은 경험에 비추면, 절대로 술술 읽히는 소설은 아닐 거라고 장담합니다. 이런 책의 문구를 휴가철 사은품 가방에 넣는 것도 좀 아이러니하네요. <노인의 바다>는 짧고 쉬운 책입니다. 내용은 묵직하지만, 읽기는 어렵지 않아요. <셜록 홈즈> 시리즈도 휴가철에 읽기는 그만이고요. 하지만 <유빅>을 휴가철에 보는 건 좀….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필립 딕은 약 빠는 장르 작가로 유명하죠. SF 작가 중에 기인이 많지만, 그 중에서 필립 딕만큼 전설이 된 인물도 없을 겁니다. 툭하면 환각제를 먹고,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평생 몇 번에 걸쳐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동양 철학에 심취하고, 정부 기관이 자기를 감시한다고 주장하고, 초월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세상이 망할 거라고 슬퍼하고, 자살한답시고 자해하고 등등. 아마 이런 기행을 비교하려면, 적어도 반 고흐 정도는 되야 할 겁니다. 필립 딕은 자신의 철학을 작품에 쏟았고, 당연히 이런 작가의 소설이 흥미 위주일 리 없죠. 게다가 문체도 문제입니다. 필립 딕의 문체가 산만하다는 건 평론가들도 한결같이 지적하는 사항입니다. 정신이 너무 혼미해서 그런지, 허무주의 사상이 지나쳐서 그런지…. 그렇다고 이 양반의 소설이 전부 어렵다는 건 아닙니다. 일부 단편 중에는 쉽게 읽을만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일부이고, 장편 쪽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어요.
개인적으로 음울하고 허무주의적인 설정을 좋아합니다. 전복적이고 좌파적인 주제도 좋습니다. 하지만 필립 딕은 그런 요건을 두루 갖췄음에도 어쩐지 손이 안 가더라고요. 평론가들이 문체 운운하는 걸 보면, 비단 개인적인 취향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허버트 웰즈나 차이나 미에빌처럼 괴물 이야기라도 잘 하면 모르겠는데, 필립 딕은 그런 것도 없죠. 별별 요상한 설정을 다 쓰는 양반인데, 희한하게 괴물 이야기는 잘 안 하더라고요. 인류가 창조한 거대 괴수가 난동을 부리고, 주인공이 그걸 보면서 정신 분열을 일으키는 줄거리도 그럴 듯할 텐데요. 어쨌든 두서 없는 결론은 휴가철 사은품 가방이 신기하다는 겁니다. 필립 딕은 헤밍웨이나 코난 도일과 별로 어울리지 않고, 휴가철이라는 이미지와도 그리 친하지 않으니까요. 이왕 SF 작가를 고른다면, 글쎄요. 베르베르 아저씨가 훨씬 대중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해수욕장과 어울리도록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를 집어넣는다거나.
※ 저보고 저런 가방을 만들라고 한다면, <백경>으로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소설에서 이스마엘이 탐험의 포부를 밝히던 "I love to sail forbidden seas, and land on barbarous coasts."를 넣으면 좋을 것 같네요. 이거 칼 세이건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언급했던 대사이기도 하죠.
책이 워낙 안팔리다 보니 서점의 주 고객층을 차지하는 비율중 장르문학 팬덤이 늘어난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알라딘에서 유빅 컵도 준적이 있는데 마케팅 부서에 필립 K 딕 팬이 있는걸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