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러지는 본래 "꽃"이라는 뜻을 갖는다고 하죠.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여러 시인들의 뛰어난 시편을 모아 펴낸 게 앤솔러지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앤솔러지를 구약성서의 <시편>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하지만 춘추시대에 만들어진 <시경>이 더 오래된 앤솔러지일런지도 모릅니다.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단편 소설집이 "앤솔러지"의 형태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앤솔러지를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닙니다.

너무 여러 작가의 작품들이 모여 있고, 그래서 정신 사납다는 생각을 좀 합니다.

더불어 나중에 과거 읽었던 작품을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어 찾을라 치면,

도대체 어느 책에서 봤는 지 한 참 헤매야 겨우 바라던 작품을 찾곤 합니다.

하지만 SF와 팬터지는 앤솔러지 중심으로 소개된 작품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앤솔러지를 읽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논할 거리가 없을 지경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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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 책 덕분에 SF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라는 평판을 들었던 책이

1992년 무렵 '도솔'출판사에서 나왔던 <세계 SF 걸작선>입니다.

더불어 그 책을 읽은 독자가 열정적인 독후감을 출판사에 보낸 것을 계기로

그 독자에게 번역을 직접 해 보라고 하여 나온 책이 <세계 휴먼 SF 걸작선>이었죠.

이 두 책은 훗날 한 권으로 묶여서 <마니아를 위한 SF 걸작선>으로 다시 재출간됩니다.

또한 그 당시 경쟁하듯이 고려원에서도 SF 앤솔러지를 한꺼번에 시리즈로 펴냈는데,

그것이 <세계 SF 걸작선>, <시간여행 SF 걸작선>, <코믹 SF 걸작선>이었습니다.


실은 '도솔'과 '고려원'에서 SF 앤솔러지로 경쟁을 하기 전에 먼저 스타트를 끊은 곳이 있었는데,

당시 무협소설을 주로 출간하던 '서울창작'에서 나온 <토탈 호러> 시리즈였습니다.

"공포"를 내세워서 SF, 판타지 문학의 거장들의 주요 작품들을 골라 실었고,

호러 앤솔러지로 위장하여 일반 독자를 현혹하는 SF 앤솔러지라고 할 수 있었죠.

기거의 표지 디자인 덕분이었는지 의외로 이 앤솔러지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이후 <토탈 호러2>, <사이키>, <환상특급>, <코스믹러브>, [SF 시네피아]가 더 나옵니다.

재미있는 SF에 목말라 있었던 시기에 '서울창작', '도솔', '고려원'의 SF 앤솔러지 출간 경쟁은

진실로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읽을거리였고, 이후 시공사의 그리폰북스의 출간이 시작되면서

한국 독자들이 SF 앤솔러지에서 접한 작가들의 장편으로 옮겨가도록 하는 가교 역할을 했죠.

    

하지만 그 후 SF 앤솔러지는 한 동안 뜸하게 됩니다.

그 기간 동안 주요 SF 판타지 작가들의 개인 장편, 단편집들이 많이 나왔죠.

출판계에서 SF 앤솔러지가 뜸해진 대신, 판타지/호러 앤솔러지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우선 이문열이 과거 서머셋 몸이 했던 일을 자기도 해 보겠다면서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을 골라 세계 단편 소설 앤솔러지를 펴냈습니다.

그렇게 나온 책이 살림출판사의 <이문열 세계 명작 산책> 10권이었죠.

그 중 제 4 권 <환상과 기상>이 "판타지 앤솔러지"였고, 이 책의 작품 선정이 꽤 훌륭해서,

SF와 판타지를 읽어 온 독자들에게도 주목을 받으면서 상당히 널리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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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더 중요한 효과는....  "이문열"이라는 이름값 덕분에 해당 앤솔러지가 널리 읽혔고

그 중 <환상과 기상>은 기존의 SF 판타지 독자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읽히면서,

"판타지가 이렇게 재미있고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겁니다.

<환상과 기상>은 <토탈 호러>와는 달리 자극적인 표지 디자인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물은 <토탈 호러>이든 <환상과 기상>이든 기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할 수 있었죠.

   

얼마 후 순문학을 주로 펴내던 문학세계사에서 알베르토 망구웰이 편집한 판타지 앤솔러지

<낡은 극장에서 생긴 일>을 펴낸 것은 명백하게 <환상과 기상>이 준 충격 덕분으로 보이고,

드림북스에서 데이비드 하트웰이 편집한 고딕 앤솔러지를 기반으로 <밤의 순례>를 펴낸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판타지 앤솔러지가 주는 재미를 출판계가 깨달은 것이죠.

이후... 수 많은 호러 앤솔러지가 나오게 됩니다.

거의 매년 여름이면 몇 권씩 편집되어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아쉬운 것은 매년 새로 출간되는 호러 앤솔러지의 수록 작품들이 거의 비슷비슷해서,

몇 번 보고 나면 거의 대부분 읽어 본 작품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SF 앤솔러지 붐이 다시 일게 된 것은,

시공사와 황금가지에서 두 명 편집자의 앤솔러지를 거의 동시에 소개하면서부터입니다.

시공사에서 '가드너 도조와'의 SF 앤솔러지를 <21세기 SF 도서관>이라고 해서 두 권으로 냈고,

황금가지에서는 '데이비드 하트웰'의 SF 앤솔러지를 <오늘의 SF 걸작선>이라고 펴냈죠.

데이비드 하트웰의 경우 <밤의 순례>가 소개된 적이 있지만 역자 이름이 편자로 나와 있었고,

그의 본령인 SF를 편집한 책은 <오늘의 SF 걸작선>이 처음이었습니다.

'가드너 도조와'와 '데이비드 하트웰'이 매년 펴내는 SF 앤솔러지 중에서

2002년 무렵의 작품을 묶은 SF 앤솔러지를 대상으로 하여 번역출간이 이루어졌는데,

안타깝게도 <21세기 SF 도서관>은 마지막 3권이 출간되지 못하고 앞의 2/3 분량만 나왔습니다.

이후 '가드너 도조와'가 편집한 앤솔러지로는 <갈릴레오의 아이들>이 더 출간되었고,

'데이비드 하트웰'이 편집한 앤솔러지로는 <하드 SF 르네상스> 두 권이 행복한책읽기에서 출간되었죠.

    

SF 판타지 앤솔러지 중 이채로운 책이라면...

"성"에 대한 테마를 담은 앤솔러지가 의외로 꾸준히 나왔다는 겁니다.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지에 수록된 SF만 묶은 앤솔러지가 황금가지에서 두 권으로 나왔고,

그 전에도 번역가이자 추리문학 연구가 정태원씨 편집으로 이미 한 차례 출간된 바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톨킨의 <반지 전쟁>과 젤라즈니의 <앰버 연대기>를 펴내고 있었던 '예문' 출판사에서

<사이버 섹스>라는 매우 자극적인 제목의 책을 출간했는데, 이게 아주 우수한 SF 앤솔러지였죠.

    

2000년대 중반부터 '책세상'에서 판타지 앤솔러지를 잇달아 출간하기 시작합니다.

리처드 댈비가 편집한 <밤의 여신 닉스의 초대>시리즈 3 권과 <유령 이야기> 2권을 출간하더니,

이후 호러 소설을 연구하는 정진영씨와 손잡고 아예 작정을 하고 판타지 앤솔러지를 내기 시작해서

<세계 호러 걸작선> 2 권, <뱀파이어 걸작선>, 어마어마한 두께의 <세계 호러 단편 100 선>을 냅니다.

책세상에서 나온 판타지 호러 앤솔러지만으로도 엄청난 분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테마를 가진 판타지 앤솔러지로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 문학을 다룬 책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왔던 것은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기적의 진실과 환상속의 현실>이라고

독일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호프만, 하우프, 푸케 등의 예술동화를 묶은 앤솔러지였습니다.

이후 많은 출판사에서 이 시대 독일에서 쓰여진 예술동화 앤솔러지를 계속 펴내고 있죠.

'이룸'에서는 <낭만 동화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독일 예술동화 앤솔러지가 두 권으로 출간되었고,

'황금가지'에서는 <독일 환상 동화집>이라는 제목으로 두꺼운 앤솔러지로 출간되었습니다.

    

SF 앤솔러지 시리즈 중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은,

오멜라스에서 나온 [SF 명예의 전당] 시리즈 4 권입니다.

SF 전문 출판사를 지향했던 오멜라스가 마지막을 불태우면서 출간한 책이었고,

각 권이 500 페이지 내외여서 4권 전체 분량은 무려 2000 페이지가 넘습니다.

사실상 20 세기에 나온 SF 단편 걸작은 거의 다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