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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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COM : Self Defense #022
1999년 4월 21일.
어색한 장소에서 흐르는 어색한 침묵.
갑자기 빨라지는 심장 박동만이 조금씩 온 몸을 잠식해 가고 있다.
작다. 소녀의 목소리는.
몇 초의 정적 끝에 결론은 쉽게 내려졌다. 이래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소녀는 그저 입만 벙긋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시선이 실험관 속의 회색 괴물로부터 벗어나 소녀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군. 섹토이드가 유리벽을 두들겨 대는 소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소녀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놀랄만큼 뚜렷하게 적막한 공기를 가른다.
"이제 그만 둬."
하지만 낮게 깔린 목소리는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어린 소녀의 것이라고 하기엔 어색하기 짝이 없다.
처음 들려주는 목소리의 내용이 '그만둬.'라... 말투는 어색하지만 맞는 소리다. 지금 저 하얀 가운을 걸친 인간들은 지금 말 못하는 한 소녀를 사람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인류니 생명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들먹이면서.
다만 그만 두라 한다고 말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일단 번역의 문제를 제쳐 놓고라도 그들은 어떠한 반박도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욕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념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그것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어리석은 인간."
그래. 분명 어리석은 인간들이지.
...인간?
소녀가 입을 연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이건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발언이다.
차분한 소녀의 목소리와 그 안에 담긴 내용의 위화감은 이제 맞출 확률이 상당히 높은 불길한 예감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항상 멍하게 상대의 시선을 피하던 소녀의 두 눈이 지금은 지그문트 박사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누굴 향하든 뼈 속 깊숙이 섬뜩한 느낌을 선사할 것임에 틀림없는 그 눈빛은 살기라기보다는 경멸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하핫. 드디어 찾았군."
물론 항상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경멸의 눈빛에 대한 지그문트 박사의 반응은 휠체어에 기댔던 등을 떼고 고개를 내민 것 뿐이다. 오히려 입이 찢어질 듯한 웃음으로 응답한다.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잔뜩 묻어 있는 그런 웃음. 왠지 기분이 나빠진다.
"멩겔, 자네도 봤겠지? 아무런 장비도 없이 저 아이는 '소통'할 수 있다고!"
소녀가 눈을 뜨자마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치던 멩겔도 그제서야 씨익 웃는다. 전극을 든 손이 아직 떨리는 것으로 봐서 박사와는 다른 형태의 감정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표정은 약간 밝아졌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그들과 기쁨을 공유해 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서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그들에게 화가 날 뿐이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소녀는 지금 정상이 아니라구. 그런데 당신들은 웃음이 나와? 그리고 저 외계인 자식 좀 어떻게 해 봐! 갑자기 발작이라도 하는건가?"
못볼 것을 보고 나면 사람이 갑자기 변한다는 이야기가 있던가. 그 진위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의향이 생길 만큼 그동안 참아 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누가 뭐라해도 지금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아니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을 맞닥뜨린 순간이니까.
소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소녀 입장에서는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처음이다. 지금은 바로 그런 순간이란 말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처음 들려준 목소리는 다른 어떤 감정도 아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다. 아니, 공포의 원인이 소녀인지 실험관 속에서 발버둥치는 저 괴물인지, 그것도 아니면 휠체어 위에서 웃고 있는 늙은이인지조차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저 실망과 공포가 뒤섞인 혼란 속에 몸을 맡길 뿐. 계속해서 외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다.
"자네들은 이제 가 봐도 좋아.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판명됐으니."
하지만 외침은 속에서나 밖에서나 언제나 공허하다. 지그문트 박사는 새로운 욕망으로 가득찬 눈을 찡그림으로써 손쉽게 나의 외침을 무시했다.
"그럼 거래는 성립됐군요."
"그래, 매우 만족스럽다네. 걱정말고 가 보게나."
서란이 끼어든다. 그리고 박사가 응답한다.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그런 건 좀 더 편안한 시간에 하는 게 낫겠군. 지금은 당장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거든."
박사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서란인가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향한 소녀의 눈길에 대해 미소로 답하면서 서란의 말을 잘랐다. 서란은 잠깐 움찔하는 듯 했으나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건 지금까지 봐 왔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는 끝까지 임무에 충실하기로 정한 걸까. 선글라스 속의 표정이 궁금하다.
"자, 어서 저 아이를 실험실로."
박사의 지시에 멩겔은 소녀를 내버려둔 채 어딘가로 연락을 하랴 지시를 내리느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소녀를 데려가려는 듯 연구원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언뜻 보인다. 더 이상 어떠한 설명도 들을 수 없는 분위기다.
소녀의 이상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박사의 소녀에 대한 집착이 더더욱 강해진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나와 서란에 대한 철저한 무시로 이어져 버린 것이다.
소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실험실 속의 섹토이드도 이제는 한계를 알았는지 손가락으로 유리벽을 살짝 두드리기만 할 뿐이다. 그 움직임이 규칙적인 것이 무슨 의식이라도 벌이고 있는 듯 하다.
당장이라도 소녀를 실험대로 끌고 갈 것만 같은 분위기를 깬 것은 천장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방송음이었다.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잡음이 섞인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구역에 문제 발생. 실험체가 의식을 되찾은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이 실험이 우선이라고 했을텐데!"
저 정도 고함소리라면 송신기가 어디에 달려 있든간에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박사의 자신있는 대답과는 달리 문제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만! 거기까지."
이번에는 박사의 말이 잘릴 차례였다. 힘이 넘치는 젊은 목소리. 멀리서 다가온 것은 연구원이 아니었다. 그의 발언은 먼젓번에 소녀가 꺼냈던 것과 유사했지만 무게가 전혀 달랐다. 우선, 언어가 익숙치 않았다.
"실험이라면 우리가 대신 해 줄 테니까..."
위화감을 조성하는 소위 본토 영어 발음이다. 위화감은 둘째치고 장난이라도 하는 듯한 쾌활한 억양이 귀에 거슬린다.
"걱정 마쇼. 지그문트 박사."
역시 은은한 녹색 조명만 가지고는 어두운 게 당연한 걸까. 그동안 그림자 저 편에 잘도 숨어 있던 또 다른 손님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숨기 위한 용도인지 아니면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검은 양복으로 전신을 감싼 일당들. 다른 것은 몰라도 낯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반갑지도 않다는 점에서 실험관 속에 있는 녀석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다.
1999년 4월 21일.
어색한 장소에서 흐르는 어색한 침묵.
갑자기 빨라지는 심장 박동만이 조금씩 온 몸을 잠식해 가고 있다.
작다. 소녀의 목소리는.
몇 초의 정적 끝에 결론은 쉽게 내려졌다. 이래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소녀는 그저 입만 벙긋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시선이 실험관 속의 회색 괴물로부터 벗어나 소녀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군. 섹토이드가 유리벽을 두들겨 대는 소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소녀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놀랄만큼 뚜렷하게 적막한 공기를 가른다.
"이제 그만 둬."
하지만 낮게 깔린 목소리는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어린 소녀의 것이라고 하기엔 어색하기 짝이 없다.
처음 들려주는 목소리의 내용이 '그만둬.'라... 말투는 어색하지만 맞는 소리다. 지금 저 하얀 가운을 걸친 인간들은 지금 말 못하는 한 소녀를 사람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인류니 생명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들먹이면서.
다만 그만 두라 한다고 말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일단 번역의 문제를 제쳐 놓고라도 그들은 어떠한 반박도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욕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념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그것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어리석은 인간."
그래. 분명 어리석은 인간들이지.
...인간?
소녀가 입을 연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이건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발언이다.
차분한 소녀의 목소리와 그 안에 담긴 내용의 위화감은 이제 맞출 확률이 상당히 높은 불길한 예감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항상 멍하게 상대의 시선을 피하던 소녀의 두 눈이 지금은 지그문트 박사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누굴 향하든 뼈 속 깊숙이 섬뜩한 느낌을 선사할 것임에 틀림없는 그 눈빛은 살기라기보다는 경멸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하핫. 드디어 찾았군."
물론 항상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경멸의 눈빛에 대한 지그문트 박사의 반응은 휠체어에 기댔던 등을 떼고 고개를 내민 것 뿐이다. 오히려 입이 찢어질 듯한 웃음으로 응답한다.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잔뜩 묻어 있는 그런 웃음. 왠지 기분이 나빠진다.
"멩겔, 자네도 봤겠지? 아무런 장비도 없이 저 아이는 '소통'할 수 있다고!"
소녀가 눈을 뜨자마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치던 멩겔도 그제서야 씨익 웃는다. 전극을 든 손이 아직 떨리는 것으로 봐서 박사와는 다른 형태의 감정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표정은 약간 밝아졌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그들과 기쁨을 공유해 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서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그들에게 화가 날 뿐이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소녀는 지금 정상이 아니라구. 그런데 당신들은 웃음이 나와? 그리고 저 외계인 자식 좀 어떻게 해 봐! 갑자기 발작이라도 하는건가?"
못볼 것을 보고 나면 사람이 갑자기 변한다는 이야기가 있던가. 그 진위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의향이 생길 만큼 그동안 참아 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누가 뭐라해도 지금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아니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을 맞닥뜨린 순간이니까.
소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소녀 입장에서는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처음이다. 지금은 바로 그런 순간이란 말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처음 들려준 목소리는 다른 어떤 감정도 아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다. 아니, 공포의 원인이 소녀인지 실험관 속에서 발버둥치는 저 괴물인지, 그것도 아니면 휠체어 위에서 웃고 있는 늙은이인지조차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저 실망과 공포가 뒤섞인 혼란 속에 몸을 맡길 뿐. 계속해서 외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다.
"자네들은 이제 가 봐도 좋아.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판명됐으니."
하지만 외침은 속에서나 밖에서나 언제나 공허하다. 지그문트 박사는 새로운 욕망으로 가득찬 눈을 찡그림으로써 손쉽게 나의 외침을 무시했다.
"그럼 거래는 성립됐군요."
"그래, 매우 만족스럽다네. 걱정말고 가 보게나."
서란이 끼어든다. 그리고 박사가 응답한다.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그런 건 좀 더 편안한 시간에 하는 게 낫겠군. 지금은 당장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거든."
박사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서란인가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향한 소녀의 눈길에 대해 미소로 답하면서 서란의 말을 잘랐다. 서란은 잠깐 움찔하는 듯 했으나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건 지금까지 봐 왔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는 끝까지 임무에 충실하기로 정한 걸까. 선글라스 속의 표정이 궁금하다.
"자, 어서 저 아이를 실험실로."
박사의 지시에 멩겔은 소녀를 내버려둔 채 어딘가로 연락을 하랴 지시를 내리느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소녀를 데려가려는 듯 연구원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언뜻 보인다. 더 이상 어떠한 설명도 들을 수 없는 분위기다.
소녀의 이상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박사의 소녀에 대한 집착이 더더욱 강해진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나와 서란에 대한 철저한 무시로 이어져 버린 것이다.
소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실험실 속의 섹토이드도 이제는 한계를 알았는지 손가락으로 유리벽을 살짝 두드리기만 할 뿐이다. 그 움직임이 규칙적인 것이 무슨 의식이라도 벌이고 있는 듯 하다.
당장이라도 소녀를 실험대로 끌고 갈 것만 같은 분위기를 깬 것은 천장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방송음이었다.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잡음이 섞인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구역에 문제 발생. 실험체가 의식을 되찾은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이 실험이 우선이라고 했을텐데!"
저 정도 고함소리라면 송신기가 어디에 달려 있든간에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박사의 자신있는 대답과는 달리 문제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만! 거기까지."
이번에는 박사의 말이 잘릴 차례였다. 힘이 넘치는 젊은 목소리. 멀리서 다가온 것은 연구원이 아니었다. 그의 발언은 먼젓번에 소녀가 꺼냈던 것과 유사했지만 무게가 전혀 달랐다. 우선, 언어가 익숙치 않았다.
"실험이라면 우리가 대신 해 줄 테니까..."
위화감을 조성하는 소위 본토 영어 발음이다. 위화감은 둘째치고 장난이라도 하는 듯한 쾌활한 억양이 귀에 거슬린다.
"걱정 마쇼. 지그문트 박사."
역시 은은한 녹색 조명만 가지고는 어두운 게 당연한 걸까. 그동안 그림자 저 편에 잘도 숨어 있던 또 다른 손님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숨기 위한 용도인지 아니면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검은 양복으로 전신을 감싼 일당들. 다른 것은 몰라도 낯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반갑지도 않다는 점에서 실험관 속에 있는 녀석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