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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10/12



마을은 조용했다. 요한과 류사는 둘 다 종적을 감추고 서로를 추적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쇼크여단의 척후대 출신이라면 건물이 빽빽한 마을에서 쉽사리 꼬리를 잡히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석은 경사를 천천히 내려갔다. 그러다가 멈추어 서서 헬멧의 고글을 내렸다.
돌아보자 아키텐의 실루엣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지석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류사. 류사를 설득해야 하는 건가? 설득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야 되는 거지? 아무 말 없이 쏴 죽이고 나서 그저 잡초라도 한 움큼 뜯은 사람처럼 손을 털어버려야 하나?
아냐. 그건 나답지 않다.
지석은 달리기 시작했다.
빛이 결핍된 하늘에는 낯선 별자리가 몇 번째인지 모를 궁도를 그리고 있었다. 고글의 단색광 속에서 거리감이 뭉뚱그려지고 만화속의 주인공처럼 팔다리가 제멋대로 놀기 시작했다. 발에 채인 작은 돌이 굴러갔다.
구르듯, 바위산 아래로 뛰어 내려간 지석은 그늘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노이즈 메이커 하나를 떨군 다음 방향을 꺾어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정숙한 몸놀림으로 움직였다. 청음장치에는 사람의 신호라고 생각할 만한 것이 거의 잡히지 않았다.
지석은 총구를 지면으로 향하고 흔들었다. 혹시 모래가 들어갔을지 몰라서였다. 오작동하는 일은 없지만 모래가 들어가면 불꽃이 튄다. 지석은 총을 다시 겨누고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 때 갑자기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호는 그가 떨군 첫 번째 노이즈 메이커로 다가갔다. 지석은 고글의 배율을 올렸다. 소총의 레이저 조준기와 연동된 고글이 먼 곳의 움직임을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총에는 정찰 부대용의 짧은 탄창이 끼워져 있었다. 저 작은 탄창을 사용하는 건 대규모의 적과 교전할 일이 없는 정찰대뿐이다.
그가 류사인지 아니면 요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자세히 보자 조금 여윈 듯한 어께가 요한에 가까워 보였다. 그가 몸을 돌리자 뭔가가 목 근처에서 움직였다.
목걸이?
그는 요한이었다. 요한이 그의 뒤를 추적한 것이다.
지석은 조용히 왼손을 들었다. 그리고 상체를 내밀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요한은 지석을 발견하고 자세를 낮추었다. 하지만 금방 그를 알아보고 수신호를 보냈다.
그 자리에서 기다려.
요한은 주위를 천천히 돌아본 뒤 지석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지석은 핸드그립에 문자를 출력했다. 그리고 요한에게 내밀었다.
류사는?
요한도 문자로 응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계속 쫓고 있었는데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조장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지석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만두자. 류사를 설득하자.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
요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장님과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만두자.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전 그를 죽일 겁니다. 그는 위험합니다.
그를 그렇게 몰아붙인 건 너야 요한.
조장님은 그를 모릅니다. 그가 예전에...
날 화나게 하지 마라. 요한 나도.....
요한은 갑자기 바위언덕의 정상을 쳐다보았다. 철컥거리는 기계음이 청음장치에 빨려들었다.
누군가가 제대로 손질하지 않은 총을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곳에서 거친 목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라디오의 소음이 가물가물하게 들리고 있었다. 요한의 시선이 지석의 눈과 마주쳤다.
메다산과 아키텐 뿐이야. 저 위엔.
그 순간 갑자기 위에서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겼다. 비명소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전자기장이 탄환을 밀어내는 듣기 싫은 마찰음.
"젠장!"
지석은 달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생각을 했어야 했다. 높은 곳을 차지하면 유리하다는 건 어린애도 아는 사실인데. 그리고 더군다나 대원들의 부스터는 전부 저 곳에 모아놓았다.
"조장님! 안됩니다! 놈이 저기 있다면, 그럼 놈은 저격을 할 겁니다!"
사람의 그림자가 바위산 정상에서 어른거렸다. 그러다가 금방 사라졌다.
밤이었다. 대지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지석의 핸드그립은 지석도 알고 있는 사실들을 빽빽히 나열하고 있었다. 그래. 놈은 저 위에 있어. 그리고 QK-1 베이직을 쓰고 있지. 놈은 연방군이야. 그리고 나도 연방군이다. 내가 살인자인 것처럼 저 놈도 살인자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저 놈도 살아있다. 내일은 어떨까. 그리고 그 다음날은.
"멈춰라! 그만 둬! 류사!"
인터컴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류사는 인터컴을 끄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단말마의 발버둥. 상황은 청음장치를 통해 생중계하듯 들려왔다.
최초에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희생물은 단번에 죽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리고 또 한번. 희생물이 죽을 때까지 계속 탄환이 총구에서 튀어나갔다. 탄환이 암반에 부딪혀 튀기는 소리. 골수가 흘러내려 메마른 돌을 적시고 있을 것이다. 비명소리. 이건 메다산의 목소리일 것이다.
몸집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달리 메다산의 비명은 굉장히 길고 가늘었다.
지석은 악다구니를 질렀다.
"류사!!!"
밤하늘이 그의 목소리를 빨아들였다. 지석은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드륵 드륵 탄환이 날아갔다. 목표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위협사격일 뿐이었다.
뭔가 희미하게 반짝이는 물체가 시야를 스쳐갔다.
누군가 그의 뒤에서 그를 확 잡아당겼다. 지석은 뒤로 넘어지면서 무의식중에 얼굴을 가렸다. 이빨사이로 새어나온 비명이 모래알과 함께 날아올랐다. 몸이 둔중하게 바위에 부딪히며 삐걱거렸다.
지석이 팔을 치웠을 때 시야를 가득 메운 건 박제된 새처럼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한 요한의 뒷모습이었다. 요한은 쓰러진 지석의 앞을 막아선 채 밑도 끝도 없이 뒷모습을 들이대고 있었다. 검은 그의 등은 이상하게도 편안하고 조용한 느낌을 주었다.
그건 이미 요한 자신이 아니라 요한의 유해에 불과했다.
틱틱거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요한의 몸에서 검은 액체가 튀어올랐다. 총알이 계속 날아와 요한의 몸에 내리꽂혔다. 마침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튀어올랐다.
그리고 모래땅 위에 검붉은 액체가 후드득 쏟아졌다. 허물어지는 것처럼 요한은 오른쪽 무릎을 꺾고 옆으로 쓰러졌다.
"요한."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점점 말수가 없어지긴 했어도 요한은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함께 한 건 고작 일주일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지석은 눈을 감았다. 메마른 눈알이 뜨거웠다.
무의식적으로 움켜쥐고 있던 모래가 손아귀에서 조금씩 새어나갔다.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이봐. 우린 왜 이런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거지? 살아있으니까.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요한의 죽음 때문은 아니었다.
민이가 숲 속으로 걸어갔을 때도 울지 않은 그다.
지석은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머리가 없는 시체가 된 요한이 모래를 적시며 피를 흘렸다. 지석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채 요한의 피가 흘러내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양을 쳐다보았다.
먼 곳에서부터 어벤전의 정글이 다가와 시야 가득 펼쳐졌다.


그렇다. 그가 일기를 쓰지 않게 된 건 그 때부터였다. 그들의 모함이었던 정풍이 격침 당했을 때 거기에 실려 있던 그의 일기장도 불타버렸던 것이다. 지석은 아주 조금씩 생각해냈다. 그는 항상 잠들기 전에 일기를 썼다. 셀의 덮개를 닫아놓고 일기를 쓰면 불빛이 새나가지 않기 때문에 우주선 안에서는 언제까지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가 취침시간마다 일기를 쓴다는 걸 민이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의 옆자리였으니까. 민이는 그에게 일기장을 보여 달라고 조르곤 했었다. 특별히 친한 사이라고 자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둘에게는 뭔가 특별한 연대감이 있었다. 그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가느다란 끈 같은 것이었다. 아원에서 882연대가 재편성 될 때 합류한 민이는 그들이 어벤전에 투입될 때까지 고작 석달 동안 그와 함께 지냈다. 고작 3개월.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좀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는 이 시간이 있었더라면.

지석은 움켜쥔 손을 폈다. 모래가 스스스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지석의 기억들이 조금씩 새어나갔다.
지석은 몸을 굴려 야트막한 바위 아래로 숨었다. 그리고 고개를 조용히 들어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바위산의 사면이 완만한 경사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그 때 그는 비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알량한 양심을 과시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기는 그렇게 비인간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자기 자신에게 호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고 괴로운 척 하고 슬픈 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이마의 수분을 빼앗아갔다.
지석은 허리로 손을 옮겨 허리춤의 프리즘 개스를 끄집어냈다.
작은 원통형의 그레네이드가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공기가 투명한 커튼을 드리운 것처럼 부드럽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발밑의 모래가 무너져 내렸다. 지석은 바위의 사면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발자국 소리와 거친 숨소리는 센서를 꽂지 않은 왼쪽 귀에만 들렸다. 청음센서가 자신의 소리를 거르고 있다. 총알이 대기를 찢으며 날아와 지석의 뒤쪽에 꽂혔다. 고글의 무채색 영상이 위 아래로 흔들렸다. 발이 미끄러지면서 지석은 잠시 휘청거렸다.
미안해. 민아. 난 아직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어.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떠밀면서. 이렇게. 지석은 속으로 절규했다.


달빛으로부터 몸을 숨길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바위 언덕.
지석은 정상에서 우뚝 멈추어섰다.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류사.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김오였다.
돌과 모래가 튀어올랐다. 달빛이 진한 그늘을 그리고 있었다.
두 남자는 무성영화처럼 거칠게 움직였다.  
"그만둬라! 류사! 포기해!"
김오의 거친 목소리가 텅빈 마을의 건물들에 부딪혀 하늘로 날아올랐다.
류사는 대답없이 다시 김오에게 달려들었다.
지석은 총을 들어올렸다.
"류사!"
탄환이 날아갔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지석은 다시, 또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첫 번째 탄환은 가슴을 부수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탄환은 배에 깊은 상처를 내고 등 뒤로 빠져 나갔다. 아키텐, 메다산, 요한. 그리고 이제는 류사의 차례. 차례는 누구에게나 온다.
류사는 무릎을 꿇고 허물어졌다.
김오는 짐승처럼 헐떡이며 찡그린 얼굴로 바닥에 엎드린 채 류사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다.  

바람이 모래먼지를 말아올렸다. 류사는 우물거리며 피거품을 한움큼 토했다.
“멍청하게... 여기가 아니야.”
류사는 배에 난 구멍의 피를 찍어 이마에 묻혔다.
“여기다.”

네 번째 탄환이 류사의 이마를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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