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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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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1/12

사막은 넓고 황량해서 인간의 사고를 표백시킨다. 희끄무레하게 탈색된 머릿속에는 짜증스러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지석은 자신이 타고있는 트럭이 흔들리는대로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트럭의 무한궤도에서 이따금 돌이 튀기는 소리가 났다.
"조장님! 조금만 더 가면 가원입니다."
"뭐라고?"
"조금만 더 가면 도착입니다! 가원 말입니다. 가원!"
요한의 목소리는 트럭의 삐걱거리는 소음에 묻혀 모기소리만큼 작게 들렸다. 지석은 반쯤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규소질이 풍부한 대지는 거침없이 먼지를 피워올리고 있었고 덮개가 없는 트럭의 짐칸에는 적색거성의 따가운 햇살이 쏘아져 내렸다. 4일 동안 600Km를 이동했다. 그 동안 만난 것이라고는 끝없는 황야와 모래와 바람 뿐이었다.
수분의 상실을 막기 위해 뒤집어쓰고 있는 압력두건과 고글 때문에 다른 대원들의 얼굴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등짝과 이마에 그려진 기호에서 관등성명을 간신히 식별할 따름이었다.
류사가 자신의 총검을 꺼내 엉성하게 감아둔 헝겊쪼가리를 풀어헤쳤다. 스트링 블레이드의 지저분한 줄이 드러났다. 류사는 지금까지 3일동안 수도없이 반복해온 행동을 다시 시작했다. 낡을대로 낡은 천으로 줄을 천천히 문지르는 것이다. 그런다고 줄이 반짝반짝 광택을 내뿜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핏자국을 지우는 겁니까?"
삼일동안 침묵을 지키던 메다산이 커다랗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류사는 입술을 일그러렸다. 그리고 메다산을 잠시 노려보다가 시선을 흐렸다. 메다산은 자신의 총을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지석이 쳐다보는 가운데 류사는 다시 줄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헝겊이 훑고 지나갈때마다 핑하는 스산한 소리가 났다. 마치 블레이드가 진동하면서 내는 전투의 소음처럼 말이다.
이 녀석들은 이른바 쇼크 여단의 척후병 출신이라고 했다. 쇼크 여단은 이 행성만의 독특한 군대이다. 어느 작전단 소속인지 정확히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암살을 위해 만들어진 군대라는 건 그 말 뜻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느낌이다.
지석은 시선을 옮겨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향했다. 도리아 시티를 떠나오기 전의 일들이 언뜻 상념처럼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자네. 다른 행성에 가 본 적 있나?"
"다른 행성......말입니까?"
"그래. 다른 별."
지석은 대답을 망설였다. 작전단장이라는 직위는 낮은 자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상관은 아니다. 사실은 서로 소속이 다른 것이다. 작전단장은 루나인의 지상군 소속이고 지석은 아원에서 파견된 우주군 소속이다. 비록 연방의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루나인은 독자적인 통치체제를 갖추고있는 독립행성이었고 따라서 군사체계도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통합전구사령관이 죽은 이후 루나인의 방위체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중력권 방위사령부(IFC, Inner Force Command)는 저궤도상에서 벌어진 격렬한 함대전의 와중에 떨어진 핀트조차 맞지 않은 포격에 궤멸되어 버렸고 아원과 이븐에서 파견된 강습원정군(MEU)은 하나같이 모함을 잃고 미아신세가 되어 루나인의 사막 어딘가를 헤메고 있었다. 사실 교통정리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성의 내행성 궤도에서 적의 함대를 견제하고 있는 루나인 우주군(OFC, Over Forec Command)사령관이나 이븐의 참사관 자격으로 참가한 진안완 원수는 계급으로 보나 직책으로 보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루나인 방어작전의 총지휘권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일단 연방의 최정예 군사력인 센트럴 함대가 개입하면 모든 통수권은 센트럴 함대의 브리지로 통합된다. 그런 상황에서 구멍 때우기 식으로 총탄을 막아설 사람은 없다. 이런 저런 이유로 복잡한 혼성부대의 지휘권은 허공에 붕 뜬 상태였다.
작전단장 코호트 대령은 손끝으로 펜을 돌리면서 흐릿한 눈빛으로 방안의 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랐네. 나는 말일세. 이 지긋지긋한 별을 벗어나 보는게 소원이야."
한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지석은 중얼거렸다.
"전............아원 출신입니다."
지석은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트럭이 붕 뜨는가 싶더니 둔중한 폭음이 작렬했다. 지석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류사의 몸이 모래바닥에 처박히는 모습을 끝으로 공백이 찾아왔다.



도리아 시티에서의 마지막 날, 작전단장의 브리핑은 아무것도 없이 말로 진행되었다.
"아군의 1개 전술조가 이곳. 가원에 주둔하고 있네. 처음에는 1개 전투단이었네만, 뭐 격렬한 전투가 있었지. 자네도 알겠지만 적들이 남하하고 있으니까. 그래, 가원은 전형적인 오아시스 마을일세. 자네 한테는 아마 굉장히 낯설거야. 여기 온 뒤로 대도시밖에 본 적이 없을테니. 고위도의 오아시스 마을은 뭐랄까. 조금 특이하니까. 지표 아래서 물을 뽑아내는 광산이 있고 지도를 봐서 알겠지만 근방 200Km 내에서 유일한 마을이야.
"그곳에서 임무는 뭡니까?"
"강행정찰일세. 사실은 지난 한달동안 연락이 두절돼서 우린 거기있는 사람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만일 적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적은 없어."
"어떻게 압니까?"
"우리의 전단 통신기가 아직 살아있네. 신호를 받았어. 만일 적이 차지했다면 파괴했겠지."
"이상하군요. 위성이 아직 살아있습니까?"
잠시 공허한 웃음.
"나도 잘 모르겠네."
작전단장 코호트는 깍지낀 손을 풀어 무릎을 어루만졌다.
"우스운 일이지만 공식적인 보고상으로는 아직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자네가 보내준 정찰결과를 바탕으로 우린 이 전역을 포기할 건지 아니면 진출해서 좀 더 사수할 건지 결정할 걸세. 가원은 놈들이 상륙한 엘사다에서 적도로 진출하는 최단경로상에 유일한 마을이야. 이해가 되나?"
"예. 됩니다."
지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작전단장의 눈빛을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몇명이면 되겠나. 이백명? 삼백명? 재편을 하는 중이니까 원하는대로 데리고 가게."
작전단장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천장의 불빛에도 입술은 전혀 번들거리지 않았다. 그건 사막에서 막 건져올린 물건처럼 바싹 메말라 있었다.


트럭의 문짝이 삐걱거리다가 잠잠해졌다.
끈적한 액체가 배어나왔다. 아마도 피일 것이다. 지석은 눈을 찡그렸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저녁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직도 완전히 적응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 행성의 대기는 너무나도 건조하니까. 아마 영원히 이 별에 익숙해질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은 보라색이다. 해가 지고 있다.
지석은 모래 위에 드러누운 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출발을 위해 보고하는 자리에서 작전단장은 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손에서 부대 편성표가 조금 구겨졌다.
"열명 모두 뛰어난 대원들이야. 자네 마음에 들 거야. 그런데 정말 열명으로 충분할까?"
물론이다. 사실은 그 열명조차도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이제 이 별의 전쟁은 끝날거니까.
작전단은 곧 퇴각할 것이다. 작전단 뿐만 아니라 루나인의 지상에 진출한 연방군 전체가 이제 곧 퇴각할 것이다. 며칠 전부터 아군의 기간함이 또 한척 격침되었다는 정보가 떠돌고 있었다. 지석은 명령을 거부하고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웃는 얼굴로 헤어지는 편이 좋다. 상대가 피스톨을 빼어들기 전에.
"지금 곧 떠나겠습니다. 별로 준비할 게 없습니다."  
착한 연방 우주군은 루나인을 침략자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이 별에 온 것이고 연방의 성실한 동맹인 루나인은 우주군과 힘을 합해 침략자 광십자군을 물리치기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말이다. 따라서 썪어빠진 루나인 작전단장의 명령에 지석은 성심껏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지석은 우주군 식으로 경례했고 작전단장은 루나인의 방식으로 그걸 받았다. 그건 의례적인 행동이었다. 정말로 의례적인.



"지뢰입니다. 지뢰. 젠장."
요한은 뒤집어진 트럭에 달라붙어 낑낑거리며 부스터를 끌어냈다.
"지뢰."
"유실된 건 아닐 겁니다. 의도적으로 박아놓은 겁니다. 파스캄으로 뿌리면 일분도 안걸리니까요."
유실된 지뢰. 이 곳의 모래폭풍은 무거운 대전차지뢰조차도 말아올려 원래 설치해 놓은 곳에서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내려놓곤 한다. 유실된 지뢰라는 건 그런 의미겠지.
그리고 유실된 지뢰가 아니라는 건...
지석은 실소를 터뜨렸다. 우스운 일이 아닌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이다. 여기는. 그런 사막의 한가운데 지뢰를 묻는다는 건 일종의 농담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트럭의 찌그러진 장갑판에 죽어가는 저녁 햇살이 얼룩지고 있었다.
"이제는 걸어가야겠습니다."
다행한 일이라고 지석은 생각했다. 지석은 이 트럭이 싫었다. 루나인에서 조립된 물건들이 대게 그렇듯 이 반궤도 차량도 시끄럽고 먼지가 많았다. 하지만 지석이 요한과 함께 군단 조병창의 텅 빈 격납고 안에서 발견한 건 이 트럭 한 대 뿐이었다. 명목은 강행정찰이지만 샌드 스키머 (사막에서 사용되는 공기부양차량) 한 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 걸어가야겠지."
하늘 한가운데 루나인의 두 번째 달이 상처자국처럼 희끄무레하게 걸려있었다.
지석은 압력두건 밑으로 손을 넣어 이마의 핏자국을 문질렀다. 메마른 피가 부스러졌다. 트럭과 지면의 사이에 끼어있는 시체의 열없는 눈이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열명의 대원이 다섯명이 되었다.



왼팔이 부러진 운전병은 자신의 부스터 하나만 메고 따라오는데도 계속 뒤처졌다.
"따라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따라오는 게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여기 혼자 남겨지면 어차피 죽게 될 거야. 알아?"
그래도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이는 건 요한 뿐이었다.
비틀거리며 따라오던 아키텐 - 그 운전병의 이름은 아키텐이었다. - 결국 까마득하게 뒤쳐져 버렸다.
달이 가라앉고 해가 떠올라 이마에 닿을 때까지 지석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해가 뜨거워지는데 좀 쉬었다 가죠. 어치피 이젠 그리 멀지 않습니다."
요한은 손을 들어 지평선과 맞닿은 지점에 희미하게 보이는 점을 가리켰다.
그늘이라고는 각자의 발에서 늘어진 자그만 조각 외엔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 지석은 부스터에 기대 드러누웠다. 햇살. 따가운 열기.
메다산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모래땅 위에 안테나를 삼각형으로 세우고 그 위에 천막을 걸쳐서 그늘을 급조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류사는 메다산이 드러눕자 곁으로 다가가 몸을 들이밀었다. 류사의 뒤를 이어 요한이, 그리고 지석이 그늘 안으로 파고들었다. 지석은 햇살속에 드러난 두툼한 신발속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지석은 꿈을 꾸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지석은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그리고 잠시 누운채로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사방이 어둑어둑하다. 땅거미가 짙게 깔린 대지는 스산한 광경이었다. 선선한 공기가 허파 깊숙히 스며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나직한 말소리.
"일어났군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식사는 해야 합니다. 안그러면 탈진해 버립니다. 탈진해서 죽은 사람도 여럿 봤습니다."
요한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싫증이 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식사는 물과 건조시킨 핍 샐러드였다.
지석은 바싹 마른 부스러기를 되는대로 씹어 삼키고 싸늘한 스팀으로 입가를 축였다.
마음껏 목젖을 울리며 물을 마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게 물을 마신 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지석은 요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반투명한 고글 너머로 요한의 눈빛이 희미하게 들여다보였다. 요한은 옷깃을 잡아 펴며 턱으로 지석의 어께 너머를 가리켰다.
"우리가 쉬고있는 동안 따라온겁니다."
운전병이었다. 햇살과 모래바람을 맞아 뿌옇게 탈색된 모습이 마치 흑백의 영상에서 걸어나온 사람 같았다. 그는 모래바닥 위에 구겨져 자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남았으니까 함께 갈 수 있을 겁니다."
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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