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원은 혼자였다. 언제나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김과 함께 다니지 않았고 옆에 앉지도 않았다. 원래 원은 김과 함께 뒤편에 앉았는데, 그 자리에는 김이 혼자 앉고 원은 앞쪽으로 나와 따로 앉았다. 원이 조와 더 가까워진 셈인데, 조는 시계의 각도를 조정해 원이 시야에 들어오게 했다. 그전보다 훨씬 더 또렷하고 크게 원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수의 뒤를 따라 가장 먼저 나가던 조는, 오늘은 교수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자리에 앉아 책을 뒤적이는 척했다. 강의실의 모든 학생들이 나가자 조는 그제서 가방을 멘 다음 윈드 브레이커의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강의실을 나갔다. 복도에는 이미 원이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뒤따라가기 위해 기다린 것이지만 그렇다고 원을 놓쳐서도 안된다. 조는 잰 걸음으로 지하3층에서 지상으로 올라갔다. 단과대 건물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 긴 생머리와 가느다란 블루진 차림의 원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뒤에서 보니 걸음마를 배운지 얼마 안 되는 아기처럼 아장아장 혼자 걷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매우 느렸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을 다해 걷는 것처럼 보였다.

조는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천천히 그 뒤를 쫓았다. 후반기 교육에서 배워둔 미행 기법이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단과대 건물이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조는 원의 바로 옆에 섰다.

“어머! 안녕하세요?”

“수업 또 있어?”

조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물었다.

“아뇨, 없어요.”

“음, 그럼 나랑 커피 한 잔 할까?”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조는 걸음이 느린 그녀와 보조를 맞추면서도 한 편으로 어색하거나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스러웠지만 얼굴이 빨개지거나 손이 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솔직히 지난 주 한현철 일당을 처리하는 임무의 도중에 정이 제이의 얼굴에 겨냥했을 때보다 더욱 떨렸다.

조는 할끔할끔 원을 보았지만 그녀는 조에게 고개는커녕 눈동자도 돌리지 않았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정면을 응시하며 걷고 있었다. 누군가 아는 사람이 조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볼까 두려운 것 같았다.

교회 건너편 매점에 도착했을 때 조는 원에게 캔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날씨도 좋은데 밖으로 나가지.”

“예, 그런데 저, 커피는 안 마셔요.”

“아, 그렇군. 실은 나도 커피는 안 마셔. 그럼 뭐가 좋을까?”

그녀는 조의 질문에 한참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사소한 것들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망설이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두유로 할게. 어때?”

“예. 그럼, 저도...”

조는 차가운 두 개의 우유를 냉장고에서 꺼내 계산했다. 평소 동전을 들고 다니지 않는데 동전이 늘어나 신경 쓰였다.

교회 앞까지 가는 동안에도 둘은 말이 없었다. 조에게는 평정심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막상 어제부터 생각해둔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교회는 산중턱에서 위치한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교회의 입구까지는 50여개의 계단이 있었는데 조는 계단의 맨 위에 앉았다.

원은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평소에도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았다.

“아, 과자라도 사올 걸 그랬나? 좋아하는 과자 있어?

“음... 홈런볼요.”

“좀 달지 않아?”

“예. 달죠. 평소 단 것 잘 안 먹는 편인데 가끔 먹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때 사먹어요. 선배님은요?”

“난 오징어 땅콩.”

“그건 안주잖아요? 술 드세요?”

“그럼. 학교에서는 안마시지만 집에서 혼자 마셔.”

제이와 함께 호텔에서 술을 마시는 일이 많았지만 아직 그런 이야기를 할 단계는 아닌 것 같았다.

“저는 학교에서 안 드시길래 아예 안 드시는 줄 알았어요.”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조금씩은 즐기는 편이야. 그런데, 요즘 혼자 다니네?”

“네... 그렇게 되었네요...”

원은 말끝을 흐렸다. 긴팔의 하얀 니트 카디건 소매를 끌어당기며 입가에 대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김과 사이가 벌어진 것 같았다. 전후 상황을 알 수는 없었지만 결코 조에게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혹시 원에게 접근하려 했던 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조는 추측했다. 단짝과 붙어있는 여자를 사귀는 방법은 그 단짝과도 친해지든지, 아니면 단짝과 소원해져 혼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 밖에 없는데 조는 도무지 떨떠름한 표정의 김과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정과 함께 현장에 투입되는 것과 비교했을 때에도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나을 것 같지 않았다.

“날씨가 좋네. 이제 가을이 될 것 같아.”

“네...”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고 날씨도 추워지겠지. 어때? 추위를 많이 탈 것 같아.”

“예.”

“손발이 차가운 편이지?”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는 놀라며 조의 얼굴을 보았다. 뒤따라와 함께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본 것 같았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더욱 큼지막하게 보였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고 스트레스 받으면 소화가 잘 안되는 편이고...”

“우와...”

“돗자리 펴야겠지?”

“다 아시네요? 어떻게 다 아세요?”

“밤에 잘 때 집안에 들어가서 몰래 만져 봤지.”

평소 냉정해보이기만 했던 조가 농담을 하자 원은 생긋 웃어보였다. 조금 더 크게 웃고 싶은데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실은 나도 그렇거든.”

“어, 선배님도요?”

“‘님’자는 빼줘. 그것 참 듣기 거북한데.”

“네... 의외로 공통점이 많네요. 선배님과 저는.”

“어허, ‘님’자는 사양한다니까.”

조는 두유 팩에 꽂힌 스트로를 빨았다. 하지만 원은 두유 팩을 손에 쥔 채 스트로도 꽂으려 하지 않았다.

“커피를 안 마시고, 손발이 차고... 혹시 두유 좋아하세요?”

“응. 콩으로 만든 건 다 좋아해. 낫토도 좋아하지.”

“낫토? 그게 뭔데요?”

“콩으로 청국장 같이 만든 건데 밥 위에 얹어 먹는 거야. 일본 음식이지.”

“아, 들어본 것 같아요. 그럼 두부도 좋아하세요?”

“두부 좋아. 찌개에는 두부가 빠지면 안 되지. 그럼 와이어 없는 브래지어니까.”

조의 농담에 원이 다시 킥킥거리며 웃었다. 방금 전보다 표정이 더 자연스러웠다. 사무실에서 팀 전원이 대기해서 식사를 사먹기 마땅치 않을 때에는 취사는 조가 담당했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끓일 때 두부를 빠뜨리지 않았는데 팀장만 조금 건져먹을 뿐 제이와 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정은 팀장이 뻔히 앞에 있는데도 식사 중에 ‘똥국은 2훈단을 끝으로 작별했는데...’며 비아냥거리곤 했다.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조는 ‘하필이면 이 귀한 시간에...’ 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나야.”

제이였다.

“응.”

“우리 영화 보러 가자. 지.금.당.장”

맨 마지막에 딱딱 끊어 말하는 투가 범상치 않았다. 약속 시간은 바로 한 시간 뒤로 정하고 끊었다.

“혹시... 선배 여자 친구세요?”

“여자친구는 무슨. 내 주제에. 아냐. 남자 친구 있어?”

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급한 약속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네.”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걸. 참, 그럼 비지찌개도 좋아하겠네?”

“네, 좋아해요.”

“좋아. 인사동에 비지찌개 잘하는 집이 있어. 다음에 같이 가.”

조는 원의 대답도 기다리지도 않고 통통 튀듯이 계단을 한 달음에 뛰어 내려갔다. 원이 거절하는 것도 두려웠지만 가슴이 벅차올라 상기된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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