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헤릭스씨!! 정신차리세요!!같이 나가서 사빅한테 한방먹여주기로 했잖아요!!”
나는 흐릿해지는 사빅을 붙잡아 흔들었다.

“헤릭스? 그게 내이름 이었나? 아 그랬었군......”
존 헤릭스는 잠에서 막 깬 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흐릿해지던 해릭스의 형체는 다시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자 이제 난 얼마 안남은 것 같군. 자네에게 할까 말까 고민하던 이야기가 있었는데....기왕 이렇게 된거, 자네한테 이야기하고 사라져야겠어....”
헤릭스는 애써 눈에 힘을 주면서 나를 보았다.

“자네는 자네나 다른 ‘안’의 사람들이 ‘태어났다’고 생각하나? 아니지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계속 ‘대를 이었다’고 생각하나?”
헤릭스는 화두같은 말을 던지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기계와의 전쟁 이후 패배한 인간들이 매트릭스의 건전지로 전락한 이후, 매트릭스의 메인 시스템은 자신의 전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종을 보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후 인간들은 매트릭스 시스템에 의해 ‘배양’되어졌고 지금 현재의 인간들 몇몇은 기계와의 전쟁 이전의 인간들의 클론들이고 나머지들은 매트릭스 시스템에 의해 인공적으로 유전자가 조합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네오 덕분에 알게된 정보도 몇몇있지. 이 정보는 사빅과 나를 포함해서 몇안되는 사람만 아는 정보야.”
계속 이어지는 헤릭스의 말은 나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6명의 네오가 있었고 시온도 6번씩이나 명멸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트릭스 시스템의 계획에 의해서.

매트릭스 시스템의 리뉴얼을 위해서도 그랬지만 그것 뿐만 아니라 매트릭스 시스템에 의한 인공적인 수정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무작위적인 인간간의 유전자 교환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퍼지나 무작위적인 로직으로 매트릭스 시스템이 인간을 수정시킨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일종의 패턴이 발생하고 그 패턴이 굳어질수록 인간의 멸종과 매트릭스 시스템의 시스템 다운으로 이어질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생각해보게 6번 시온이 반복되는동안 매트릭스 시스템이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연구했는지....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던 모든 연구들을 매트릭스 시스템은 거리낌 없이 시행해왔어, 모든 유전자 조작 및 해부, 유전자 변형, 뇌 신경 조작, 뇌 이식, 뇌에 전기장치를 삽입하는 등의 모든실험들을 말이야....”
헤릭스는 숨이 가뿐 듯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말을 이엇다.

“그 오랜기간동안 그렇게 막강한 슈퍼 컴퓨터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을 연구했지만 찾지 못한 답이 있었지. 인간의 지각 능력중 ‘선험적인’ 부분들과 인간의 ‘자아’라는 개념 이었어. 하지만 기존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지. 바로 인간을 산산히 분해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던거야. 그건 말이야 집을 벽돌 하나하나, 시멘트 입자 하나하나로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었다는 이야기였어. 벽돌과 벽돌사이의 관계 벽돌과 시멘트 철근등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전체를 분석할 필요가 있었지. 그래서 연구재료로 시도된게 6번째 네오였어.......인간을 재조립할 시도로 실험된것이었지”

2.
그 이후의 이야기는 ‘밖’에 나왔을때 ‘부적응자 재교육’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거기서도 빼먹은 이야기가 있지. ‘스미스’라는 이름 들어봤나?”
존 헤릭스는 마치 쪽지시험을 내는 교수마냥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어봤다.

“‘스미스’? 흔한 이름 아닌가요? 지금 시온에서도 이름이 ‘스미스’인 사람을 찾아보세요, 아마 10명중 한명은 ‘스미스’일걸요? ”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해놓고도 갑자기 번개처럼 한가지 이름이 떠올랐다.
“스미스 프로젝트?!”
나는 갑자기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단어를 막을수 없었다.

3.
“그건 실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야, 원래는 현재 helper 프로그램의 전신인 agent 프로그램중 하나의 이름이었지.”
존 헤릭스는 시간이 없다는 듯 ‘스미스’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서둘러 이야기를 했다.

스미스와 네오의 전투, 스미스가 매트릭스내의 모든 프로그램과 인간들을 덮어씌우기 방식으로 감염시킨 이야기, 그리고 네오가 매트릭스안의 인류를 해방시켰으나 해방된 인류의 일부가 스미스가 어떻게 프로그램을 감염시켰고 인간의 의식에 침투했는지 연구중이라는 이야기까지 말이다.

“사빅이 왜 네오를 찾는줄 알아? 실은 ‘스미스 프로젝트’ 자체가 시온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졌었어, 하지만 제대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위해서 필요한게 바로 매트릭스 시스템이 운영하던 ‘인간배양’공장 과 ‘인간실험’데이터야. 그런데 그것은 네오만이 알고있지.....네오가 ‘해방’후 관련 데이터들을 다 숨겨버렸거든”
이야기를 마친 존 헤릭스가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봐요 어디가요!!! 끝까지 버텨야죠!!”
나는 화들짝 놀라서 존 헤릭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여긴 내가 레테의 강이라고 이름붙인곳이야. 이곳 ‘휴지통’의 일종의 경계선이지....얼마남지 않은 볼펜 잉크로 두 사람이 열흘을 버티는것보다 한 사람이 이십일을 버티는게 나을거야. 나는 사라지고 너는 버틴다. 그게 나와 사빅의 차이점이야.......”

바닥은 차이가 없이 온통 하얀데 존 헤릭스가 한걸음씩 나갈때마다 마치 물에 빠지듯이 점점 몸이 잠겨들어갔다. 헤릭스가 한걸음씩 나갈때마다 점점 하얀 바닥으로 점점 빠져들어갔고 헤릭스가 점점 빠져들어갈수록 형체가 점점 희미해져갔다.

나는 하얀바닥에 깊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어가면서 존 헤릭스를 붙잡았으나 그 또한 유령처럼 투명해져서는 잡히지가 않았다.

“헤릭스 돌아와요!! 같이 버텨봐요, 같이 버티다 보면 나갈 길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목이 터져라 하고 외쳤으나 헤릭스는 들리지 않는 듯 점점 하얀 바닥으로 빠져들어갔고 머리만 남았을 즈음 형체가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나는 무릎까지 잠긴 하얀 바닥에서 나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다가 다시 손바닥을 보았다.
손바닥에 쓰여진 ‘알렉스 헤니건-제인’이라는 글자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글자들이 다 지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다시 그 글자들을 손바닥에 적었다.

4.
갈데가 없다.
사방이 온통 하얗다.
발 앞에는 한걸음만 딛어도 빠지기 시작하는 하얀 바닥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닥에 주저 앉아서 손바닥에 쓴 글자가 흐려지기 시작하면 같은 글자를 쓰는 일 뿐이다.

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노파인데......
혹 나도 점점 기억이 지워져 가는걸까?

낮익은 노파는 나를 보면서 힘들게 이야기를 했다.

“여보게 젊은이, 나좀 업고 강좀 건너주겠나? 물이 너무 깊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