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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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시내는 다 둘러 보고 주요 건물들 위치파악은 해놨으니, 큰 공장은 이미 정찰기가 찍어갔고......우리는 작은 공장이나 정부 기관만 찍으면 되겠군."
중경의 한 여관에서는 민간인으로 위장한 일본 병사들의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다.
야마구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지도와 사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랑 원진이랑 두명 뿐이니까, 두개 조로 나누자구. 일단 조 구성은 사진사 한명에 사수 한명, 그리고 통역 한명 이렇게 구성하면 되겠군."
"하지만 저희는 소총이 아니라 권총을 지급받아서 사수 호칭은 좀......게다가 소총이면 몰라도 권총은 쏴본 적도 없어서......"
사수 한명이 조심스레 불만을 토로했다.
"야이 자식아. 시내 들어올때랑 시내 분위기 못봤어? 국민당 괴뢰군 놈들과 빨갱이 놈들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돌아다니고 있는데 장대같은 소총하나 등에 짊어지고 '나 간첩이요.' 하고 대놓고 떠벌일 일 있냐? 그렇게 머리가 안돌아가냐? 뭐 권총으로 보초 몇명 잡은다음 소총을 챙기든 수류탄을 챙기든 알아서 하라는거 아냐? 누가 계속 권총쓰래?"
사수는 무안한지 고개를 숙이고 머리만 긁을 뿐이었다.
"자, 그럼 원진이 니네가 여기, 시청을 중심으로 동쪽을 맡고, 나는 서쪽을 맡도록 하지. 방법은 어떻게 하는지 대충 알지? 주변의 높은 산이나 목표 건물 근처의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찍고 이동하고, 찍고 이동하고......절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총을 써서는 안돼. 되도록 의심 안받게 알아서들 하고. 이상."
야마구치는 지도에 표기된 시청위치를 중심으로 선을 위 아래로 구불구불 하게 그었다. 말이 동과 서로 나눈거지 사실상 동서남북 가릴거 없이 주로 사진 찍기 좋은 건물이 적은 널찍한 장소는 야마구치가 차지하였다. 원진 역시 야마구치를 따라 자신이 가진 지도에 선을 그었다. 사람들이 각자 장비를 챙기고 해산하려고 할때 야마구치가 원진쪽 사수를 불렀다.
"아, 잠깐! 자네는 날 좀 보지?"
나머지 사람들이 다 나간것을 확인한 야마구치는 사수에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 두놈, 원진이랑 이마모토 저 두놈말이야. 도망칠 수도 있으니 잘 감시해. 원진이 저놈 조선놈이라 조선임시정부쪽으로 도망갈 수 있고, 이마모토 저놈은 중국말에 능해서 중국인 틈바구니 속에서 도망을 갈 수 있으니 잘 감시하라고. 우리쪽은 내가 알아서 잘 감시할테니......"
"네, 알겠습니다."
야마구치의 조와 원진의 조는 각자 맡은 구역에서 작은 공장들과 관공서등을 대상으로 사진 촬영을 시작하였다.
"저 건물이 나사 부품 조립하는 곳이고, 그 왼쪽에 보이는 곳이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철강등을 보급하는 보급창이고......"
통역은 공장 입구에 붙여진 상호명이나 공장명 등을 보고 사진사에게 알려주는 역할이었다. 가끔 상호명이나 공장명등이 없는 공장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알아내기도 하였다.
원진 일행은 작은 나사 공장을 찍기위해 근처 상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야, 원진아. 사진찍는거 재미있냐? 나랑 바꿔보지 않을래?"
뒤에 서 있던 사수가 심심한지 말을 걸어왔다.
사실 사수는 거의 일이 없었다. 건물 용도 알아내는 것은 통역이 다 하고, 사진은 원진이 다 찍기 때문이었다. 사수는 그저 그들을 따라다닐 뿐 이었다.
원진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사수는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싫으면 말구......"
원진 일행은 건물 두곳 촬영을 끝낸 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주요 기관등이 몰려있는 시가 중심으로 이동했다.
주요 관공서는 찾기가 수월했다. 국민당은 하얀색 해가 그려진 큰 깃발을 게양하고 있었고 한자와 함께 영어와 독일어등이 쓰여진 건물들이 있는 반면, 공산당은 건물등에 낫과 망치, 붉은 별 등이 그려져 있었으며 한자와 러시아어가 함께 쓰여진 문패가 달린건물들이 많았다.
원진은 그 중 어느 건물부터 촬영을 할까 둘러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자전거와 부딪혀 넘어졌다. 자전거에 탄 양복입은 신사 역시 자전거와함께 쓰러졌다. 자전거 뒤에 매어놨던 가방에서는 서류들이 쏟아져 나왔다.
자전거에 탔던 사람은 손으로 먼지로 인해 더러워진 양복을 털고 일어나 원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치신데라도......"
하지만 원진은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그 사람의 행동이 자신을 일으켜 주려는 행동이라는 것만 알고있을 뿐이었다.
"아......아......"
그때 통역이 끼어들었다. 원진은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통역이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이 친구가 어릴적 부터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어서......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디 다치신데라도......이봐, 어서 일어나서 선생님께 사과드려. 아이고, 이 친구가 숫기가 없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꺼까지야. 뭐 지나가다보면 사람들끼리 부딪힐 수도 있는 것이고......"
원진은 일어나서 그 자전거 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전 괜찮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기시면 여기로......"
신사는 품 안에서 메모지와 만년필을 꺼내어 무언가를 하나 적어서 원진에게 주었다. 주소와 '경문상회'라는 상호였다.
"바쁘신거 같으신데 어서 가셔야 하는건 아닌지......"
통역이 묻자, 신사는 그제서야 급하다는 듯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때 원진의 귀에 낮익은 말이 들렸다.
"아이쿠. 이런, 늦었네."
조선말이었다. 원진은 머나먼 곳에서 조선사람을 만나니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저......"
원진이 신사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통역이 쏟아진 서류들을 주워다 신사에게 건넸다.
"여기 서류......"
"아이구 고맙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볍게 인사를 한 신사는 서둘러 자전거를 세우고 자전거를 타지 않고 손으로 끌면서 주택가 쪽으로 빠른속도로 사라져갔다.
"사람 참 허둥대기는......자, 이제 그만 우리도 빨리 촬영하고 이동하자고."
'오랜만에 만난 조선인이었는데......고향사람일 지도 모르는데......'
"뭐해? 어? 저건 또 뭐야? 저사람 저거저거."
통역은 바닥에 떨어진 채 지나가는 사람들 발에 밟히고 있는 서류 하나를 들었다.
"쯧쯧 내 저사람 그럴 줄 알았어......뭐 내 일도 아니니......"
통역이 서류를 보며 중얼거렸다.
사수는 그러한 통역의 행동을 뒤에서 지켜보며 비웃고 있었다.
'한심한놈 쯧쯧......'
"아니!"
난데없이 통역관이 깜짝놀란듯 소리를 질렀다. 너무 놀라서 일본어가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하지만 너무 짧은 말이라 지나가던 사람들은 일본어라는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소리를 지른 그를 쳐다보면서 미친사람구경하는 마냥 혀를 차며 지나갈 뿐이었다.
"이거 잘 하면 큰 건 하나 잡겠는데?"
"아니 무슨 일인데......"
원진은 아까 그 사람이 했던 조선말도 그렇고 궁금함에 서류를 보았다.
원진 역시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 서류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글귀와 함께 경문상회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자금책으로 활동하는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회사명, 그리고 돈 액수로 보이는 숫자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원진이 그저 놀란것과는 달리 통역은 전혀 딴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국민당과 공산당 세력이 지천에 깔린 중경 바닥이라고 하지만, 이거 의외의 수확인걸? 이거 잘만 이용하면 한 몫 단단히 챙기고 이곳을 떠날 수 있겠어. 흐흐'
통역과 원진의 행동에 궁금함을 참지 못한 사수는 슬며시 접근하여 통역이 들고있는 서류를 보자 통역을 비웃던 눈초리가 감시의 눈초리로 날카롭게 변하였다.
"자, 이제 대충 이곳에서 첫번째로 찍을곳이 선정된거 같으니 그곳으로 이동하자."
통역은 아까 자전거 신사가 사라진 곳으로 이동하였다.
원진은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행동하는 통역의 태도에 의아해 하면서도 통역의 중요성을 아는 지라 어쩔 수 없이 그가 가는대로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사수는 통역을 뒤따라가며 감시의 눈초리를 바짝 세웠다.
어느 주택가로 들어서자, 팻말이 보였다.
"흠 여기가 조선의 임시정부로군. 사진을 찍기로는 저곳이 좋겠다."
통역은 가까운 건물의 옥상을 가리켰다. 건물은 사무실과 살림집이 한데 어우러진 그리 크지않은 다세대 건물이었다.
"그래, 사무실 안까지 훤히 보이는군. 이곳이 좋겠어."
"아니, 우리 임무는 그냥 폭격목표 건물 사진만 찍으면 되는데, 사무실 안까지 보이는게 무슨 상관이야?"
원진이 묻자, 통역은 뜨끔하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아......아니, 그냥 저......뭐 기왕이면 건물 구조를 자세히 찍는게 도움이 되지 않겠어? 뭐 주변에 비슷비슷한 건물들이 워낙 많아야지."
통역의 속을 알 리 없는 원진은 그저 건물을 향해 셔터만 누를 뿐이었다.
하지만 사수는 달랐다. 그는 지금 통역의 속을 꿰뚫어보려고 통역의 말투를 경청하며 말 실수를 잡아내려고 귀를 바짝 세우는 중이었다.
"자, 이제 찍을만큼 찍었으니 그만 이동하자고."
원진과 사수가 계단을 내려갔지만, 통역은 여전히 건물을 보며 웃고 있었다.
"안오고 뭐해?"
원진이 묻자 통역은 당황한 듯 계단쪽으로 걸어왔다.
"어, 알았어. 가......간다고."
원진 일행은 다시 시내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 본 통역이 입을 열었다.
"시내 중심부에는 말이야.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같은 외국 대사나 공사, 영사관등이 많아. 또한 이들 외국인들 거주지도 있어. 이곳은 절대로 찍어서는 안돼. 양 코쟁이놈들 괜히 건드렸다가는 지금 중국과의 전쟁이 세계대전이 될 수도 있거든."
"그건 알고있어. 대충 해가 그려진 깃발달린 건물이나 찍지 뭐."
일행은 가까운 서구식 백화점 건물로 들어갔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저, 어떻게 오셨는지요?"
백화점의 경비였다. 경비는 백화점에 드나들기에는 너무 후줄그레한 복장을 한 일행을 의심스로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통역이 능숙한 중국말로 대답을 하였다.
"아, 저희는 이곳에 피난을 왔는데, 여기 백화점에 일자리좀 구할까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곳에 취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6층에 사무실 있으니 그리 가 보슈."
"감사합니다."
일행이 백화점 중안 계단으로 오르려고 하자, 경비가 막아섰다.
"아 아. 그쪽 말고, 이 건물 쭈욱 돌아가면 뒤로 들어가는 쪽문이 나올것이오. 그리로 가시구랴."
"네, 네 알겠습니다."
일행이 백화점 밖으로 나가자, 경비는 어디서 빗자루를 들고와 백화점 입구를 쓸었다.
"나 원. 전쟁때문에 일자리 구하러 이제 별 사람들이 다 오는구만. 설마, 저들때문에 내가 쫒겨나는건 아니겠지?"
한편 일행은 건물 뒤쪽 계단을 올라갔다. 6층에 도착하자 주위를 살핀 그들은 아무도 보는 눈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옥상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일개 백화점 경비때문에 일을 그르칠뻔했군. 자, 시작하지?"
원진은 흰색 해가 그려진 깃발을 달고 있는 국민당 관청들을 찍기 시작했다. 통역은 뒤에서 지도에 열심히 표시하였다.
한참 표시 작업하던 통역이 원진에게 말을 걸었다.
"아 참, 아까 자전거 그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 적어준 주소 좀 줘봐."
"주소는 왜?"
"아니, 좀 알아두는게 좋을꺼 같아서."
"내가 가지고 있으면 됐지."
통역의 가슴은 원진의 대답에 점점 답답함이 밀려왔다.
"아니 좀 줘봐!"
통역은 막무가내로 원진의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는 지도 한켠을 찢어 그 종이에 적힌 상호와 주소를 받아적기 시작했다.
"아니 지도는 왜 찢어? 상부에서 이 사실을 알면......"
"어차피 이 부분은 필요없는 부분이니 상관없잖아. 나중에 이 형님한테 고맙다고 매달리지나 말라고."
사수는 여전히 통역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사수의 눈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른채 통역은 마냥 신난 표정으로 주소를 옮겨 적었고, 다 옮겨적은 후 원래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원진의 호주머니에 끼워 넣었다.
"자, 이제 돌려줬으니 됐지? 이제 작업이나 마저 하자."
통역은 애써 웃는 표정을 참으며 지도에 표시를 해나갔다.
'좀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임무고, 군복이고 모두 다 안녕이다! 크게 한탕하고, 여기를 뜨는거다. 그나저나 저 두놈이 거슬리는데, 난 지금 무기도 없고......그냥 기회봐서 적당히 둘러대면서 따돌려야겠다. 난 이제 인생 역전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아주 구석진 곳에 힘들게 있던데 저긴 좀 더 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