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느 때처럼) 후드를 내려쓰고서 맥주를 앞에 두고 앉아 있다. 그 옆에는 내가 좀 가리게 아헨이 앉아있고. 이번 건은 아헨도 크게 반대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물론, 내가 이번 건은 절대로! 성당하고 아무런 일도 없을 거라고 거듭거듭 말한 탓이지. 성경 구절밖에 모르시는 어린 성직녀께서 자연철학파가 어쩌고 원소론자가 어쩌고 떠들어대는 걸 알아들으실 리는 없고, 나는 그저 결론만 강조하면 됐다. 아,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성당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은 못하겠다.
일단 나는 뒷골목에서 명성이 높아진 만큼이나 현상수배금도 높아졌다. 물론 그만큼 현상금 사냥꾼들이나 끄나불들이 나와 관련된 일을 하는데 신중해졌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뭐, 혹시 누가 아나? 아무리 애송이들이 덤벼들어도 하루에 몇번씩 나타나면 곤란하다(게다가 거의 필연적으로 피를 보는 것으로 귀결될 테니 아헨은 차라리 나를 자수하도록 설득하려 들 것이다.) 아니면 깊게 챙 모자를 눌러쓰고서 파이프 담배를 입에 질끈 문, 눈 가에 흉터가 인상적인 어느 노련한 모험가가 (그만큼 노련하지 못한)도박판에서 잃은 돈을 충당하기 위해서 수배지를 넘겨보다가 이 녀석이나 잡아볼까, 하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나도 더이상 명성을 즐기기 어려워질 수도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일의 성격... 자연철학파는 그렇다 쳐도, 원소론자들은 분명히 암흑시대와 관련되어있다. 물론 원소론자들의 책은 전부다 1급 금서다. 남아있는 족족 죄다 태워버렸는데 원소론에 대해서 알고있는 것만 해도 분명 이단심판 감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아마 암흑시대의 유적을 발굴하는 일이 될 터이다. 게다가 원소론자들의 주력은 주문이 아니라서 성직자들이 감지할 수도 없고 신성 언령의 영향력도 작아진다. 자연철학파가 이단으로 몰린 이유는 자연을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려 한 것도 있겠지만-그래서 인격신의 개념을 거부했지- 그보다는 원소론자들의 주력과 비슷한 종류의 힘을 다루는 학파들 때문에 미리 장애물은 치워둔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다시 원소론자들의 힘을 일깨워내려는데 과연 성당에서 가만히 있을까? 이런,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또 성당기사단을 마주치는 게 틀림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군. 이건 내가 지난번 신성 언령을 정통으로 얻어 맞은 이후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불안감이지. 불에 손을 덴 아이는 불을 무서워하게 되는 게 아니겠어?
매번 일을 시작할 때마다 자꾸 이러면 곤란하지만, 문제는 내가 교회의 높으신 분들에게 보고될 만한 일을 너무 자주 저지른다는 것이다. 내가 사고를 치는 게 아니라 묘하게 자주 성당기사단이나 이단심문관들과 마주치는데, 내가 여태까지 살아남으려면 상대를 날려버릴 수 밖에 없고, 그러면 또 책임자는 '죄인 네드 라니프가 또 주님의 종들을 해하고...' 어쩌고를 웅얼거리면서 높으신 분들 앞에 고개를 조아리겠지. '그 자의 죄악이 너무도 커서 우리의 얕은 믿음을 주님께서 시험하셨다' 운운하면 여태까지 높은 의자에 앉아계시던 분들이 음, 그래? 주문파쇄자들을 부르도록, 혹은 마법사사냥꾼들을 풀어줘라, 아니면 몸소 나서시기라도 하면 나는 그 때는 끝이다.

"모를린? 그 자의 모가지를 받으러 갈 시간이 되었습니다만."

이크, 이거 역시 망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가는군 그래. 여태까지 부지런히 잘도 도망쳐 다녔으면서 이제 또 벌벌 떨고 앉아있을 수는 없지! 아헨한테 잘 모르면서도 확실하다고 말한 죄책감 때문에 너무 움츠렸다. 얼른 음울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마법사의 이미지를 가다듬으려 노력하면서, 후드 아래의 내 얼굴을 잘 보이지 않게 조금 고개를 들어올려 키란을 쳐다본다.

"이 정도면 이 바닥에서도 한가락 하는 인물들이지요. 자, 이쪽은 레이켄입니다."

흘끗 쳐다보니 생긴 것부터 한가락 하게 생겼다. 딱 맞는 가죽갑옷이 아주 근육 때문에 터져나갈 듯 한데다가, 허리춤에 장검은 가늘어보일 정도다. 옆의 테이블에 기대어 놓은 가죽방패까지, 칼-방패 류의 전형적인 칼잡이. 색이 약간 바랜 금발은 기름기가 번들한 대로 훌러덩 뒤로 넘겼고... 약간 빛나는 이마 아래로 쑥 들어간 눈에 높은 코와 눈두덩이. 어이쿠, 턱까지 뾰죽하니 인상은 그야말로 모범적인 북서부인이다. 인류학 박물관 표본으로 등장할 법한데.

"반갑소. 난 레이켄이요. 칼로 먹고 살지."

이미 나에 대한 소개는 들었는지 손을 불쑥 내밀어온다. 이크? 북실북실한 털투성이인 손등이 쑥 눈앞에 오니, 이거 내 손의 두배는 될지도 모르겠다. 손을 내밀어 잡으려면 어째야 되는거야? 망설이고 있자니 뭔가 상황이 당황스럽다. 레이켄은 손을 내민 채로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쳐다보고 움직일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상황을 타개한 것은 귀를 후려치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다.

"아니, 희끄무레하기만 하고 멍청한 자식아- 네 놈은 그렇게 손을 무조건 들이대는 게 예의냐? 거기다 마법사 님이시잖아! 네 놈의 그 더러운 손바닥에서 뭐라도 묻으면 어쩌려 그래!"

"뭐가 어째 이 자식이! 그래 네 놈의 빌어먹을 예절은 뭐냐? 발이라도 들이대주랴?"

이건 예상밖의 사건 전개인데- 주점 안이야 워낙 시끄러우니까 레이켄이 방패를 기대놓은 테이블의 도박꾼이 카드패를 쥔 채로 흘끗 뒤를 돌아보고 말았을 뿐이지만, 초장부터 이리 으르렁거리다니. 오히려 당황한 것은 키란이다.

"죄송합니다, 이 두 사람이 출신지 때문에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아서-"

"시덥잖은 서부 멀대 자식-"

"동부 촌놈 주제에!"

뭐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두 사람이 온 곳은 알만하다. 대륙 서부는 제국과의 교섭이 비교적 활발한 탓에 나은 편이지만, 동부는 대산맥 때문에 가로막혀서 드문드문하지. 두 지방이 영 사이가 안 좋아서, 한쪽은 멀대라면 한쪽은 촌놈이라고 서로 붙잡고 싸운단 말이야. 가무잡잡한 피부하고 밤색 머리카락만 봐도 이쪽도 대강 알겠군 그래.

"이쪽은 을루트라고 합니다. 둔기류에 일가견이 있죠."

"뭐 부술 게 있다면 맞겨주쇼. 한 방에 날려 드리지."

"헷, 머리속에 든 게 없으니까 힘 밖에 못 쓴단 말야. 그냥 휘두르면 장땡이지?"

"네 놈 대가리에는 뭐가 들었나 까 주랴?"

이거 이거, 내내 이런다면 충분히 골치아프겠다.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서 이렇게 치고박고 난리들이라니! 매일 아침마다 대련을 핑계삼아서 시끄러운 건 아닌가 모르겠네.
을루트라는 자는, 앞서 말한대로 동부인의 혈통을 타고 났다. 훤칠한 키에다가 떡 벌어진 어깨, 나무둥치를 맨손으로 뽑는다거나 곰을 몰아서 사냥을 한다든가 그런 말이 있을 정도니. 비슷하게 가죽 갑옷 차림인데, 대신에 대강 나무를 깎아 만든 것 같은 몽둥이다. 내려놓은 등짐에 끈으로 질끈 묶인 쇠몽둥이가 둘 보인다. 끝에 달린 매끈한 추는 곰 머리통 하나 부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듬직한 전사가 둘이나 되면 나는 좀 뒤로 물러나 있어도 되겠는데? 굳이 한손에 망령의 칼날을 쥐고 한손으로 마법적 발사체를 날려대면서 피를 뒤집어 쓰고 멍들고 할 필요야 없겠다.

"자, 그리고 이쪽은 마지막으로 모셔온 분- 역시 유명하신 분이죠. 피고양이입니다."

으엑, 피고양이? 속으로 흠칫 했다. 날렵하게 생긴, 눈꼬리까지 말려 올라간데다 기름진 머리를 뒤로 동여맨 사내가 까딱 목례만 해 보인다. 검은 옷에 허리를 졸라맨 붉은 끈, 확실히 유명한 놈이다. 마법적인 힘을 지닌 단검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뭐, 몸만 봐도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생겼다. 현장을 피바다로 만든다고 하는 유명한 '청소부'다. 청소부란 건 주로 이 바닥에서 부르는 명칭이고, 말하자면 암살자다. 이름이 뭔지는 아무도 모르고, 그 초인적인 날렵함 때문에 고양이란 별칭을 얻었다. 뭘 상대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거물 급이 나오다니!
저번 주에 본 수배전단에서 이 놈은 금화 오십개였다. 나랑 똑같은 액수긴 하지만, 급이 다르다. 게다가 그 전단은 감찰단에서 만든 것이다. 나 같은 주문 사용자-감찰단에서는 마법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종교재판소 관할이니, 공식적인 수배전단은 없다. 종교재판소의 현상금 수배는 주로 파문당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니, 제국의 경찰력으로는 상대하기에 무리지. 게다가 감찰단은 현상금을 아주 짜게 먹이는 것으로 유명한데, 실제로는 그 두세배 이상은 되는 급이라는 게 많은 현상금 사냥꾼들의 후문이다. 키란에게 붙은 금화 백개 같은 경우는 개인이 붙이는 거니까 논외로 치지. 현상금 액수가 높아지면 더 실력 높은 현상금 사냥꾼이 눈독을 들일 가능성이 커지니까, 개인적인 원한으로 복수한다거나 혹은 꼭 필요한 물품, 정보를 얻어야 할 경우 실제보다 높게 매기기 마련이다.

"이걸로 일행이 여섯 명이 되었군요. 그 자의 목에 칼을 들이대기에 적당한 수입니다."

"바람이 그 동안에 새로 연락해 온 것이 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그 편지를 태웠더니 재를 바람이 가로채어 날아가더군요. 하루 뒤에 이 것이 날아왔습니다. 아, 마찬가지로 물이 자신의 말을 그 편지에 같이 남겼습니다."

키란이 건네는 양피지를 받아 읽었다. 전과 똑같은 재질이다. 이 낡아빠진 양피지, 어느 책에서 뜯어낸 게 분명한데, 원소론자들의 상징인 오망성이 그려져 있는 것-가운데 점이 찍혀 있는 건 뭔지 모르겠지만-을 보면 원소론자들의 책이거나 혹은 어쨌거나 신비학과 관련된 책이다. 그렇다면 협상 상대인 바람도 마법사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원소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만한 수준이라는 걸까.
역시 진중한 필체로, 또 웃길 정도로 진중한 문체다.

'불의 주인에게. 그대의 결의는 마치 그대의 신민들과도 같이 뜨겁고 강렬함을 느낄 수 있었소. 곧 두 원소가 함께 내려칠 저 패악한 자를 상대하기 위하여, 그대와 그대의 가신들을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영광*이 비추는 듯 하외다.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 간략하게 적으리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대지의 *옥좌*가 놓인 곳은 역시 대기의 반대편이었소. 상반되는 영역은 서로를 마주보고, 가까운 특성을 지닌 영역은 서로 이웃하게 되오. 나는 하케리다의 오래된 무덤에서 대지의 원소계에 속한 권속들을 상대했다는 이들을 만난 일이 있소. 그들은 자신들이 위대한 영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으니, *옥좌*의 주인의 자격은 더더욱 없었던 거요. 대지의 *옥좌*가 놓인 곳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눈을 들어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영광*이 그대와 나의 앞길에 머물기를. 신실히, 대기의 주인.'

아래에는 젖은 글씨로 약간은 난삽한 필체가,

'남은 것은 젖은 재 뿐.'

그리고 마찬가지의 물에 젖은 흔적이 원을 이루어 서명을 대신한다. 양피지를 건네 주기 전에 짐짓 머뭇거리는 채 하고 뒤집는다. 이 번 장은 온 장에 무언가가 가득히 적혔던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글의 테두리, 네 모서리에 그려져 있는 문양은 각각 삼각형, 원, 물결무늬, 사각형. 분명 상대는 원소론자들의 책 혹은 원소론에 대해 언급된 책-그것도 오래된-에서 뜯어낸 양피지에 쓰고 있다. 이렇게 오래된 고문서를 발견한 곳이 어딜까? 어디 마법사의 탑에서 얻었다 해도 관련된 문건이 있었을 수가 있으니까, 이것만 가지고는  단정지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읽었던 듯, 키란은 바로 자신의 품 속에 양피지를 집어 넣었다.

"하케리다에는 이미 다녀 왔습니다. 바람이 언급한 무덤을 이미 찾아 보았지요. 아주 오래된 무덤이라는데, 인근의 주민들은 그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만 알 뿐 자세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워낙 하케리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다가, 아주 늙은 노인들도 기껏해야 그곳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들어가면 안된다는 정도로만 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언급한, 먼저 그곳에 들어갔다던 사람들은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술집에 들러서 자기네 무용담을 떠든 일이 있어서 어느 정도 소문을 들을 수는 있었는데, 땅 속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는 둥 칼도 퉁겨내는 석상이 살아서 움직였다는 둥 난쟁이를 봤다는 둥 뜬 소문은 구름같더군요. 그렇지만 대지의 원소계와 관련된 건 분명해 보입니다."

대강 방향은 잡힌 것 같다. 나는 잠자코 있는 아헨의 손을 쓰다듬었다. 이번 건은 분명히 잘될 것이다... 그래, 잘 되겠지. 상대가 눈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죽이는 작자와 뭔가 과대망상인 듯한 자라는 것만 빼고. 일행에 지금도 으르렁 거리고 있는 서부인과 동부인도 빼고, 부담스러운 거물 암살자도 빼고. 목표가 암흑시대의 원소론자들과 관련되었다는 것도 빼고. 이런 이래서야 뭐 남는 게 없잖나. 왠지 모르게 자꾸 불안감이 엄습하는 걸 잊으려고, 아헨의 손을 더 꽉 움켜잡는다.

잡설---------------------------------------------------------------
항상 어느 곳의 게시판이든 소설을 올리다 보면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초두현상과 최신현상....은 아니고-_- 제일 처음 올린 편과 제일 마지막에 올린 편이 가장 조횟수가 높으며 댓글도 물론 그 두 편에 많이 달린다는 점입니다. 가운데 편들은 항상 불쌍하게도 조횟수가 가장 낮아서 그래프를 그려보면 V자 형이 됩니다. =_- 많은 분들이 중간 내용을 보지 않고도 앞과 뒤의 내용만으로 추론해 내는 능력이 있으신 걸까요? 아니면 쭉 내려서 댓글만 보고 뒤로가기를 누르시는걸까요?-_-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게시판에서는 한번 천천히 올린다... 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깜빡하고 그냥 다섯편을 쭈루룩 올려버렸군요. -_- 오늘 아침에 한편 쓴 김에 한편 올립니다. 비축분으로 따지면 밀어내기랄까요~_~
티끌 같은 세상속에 작은 모래알 하나, 한바탕 미친 바람 불고 나면 그 간 곳을 모르온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