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엘튼 반 보그트의 <슬랜>을 읽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정신적/육체적으로 차원이 다른, 초인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절반 정도 책을 읽었을 때 뒷 부분의 전개를 대강 눈치챌 수 있기도 했지만,
여하튼 한 편의 독립된 장편으로 꽤 재미있게 잘 쓰여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20 여년 전에 읽었던 <스페이스 비글>과는 사뭇 다르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그 작가의 작품 맞구나 그런 동일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기도 하고,
<슬랜>은 그 나름대로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도 비정상적인 어려운 상황을 독자에게 잘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이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잘 전달하는 작가의 강단있는 서술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보그트는 문체에 대한 훈련을 의식적으로 수행한 작가이고,
자신이 어떻게 "팔리는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스킬을 연마했는가를
다른 작가 지망생들에게도 널리 알리고자 했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애당초 자신이 타고난 재주가 있고 또 문학이 좋아서 어쩌다보니 글을 쓰고 있다기 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를 팔아서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분명히 했던 사람이죠.
           
과거 <스페이스 비글>을 읽을 때는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만,
이번에 <슬랜>을 읽다보니 보그트가 말한 "팔리는 글"의 조건이 매치되는 것들이 좀 보였습니다.
보그트는 모든 문장, 문단, 챕터 끝에 "항상 뒷 부분이 궁금하도록 여지를 남긴다"는 것과...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미리 정해 주고, 그 안에서 문제 상황을 던진 다음,
그 범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답과 그 범위를 살짝 벗어난 약간 뜻밖의 답을
단계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나름의 스킬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스페이스 비글>은 독립된 단편들을 모아서 연작 단편집으로 만든 책이라 좀 덜했는데,
<슬랜>은 일관된 장편이다보니... 이 테크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잘 드러나더군요. 
        
<슬랜>의 메인 테마는 <엑스맨> 시리즈의 주제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을 훨씬 상회하는 능력을 가진 초인들이 등장하였을 경우,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의 문제이죠.
<슬랜>애서는 "일반인" vs "오리지널 초인" vs "반쯤 초인" 으로 서로 패를 갈러서 대립하고
그냥 대립만 하는 게 아니라 비극적인 전쟁도 겪었고 치고 받고 노상 싸우고 서로 죽이려 듭니다.
초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초인 능력을 가진 꼬맹이가 아주 손십게 백화점을 털고 다니는 몇 장면만으로도,
어쨰서 일반인들이 초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슬랜>을 읽던 중 꽤 인상적으로 다가온 대목 중 하나는...
보통 인간을 월등히 능가하는 초인 과학자들이 마음 먹고 연구한 결과물들은 
일반인 과학자들이 노력해서 내 놓은 업적을 훨씬 더 앞질러 버릴 것이고,
그렇다면 일반인 과학자들은 초인 과학자들이 이미 다 완성해 놓은 연구를 
한참 늦게 뒤따라가는 정도의 역할 밖에는 안되는데...
그렇다면 일반인 과학자들이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였죠.

   
<슬랜>은 줄거리가 단순한 편이고, 등장인물도 그리 다채롭지도 않고,
작가가 마음 먹고 더 독하게 썼다면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읽는이의 기대를 잘 만족시키고 이야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소품 레벨의 장편입니다.
펄프 황금기에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원조 빅 3"의 대표작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너무 늦게 소개된 셈입니다. 불새 SF 시리즈가 큰 일 한 건 했네요. 
  
     
사족으로...
아시모프 자서전에 의하면,
본래 SF계의 "빅 3"는 보그트, 하인라인, 아시모프를 통칭하는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차츰 보그트는 작품 수준이 고만고만한 채로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고,
한참 후배인 클라크가 잇달아 좋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SF 독자들에게 큰 성원을 얻게 되자...
어느새 SF계의 "빅 3"가 하인라인, 아시모프, 클라크로 바뀌었다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