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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편엔 나오지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시리즈의 주인공이라 하면 이 인물을 떠올립니다.]

흔히 <쥬라기 공원>을 본 사람들은 앨런 그랜트가 주인공이며, 작품을 이끌어나가고, 적대자들과 맞서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생물학자라서 적(공룡)과 맞설 지식이 있으며, 고고학자가 그렇듯 현장 발굴을 하면서 얻은 체력과 경험으로 위기를 헤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인디아나 존스의 동물학 버전이랄까. 하지만 소설 속 그랜트는 주인공과는 별 상관없는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 인물이 모험, 그러니까 공원 답사를 결정한 계기는 어디까지나 발굴 비용 지원입니다. 살아있는 공룡을 발견했다는 미심쩍은 증거를 찾긴 했는데, 현재 발굴하고 있는 랩터 화석을 두고 그걸 조사할 만큼 열의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랜트에게 이 일은 어디까지나 주말에 후딱 해치우고 비용이나 타면 되는 부업이었죠.

 

이슬라 누블라로 가는 와중에 제트기 안에서 수학자 아이언 말콤과 만납니다. 말콤은 만나자마자 존 해먼드에게 혼돈 이론을 들먹이며 공원이 망가질 거라고 주장하지만, 그랜트는 그저 듣기만 할 뿐 뚜렷한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말콤이 참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만 할 뿐이죠. 그랜트 역시 강의할 때 양복 대신 청바지를 입을 정도로 현장 탐사를 강조하는 사람이긴 하나 말콤만큼 기행을 벌이진 않습니다. 그리고 공원에 도착해서 공룡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난 뒤에는 엄청난 경외감에 휩싸입니다. 이후 공룡 제조 과정을 지켜보지만, 상업주의에 물든 과학을 비판하는 양심 있는 학자 역할은 별로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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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달리 원래 소설에선 해먼드의 생명 복제 사업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관찰만 했죠.]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앨런 그랜트는 고생물학자로서 존 해먼드의 생명 복제 사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랜트는 살아있는 공룡을 만나자 직접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으며, 틈이 나면 손으로 만져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기회가 생기자마자 랩터 새끼 한 마리 낚아채서 꾹꾹 눌러보며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죠. 그 외엔 옆에서 말콤이 아무리 떠들더라도 가끔씩 동조만 해줄 뿐 해먼드와 적대하는 입장에서 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립적인 입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관찰자로만 머뭅니다. 심지어 랩터 알 껍질을 찾아내 공룡의 자연 번식을 찾아냈음에도 해먼드에게 잘못 되었으니, 조사를 다시 해야한다느니 이런 소리 절대 안 합니다. 말콤만 더 기가 살았을 뿐이죠.

 

이렇다 보니 상업주의 과학 비판은 대부분 말콤 입에서 나옵니다. 작가의 주제를 대변한 사람은 그랜트가 아니라 말콤으로서 수익에 눈이 먼 해먼드와 제살을 깎아먹는 인간 사회를 비판하는 건 항상 이 수학자의 몫입니다. 이 소설에서 인지도가 올라간 혼돈 이론 역시 수학자로서 적용하는 것이죠. 그때 그랜트가 한 일은 별 거 없습니다. 사실 이 인물은 자기 의견을 말하기보다 공룡 정보가 필요할 때마다 알려주는 기계적인 일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 공룡 이름이 뭐죠? 프로콤프소그나투스입니다. 이게 무슨 알 껍질이죠? 무늬를 보니까 랩터 것입니다. 기타 등등. 남들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먼저 말하진 않죠. 주관적 의지가 있는 인물로는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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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선 이 부분에서 그랜트의 표정을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꽤 극적이었죠.]

 

후반부 들어서는 공룡 복제에 혐오감을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때는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뒤였습니다. 고생해서야 정신을 차렸다고 할까요. 말콤은 답사하기 전부터 공룡은 몇 억 년 전의 생물이니까 현대 생태계에 풀어놓으면 좋지 않다 운운했건만, 정작 공룡 박사라는 사람은 입도 뻥긋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그랜트가 학자로서 잘한 일이 있다면 공룡이 알을 낳는다는 걸 발견한 거였죠. 그런데 어차피 이건 그랜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찾아낼 일이었습니다. 이미 자연 상태에서 부화한 랩터 새끼들이 돌아다니고, 섬에서 출발하는 배에까지 올라탔으니까요. 그랜트는 그저 이 발견에 힘을 실어준 것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공룡과의 대결은 어떨까요. 인디아나 존스가 미지의 유적에서 활약하듯 많은 사람들은 앨런 그랜트가 거대한 T-렉스와의 대결해서 승리하는 걸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랜트는 티라노사우루스와도 직접 대결한 적이 없습니다. 일단 무기가 없었고, 그나마 있는 소형 마취총은 씨알도 안 먹혔습니다. 잔머리를 써서 유인한다거나 함정으로 몰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지식이 풍부해서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법을 개발한 것도 아닙니다. 그랜트가 살아남은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입니다. 공격이 빗나가서, 다른 사람이 대신 잡아 먹혀서, 다른 공룡이 난입해 자기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거죠. 명색이 박사라서 멍청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렇다고 T-렉스와 딱히 멋진 대결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살 수 있을 때 도망친 것이 전부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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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라면 동물학자보다 동물 사냥꾼이 한 수 위겠죠. 영화에선 역할이 겹쳐서 강판당하지만.]

 

오히려 공룡과 제대로 싸운 건 노련한 사냥꾼이나 동물 관리를 맡은 로버트 멀둔이었죠. 이 점을 반영해서인지 게임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에선 공룡을 관리하는 게 멀둔의 몫입니다. 그랜트는 본래 역할인 화석 발굴가로 돌아가 재단의 기금으로 DNA 추출할 화석과 호박을 발굴하거나 매매합니다. 어디까지나 야외 현장에서 일하며, 외부인이기 때문에 공원 관계자 중에선 제일 주변에 있는 인물. 여기서도 모델은 영화처럼 샘 닐이지만, 화석 날라다 줄 때 빼고는 그리 만날 일도 없습니다.

 

실제로 영화에선 T-렉스가 랜드 크루저를 뒤집어 엎을 때 아이들을 살리려고 몸으로 뜁니다. 불꽃으로 유인해서 쫓아내기도 하고, 공룡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차에서 아이들을 빼내고, 나무 위로 올라가 팀을 끌어내리기도 했죠. 이와 달리 소설에선 아이들이 탄 랜드 크루저가 절벽 너머로 날아가는 걸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제서야 도망치려고 차에서 내렸지만, 때는 늦었고 공격이 빗나가서 겨우 살았죠. 나무에선 팀이 직접 내려왔고, 그랜트는 팀과 렉스가 만난 이후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 후 익룡 세아라닥틸이 덮칠 때 밀쳐내는 것으로 렉스를 구하긴 합니다만, 딱히 싸움이라고 할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제일 잘 한 일이라면, 아이들을 데리고 통제실로 돌아온 것. 어른인 그랜트가 없었다면 팀과 렉스는 아마 절망해서 길을 잃거나 무력감에 빠져 큰 실수를 했겠지요. 아무리 팀이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하긴 체력으로 승부하는 일에선 답사 일행 중 제일 뛰어났던가 봅니다. 엘리의 기억으로는 전에도 발굴 현장에서 길을 잃었다가 다친 몸을 이끌고 물도 없는 사막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한 적 있습니다. 공룡들이 득실대는 상황에서 동물 전문가만큼 뛰어난 안내자는 없다는 말이 맞긴 한 거죠. 그랜트가 과연 공원에서 빠져나오며 고생물학 지식을 얼마나 발휘했는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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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데려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소설과 영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후반부 들어서는 그래도 랩터 둥지를 직접 찾아나서는 등 학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지만, 이제 와서 그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어차피 잠시 후에 섬이 네이팜 탄에 날아가버려서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지만요. 덕분에 그랜트는 속편 <잃어버린 세계>에 나오지 못합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말콤이 해주기 때문에 굳이 그랜트를 또 끄집어낼 필요가 없었거든요. 뿐만 아니라 그랜트가 T-렉스 습격을 받으면서 세운 가설 티라노사우루스는 개구리처럼 움직이는 것만 본다는 속편에서 리처드 레빈에게 철저하게 부정당합니다. 바보 같다는 욕까지 들으면서요. 장르 문학의 과학자로서는 어딘가 좀 부실합니다.

 

여자 복도 별로 없습니다. 작중에선 조수이자 대학원생인 엘리 새틀러와 사귄다는 암시가 은근슬쩍 나옵니다. 하지만 둘이 애정을 나누는 장면도 없고, 그랜트 본인도 엘리와의 결혼을 부인합니다. 엘리는 벨로시랩터를 유인할 미끼로 자청하면서 그랜트는 신경을 쓸 테니까 그한테 말하지 말라곤 합니다만. 속편을 보면 둘이 결혼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한때 관계가 있었으나 엘리는 다른 남자를 만나 이미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각자의 길을 간 거죠. 참고로 엘리는 각선미가 늘씬한 상당한 미인. 만나는 사람마다 외모를 칭찬하며 다리가 예쁘다는 말을 계속 듣습니다. 남자 등장인물은 처음 엘리와 만날 때 무조건 반바지부터 쳐다봅니다. (영화에서는 로라 던이 이 설정을 살리려고 반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어떨지는 관객의 주관에 맡겨야죠.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이미지였습니다. 어차피 감독이 스필버그니까 성적 매력을 부각할 여지가 없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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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그랜트의 모습. 괴물(공룡)과 싸우는 고생물학자.]

 

그랜트가 주인공이 된 것은 영화의 영향이 클 겁니다. 액션이 필요한데, 고대의 유적지에선 고고학자가, 공룡이 설치는 정글에서는 고생물학자가 제격일 테니까요. 샘 닐이 연기한 그랜트는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구출하고, 공룡을 직접 대면하고, 유인하기까지 합니다. (사냥꾼 로버트 멀둔은 그랜트와 역할이 겹치기 때문에 중반에 죽고 맙니다.) 장르 작품의 주인공으로 따지자면 이쪽이 훨씬 나요. 거기다 초면부터 존 해머드의 사업에 반대합니다. 중생대 생명체를 현대에 풀어놓으면 안 된다며 말콤, 엘리와 함께 반대 의견을 펼칩니다. 이후 액션 게임에서 그랜트가 총을 쏘며 공룡과 싸우게 된 건 물론이죠. 영화에서는 총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교수인지라 제대로 쏘진 못하지만. 그리고 여기선 엘리 새틀러와 한창 열애 중. 아이를 낳는다는 중 하는 계획까지 세웁니다. (물론 3편에 가선 어찌된 이유인지 서로 헤어지지만.)

 

이렇듯 앨런 그랜트는 흔한 고고학자 등과는 달리 모험가나 탐험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작가의 주제를 뚜렷이 드러낼 정도로 주관이 확립된 것도 아닙니다. 아마 작가인 마이클 클라이튼은 공룡 소설이니까 고생물학자가 필요해서 그냥 그랜트를 집어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이 나올 당시, <뉴욕 타임즈>는 화석 사냥꾼이란 뜻에서 인디아나 본즈라는 별명을 붙였지만, 존스 박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엔 부족함이 있죠. 하지만 영화를 거쳐 샘 닐의 이미지가 널리 알려졌고, 지금은 아마 고생물학자로서는 장르계에서 제일 유명할 겁니다. 애초에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과연 장르계에서 이만큼 인지도를 얻는 고생물학자가 또 나올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