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J. G. 발라드로 영국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신 모 교수님을 만나뵈었습니다. 여러가지로 제가 잘 알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말씀해주셔서 참으로 유익한 자리였지요. 발라드의 넓고 넓은 작품 세계, 그리고 나른하고 따분한 줄거리답지 않은 줄거리로 글을 써나가는 방식, 그래서 발라드가 SF 작가이면서도 오히려 순문학 계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J. G. 발라드 원작을 영화화한 <태양의 제국>과 <크래쉬> 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J. G. 발라드의 자전소설 <태양의 제국>을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할 당시 주인공 제임스로 등장하였던 꼬마가 다름아닌 <터미네이터 4>에서 존 코너의 역할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이라는 것 등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크래쉬>에서도 약간 바보스러운 주인공 이름은 여전히 제임스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J. G. 발라드의 <크리스탈 월드 Crystal World>에 대해 과거부터 생각해 왔던 것을 여쭈었습니다. <크리스탈 월드>의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결정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으로 강물을 따라 배를 타고 들어가는 대목에 대한 묘사, 그리고 주인공의 관찰자 시점을 통해 모든 마을이 전멸한 결정의 세계로 안내해가는 묘사 방식이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속 (= 암흑의 핵심 Heart of Darkness)>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그러자 J. G. 발라드는 본래 조셉 콘라드의 굉장한 팬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제가 중학생 시절 처음으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을 영화로 볼 때만 해도 그 원작이라는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속>을 제대로 읽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어둠의 속>을 읽으면서도 <지옥의 묵시록>과 제대로 매치시킬 수 없었죠. 하지만 운좋게도 <크리스탈 월드>는 <어둠의 속>을 읽고 얼마 안되어 바로 책을 잡았기 때문에, 상당히 무시무시한 이야기인데도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읽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울 수 있었습니다. 이후 넌픽션 <레오폴드왕의 유령>을 일부러 구해 보는 등 계속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찾아 본 것은 당시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였죠.
서양의 독자들은 처음부터 <어둠의 속>을 필독서로 쉽게 접하고 읽어왔을 것입니다. 만일 누구나 <어둠의 속>을 다 읽고 나중에 <크리스탈 월드>를 읽는다면, 모두가 다 얼마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요. 원작에 대한 오마쥬는 그 오마쥬를 모두가 알 수 있을 때 더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SF를 소개할 때, 한국의 독자들이 서양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위대한 원작을 잘 모른다는 것도 큰 난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브루스 스털링의 <스키즈매트릭스 Schismatrix>를 2003년 처음 읽을 때 애를 먹었던 것은, 번역에 사용된 고유명사도 거슬렸고 주인공의 줏대없는 성격도 마음에 안들었지만, 무엇보다 갈팡질팡하는 줄거리 전개가 영 집중을 방해하고 정신사납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식으로 줄거리를 이어갈까 납득이 안되는 경우도 좀 있었고, 이런 책이 어째서 불멸의 걸작이라는 것일까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습니다.
의문이 해소된 것은 2006년 월터 스콧의 처녀작 <웨이벌리 Waverley>가 국내에 최초로 초역되면서부터입니다. 원작이 쓰여진 게 1814년이니까 무려 한국에는 200 년이 다되어서 번역본이 나왔고, 서구의 영미문화권에서는 안읽은 사람이 없는 누구나 다 아는 불멸의 걸작이지만 한국에서는 읽은 사람이 거의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웨이벌리>를 읽어나가면서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스키즈매트릭스>는 다름 아닌 <웨이벌리>를 토대로 SF로 배경을 바꾸어 다시 써 놓은 오마쥬에 해당하는 작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서양에서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 중에 <웨이벌리>를 모르는 이는 별로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브루스 스털링이 <스키즈매트릭스>에서 꽤 난삽하게 두 세계를 갈팡질팡하는 줄거리와 주인공을 내세워서 이야기를 전개하더라도, <웨이벌리>를 누구나 다 알고 읽고 친숙하게 여기는 문화적 배경을 가진 곳에서는 별로 이해하기 어려울 게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고, 딴은 제가 읽는 순서가 거꾸로 되었기 때문에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던 셈이었죠.

왕년에 알프레드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 tiger tiger>를 처음 읽고,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 크리스토 백작>은 재미있는 데 <타이거 타이거>는 영 꽝인 것 같다고 천리안 멋신에 글을 썼다가, 홍대인이 호되게 질책(?)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타이거 tiger>를 꼭 읽고 그 분위기를 느낀 다음에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를 읽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죠. 나중에 블레이크의 시를 읽고 나니 베스터가 묘사한 불타는 사나이가 어떤 것인지 뒤늦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뭐 비슷한 경험은 다른 작품을 읽어나갈 때도 겪었습니다. 작품 자체가 워낙에 훌륭했기 때문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지만, 네빌 슈트의 <그날이 오면 (=해변에서 On the Beach)>를 처음 읽었을 때와 나중에 네빌 슈트에게 결정적인 모티브를 제공한 T. S. 엘리어트의 시 <투명인간 (The Hollow Man)>을 읽고 나서는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엘리어트가 묘사한 그 공허함을 나름 품위있게 서정적으로 재해석하여 핵전쟁 이후의 세계로 변주한 것이 바로 네빌 슈트의 소설이었으니까요. 
SF라는 장르는 그렇지 않아도 읽으면 읽을수록 깊고 또 깊은 세계입니다. 또 자기들끼리 SF 사이에 오마쥬로 활용하거나 나름대로 변주하는 경우도 무척 많죠. 하지만 더 나아가, 서양 문화권에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고전들이 SF에서도 빈번하게 재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그 동안 간과해 오지 않았나 싶더군요. 특히 한국에서는 SF와 같은 특정 장르 소설을 읽는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클래식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약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알고 읽으면 재미있을 수 있는 책을 오히려 재미없게 읽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도 좀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