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2.
딱, 하는 경쾌한 타격음이 금빛 다이아몬드와 은빛 라이트 사이를 갈랐다. 좌익수와 중견수가 급히 달려갔지만 공은 그 둘 사이에 떨어져 펜스까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1루 관중석에서는 아쉬운 한숨이 흘러나왔고 3루 관중석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요란했다. 타자주자는 무사히 2루에 안착했다.
“야구공의 실밥이 몇 개인지 아나? 108개 일세. 108 번뇌지. 작은 야구공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지. 벤치의 감독과 코치, 그라운드와 덕아웃의 선수들. 그리고 관중석과 TV, 인터넷의 문자중계를 보는 팬, 프런트들까지 말일세. 9회 투아웃까지 잘 잡아놓고 공 하나 때문에 우는 게 야구지. 1-0이 끝까지 안 뒤집어 질 수도 있지만 7-0이 7-8로 뒤집어 질 수 있는 게 또한 야구야. 야구는 우리네 인생의 압축판이지.”
나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1루석과 3루석을 제외하고는 관중석은 비어 있었다. 3천명 남짓이나 될까.
“1970년대 고교 야구부터 따라다녔지. 경남고 최동원, 대구상고 김시진, 군산상고 김용남, 부산상고 노상수부터 대구상고 이만수와 부산고 양상문을 거쳐 선린상고 박노준과 김건우 콤비까지 말야.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하고 나서는 MBC 청룡의 이종도가 삼성 이선희에게 만루홈런 때리는 걸 동대문 운동장에서 봤네. 물론 한대화의 일본전 스리런 홈런 또한 잊을 수 없지. 저쪽 폴대에 그 홈런볼이 맞는 걸 두 눈으로 봤지. 그때 대한민국은 2002년 월드컵 16강 이탈리아 전에서 안정환이 골든골을 넣었을 때 이상으로 환호했다네.”
어느덧 500ml 두 캔 째를 마시는 노인은 기분이 좋아진 듯 진부한 말들을 신나게 떠벌렸다. 노인은 붉은 색 소매가 두드러지는 검정색 야구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라이트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왼손은 작은 성냥갑을 만지작거렸지만 담배를 꺼내지는 않았다.
“옛날에는 커브 하나만 잘 던져도 에이스였어. 최동원의 커브는 일품이었지. 정민태와 김상엽만 하더라도 커브를 던졌어. 선동렬의 시대가 되어 유행한 건 슬라이더였어. 타자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이었지. 진필중만 하더라도 전성기에 슬라이더가 좋았는데 말야. 김용수의 포크볼도 잊을 수 없지. 그런데 요즘에는 커브 던지는 투수는 거의 없어. 체인지 업이나 싱커, 투심 패스트 볼, 포심 패스트 볼까지 구질이 다양해졌지. 변화구에도 유행이 있어.”
정신을 잃었던 나는 류의 병원으로 옮겨졌고 이틀이 지난 뒤 깨어났다. 그녀의 눈빛에는 의문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깨어났을 때 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당황했지만, 모르는 의사보다는 편했다. 류에게 누가 나를 데려왔느냐고 물었고 류는 다리를 저는 사내가 내 핸드폰으로 전화해 집에서 쉬고 있던 것을 나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류는 나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을 테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5월초의 저녁 공기는 상쾌했지만 야구는 지루했다. 시간도 정해놓지 않고 비대칭인 경기장에서 막대기로 작은 공을 치는 이런 스포츠에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다.
“역시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보군.”
노인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시선만큼은 여전히 그라운드를 향했지만 분명 내게 하는 말이었다. 노인과 내가 앉은 자리의 7m 이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녹아 흘러내리는 걸 봤다는 말이군.”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맥주캔을 입에 가져갔다. 왼손은 여전히 성냥갑을 만지작거렸다. 권중호가 나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B4 계획이라고 들어봤나?”
박 의원이 들고 나왔던 파일이 기억났다. 아마 그 파일은 총잡이에게 전달되려던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전까지의 무기와 전략 개념을 모두 쓰레기통에 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걸세.”
나는 뒷말을 기다렸지만 노인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맥주 캔을 깨끗이 비우고는 쥐고 있는 오른손으로 우그러뜨렸다. 노인은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기지개를 폈다.
“요즘 야구는 옛날 같지 않아. 고작 3,000명도 안 왔다니.”
갑자기 오늘 경기에서 들었던 가장 큰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내 앞에 야구공이 떨어졌다. 주위의 모든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허, 자넨 운도 좋아. 어서 홈런 볼을 줍게.”
-----------------------------------------------------------------------------
집으로 돌아와 포털 사이트에서 ‘B4 계획’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정확히 들어맞는 웹페이지는 없었다. 국내 포털에서 구글닷컴까지 영문으로도 검색을 시도했지만 쓸만한 내용은 없었다. 애당초 나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야구장에서 주워온 홈런 볼을 바라보았지만 딱히 좋은 생각은 나지 않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와인을 꺼내 머그 컵에 따라 마셨다. 어차피 냄새를 맡지 못하니 맛도 잘 모르지만 그냥 마시고 싶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창 밖을 바라보았지만 야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머그 컵을 들고 모니터 앞으로 돌아와 북마크 해둔 기사 ‘박문기 의원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다시 읽었다. 새롭게 짚이는 것은 없었다. 나는 기사 말미의 기자 이메일 주소를 복사해 아웃룩 익스프레스의 개인 계정으로 한 줄짜리 메일을 보냈다. ‘비포 계획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쓴 입맛을 다시며 컴퓨터의 전원을 껐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뭐해?”
원이었다. 하지만 원의 목소리보다는 권중호에 대한 생각에 잠겨 간단한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나를 알고 있던 것일까.
딱, 하는 경쾌한 타격음이 금빛 다이아몬드와 은빛 라이트 사이를 갈랐다. 좌익수와 중견수가 급히 달려갔지만 공은 그 둘 사이에 떨어져 펜스까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1루 관중석에서는 아쉬운 한숨이 흘러나왔고 3루 관중석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요란했다. 타자주자는 무사히 2루에 안착했다.
“야구공의 실밥이 몇 개인지 아나? 108개 일세. 108 번뇌지. 작은 야구공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지. 벤치의 감독과 코치, 그라운드와 덕아웃의 선수들. 그리고 관중석과 TV, 인터넷의 문자중계를 보는 팬, 프런트들까지 말일세. 9회 투아웃까지 잘 잡아놓고 공 하나 때문에 우는 게 야구지. 1-0이 끝까지 안 뒤집어 질 수도 있지만 7-0이 7-8로 뒤집어 질 수 있는 게 또한 야구야. 야구는 우리네 인생의 압축판이지.”
나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1루석과 3루석을 제외하고는 관중석은 비어 있었다. 3천명 남짓이나 될까.
“1970년대 고교 야구부터 따라다녔지. 경남고 최동원, 대구상고 김시진, 군산상고 김용남, 부산상고 노상수부터 대구상고 이만수와 부산고 양상문을 거쳐 선린상고 박노준과 김건우 콤비까지 말야.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하고 나서는 MBC 청룡의 이종도가 삼성 이선희에게 만루홈런 때리는 걸 동대문 운동장에서 봤네. 물론 한대화의 일본전 스리런 홈런 또한 잊을 수 없지. 저쪽 폴대에 그 홈런볼이 맞는 걸 두 눈으로 봤지. 그때 대한민국은 2002년 월드컵 16강 이탈리아 전에서 안정환이 골든골을 넣었을 때 이상으로 환호했다네.”
어느덧 500ml 두 캔 째를 마시는 노인은 기분이 좋아진 듯 진부한 말들을 신나게 떠벌렸다. 노인은 붉은 색 소매가 두드러지는 검정색 야구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라이트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왼손은 작은 성냥갑을 만지작거렸지만 담배를 꺼내지는 않았다.
“옛날에는 커브 하나만 잘 던져도 에이스였어. 최동원의 커브는 일품이었지. 정민태와 김상엽만 하더라도 커브를 던졌어. 선동렬의 시대가 되어 유행한 건 슬라이더였어. 타자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이었지. 진필중만 하더라도 전성기에 슬라이더가 좋았는데 말야. 김용수의 포크볼도 잊을 수 없지. 그런데 요즘에는 커브 던지는 투수는 거의 없어. 체인지 업이나 싱커, 투심 패스트 볼, 포심 패스트 볼까지 구질이 다양해졌지. 변화구에도 유행이 있어.”
정신을 잃었던 나는 류의 병원으로 옮겨졌고 이틀이 지난 뒤 깨어났다. 그녀의 눈빛에는 의문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깨어났을 때 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당황했지만, 모르는 의사보다는 편했다. 류에게 누가 나를 데려왔느냐고 물었고 류는 다리를 저는 사내가 내 핸드폰으로 전화해 집에서 쉬고 있던 것을 나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류는 나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을 테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5월초의 저녁 공기는 상쾌했지만 야구는 지루했다. 시간도 정해놓지 않고 비대칭인 경기장에서 막대기로 작은 공을 치는 이런 스포츠에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다.
“역시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보군.”
노인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시선만큼은 여전히 그라운드를 향했지만 분명 내게 하는 말이었다. 노인과 내가 앉은 자리의 7m 이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녹아 흘러내리는 걸 봤다는 말이군.”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맥주캔을 입에 가져갔다. 왼손은 여전히 성냥갑을 만지작거렸다. 권중호가 나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B4 계획이라고 들어봤나?”
박 의원이 들고 나왔던 파일이 기억났다. 아마 그 파일은 총잡이에게 전달되려던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전까지의 무기와 전략 개념을 모두 쓰레기통에 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걸세.”
나는 뒷말을 기다렸지만 노인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맥주 캔을 깨끗이 비우고는 쥐고 있는 오른손으로 우그러뜨렸다. 노인은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기지개를 폈다.
“요즘 야구는 옛날 같지 않아. 고작 3,000명도 안 왔다니.”
갑자기 오늘 경기에서 들었던 가장 큰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내 앞에 야구공이 떨어졌다. 주위의 모든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허, 자넨 운도 좋아. 어서 홈런 볼을 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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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포털 사이트에서 ‘B4 계획’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정확히 들어맞는 웹페이지는 없었다. 국내 포털에서 구글닷컴까지 영문으로도 검색을 시도했지만 쓸만한 내용은 없었다. 애당초 나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야구장에서 주워온 홈런 볼을 바라보았지만 딱히 좋은 생각은 나지 않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와인을 꺼내 머그 컵에 따라 마셨다. 어차피 냄새를 맡지 못하니 맛도 잘 모르지만 그냥 마시고 싶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창 밖을 바라보았지만 야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머그 컵을 들고 모니터 앞으로 돌아와 북마크 해둔 기사 ‘박문기 의원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다시 읽었다. 새롭게 짚이는 것은 없었다. 나는 기사 말미의 기자 이메일 주소를 복사해 아웃룩 익스프레스의 개인 계정으로 한 줄짜리 메일을 보냈다. ‘비포 계획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쓴 입맛을 다시며 컴퓨터의 전원을 껐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뭐해?”
원이었다. 하지만 원의 목소리보다는 권중호에 대한 생각에 잠겨 간단한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나를 알고 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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