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호출 요망’
‘사랑해’, ‘보고 싶어’는커녕 ‘전화해 줘’도 아니고 ‘호출 요망’? 어이가 없어진 나는 원의 문자 메시지를 삭제하며 제이에게 전화했다. 경비원은 밖으로 나오는 내 모습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옷에 피가 묻지 않은 모양이다.
“나야.”
“아아, 수고.”
잠이 덜 깬 듯한 목소리였지만 제이는 내가 3분전에 처리한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만나고 싶은데.”
“지금?”
“지.금.당.장.”
제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녀석은 압구정동의 오뎅바 한 곳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차에 돌아온 나는 그대로 시동을 걸어 도곡동을 빠져 나왔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방금 들어갔다 나온 건물이 보이지 않게 되자 갓길에 차를 멈추고 오른손을 들어 뺨과 입가를 쓰다듬었다. 상기되어 열기가 느껴졌다. 조용한 차 안에는 가쁜 숨소리가 울렸다. 실내등을 켜고 햇빛 가리개에 붙은 거울 속의 얼굴과 상의를 훑어본 다음, 고개를 숙여 트레이닝 재킷과 바지, 그리고 스니커즈까지 뜯어보았다. 핏자국은 없었다. 제이가 제대로 된 자료를 주었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압구정동 근처에서 5분을 헤맨 끝에 오뎅바를 찾을 수 있었다.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는 취객을 태우기 위한 택시를 제외하면 차가 거의 없어서 천천히 차를 몰면서 오뎅바를 찾았는데 큰길에 있어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제이는 자꾸 차에 네비게이션을 달라고 권했지만 나는 지도를 볼 수 있는 내 능력을 고집스럽게 믿었다.
월요일 출근을 위해 다들 잠들었을 시간이라 오뎅바 안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제이는 양손을 깍지 낀 채 입가를 가리고 앉아 있었다.
“어서 와.”
제이는 나를 맞으며 따뜻한 사케 두 잔을 시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종을 마셨고 제이는 끓고 있는 오뎅을 하나 집어 조곤조곤 씹었다.
“요즘 말야, ‘철도 여행의 역사’를 읽고 있어.”
“볼프강 쉬벨부쉬?”
“맞아. 너도 읽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과 유럽의 철도에 대한 발상 자체가 달랐다는 언급 기억 나?”
“응”
제이는 다 먹은 오뎅 꼬치를 테이블에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던힐을 입에 물고 말을 이어나갔다.
“철도가 생긴 유럽에서는 이미 마차를 비롯한 육상 교통이 발달되어 있었지만 아무런 교통 수단이 없는 황무지에 철도를 통해 개척해야 했던 미국은 유럽과 입장이 달랐지. 미국인들은 철도를 증기선과 같은 개념의 일부로 보아 차 안에서 이동하고 잠잘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 말야. 철도에 대한 인식은 유럽보다 나중에 생긴 미국이 앞서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미국보다는 유럽이 철도 교통의 비중이 더 높지. 미국은 철도보다 비행기에 더욱 의존하는 추세이고 말야. 아마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비교해도 미국보다 국내선 비행기가 발달한 나라는 없을 거야.”
나는 제이의 장광설을 건성으로 들으며 오뎅에는 손도 대지 않고 묵묵히 사케만 죽이고 있었다. 제이도 눈치를 채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제이는 말없이 담배를 한 모금 맛있게 빨았다.
“다들 그런가?”
나는 따뜻한 사케가 서서히 위에서 흡수되어 혈관을 거쳐 머리로 올라오는 기분을 느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자신이 슈퍼맨이나 사이보그라는 생각 말야. 자신에게 숨겨진 초능력이 있는데 스스로 모르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우연히 깨닫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
“멋지게?”
“멋지게. 정의를 위해 악당을 물리친다든가...”
“맞아. 다들 그런 생각하지.”
“그렇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지?”
“그럼. 다들 어릴 땐 그렇지. 넌 아직도 그런 생각 해? 나이가 몇 살이냐?”
“술 때문인가... 그렇게 많이 취한 것 같지 않은데.”
나는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려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사케 잔 너머로 제이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어릴 적에 그런 생각 안 해봤어? 그러니까 TV, 냉장고, 책상, 의자, 프라모델... 뭐 그런 것들이 내가 자고 있을 때에는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움직이다가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면 제자리를 찾고 근엄하게 움직이지 않는 거야.”
“역시 넌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해. 그래서 걱정돼.”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사랑해. 함께 영원히 살고 싶어.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농담 마. 진지하게 묻는 거야. 회사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아버지는 자네를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해.”
또 아버지. 고약한 코드 네임이다.
“자네의 가장 큰 장점은 언제나 묵묵히 일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일에 개입시키지 않아. 주어진 일은 불평이나 변명 없이 반드시 매끄럽게 처리해. 술, 담배는커녕 커피도 안 마셔. 성실하지. 그래서 최고 수준이라 하는 거야. 아버지도 만족스러워 하고 있어.”
“그런데 왜 부인과 개에 대한 자료가 없었지?”
“아, 미안해. 회사에서 실수했어.”
제이는 내가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일말의 거리낌이나 머뭇거림 없이 실수라고 받아넘겼다.
“걱정 마. 거물이기는 했지만 알아서 잘 처리될 거야. 죽은 사람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잖아? 정말 무서운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야.”
제이는 호언장담하며 나에게 건배를 권유했다. 나는 어정쩡하게 잔을 들었고 제이는 내 잔에 자신의 잔을 강하게 부딪치고 작은 눈을 일그러뜨리며 낄낄거렸다. 만족스런 모양이다.
“잘 했어.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 잘 알아. 당분간 푹 쉬어. 일거리 안 줄 테니.”
제이가 총잡이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나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제이는 태워주겠다는 내 제안을 거절하고 절룩거리며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하긴 나는 제이가 어느 동네에 사는지조차 아직 모른다.
‘사랑해’, ‘보고 싶어’는커녕 ‘전화해 줘’도 아니고 ‘호출 요망’? 어이가 없어진 나는 원의 문자 메시지를 삭제하며 제이에게 전화했다. 경비원은 밖으로 나오는 내 모습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옷에 피가 묻지 않은 모양이다.
“나야.”
“아아, 수고.”
잠이 덜 깬 듯한 목소리였지만 제이는 내가 3분전에 처리한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만나고 싶은데.”
“지금?”
“지.금.당.장.”
제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녀석은 압구정동의 오뎅바 한 곳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차에 돌아온 나는 그대로 시동을 걸어 도곡동을 빠져 나왔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방금 들어갔다 나온 건물이 보이지 않게 되자 갓길에 차를 멈추고 오른손을 들어 뺨과 입가를 쓰다듬었다. 상기되어 열기가 느껴졌다. 조용한 차 안에는 가쁜 숨소리가 울렸다. 실내등을 켜고 햇빛 가리개에 붙은 거울 속의 얼굴과 상의를 훑어본 다음, 고개를 숙여 트레이닝 재킷과 바지, 그리고 스니커즈까지 뜯어보았다. 핏자국은 없었다. 제이가 제대로 된 자료를 주었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압구정동 근처에서 5분을 헤맨 끝에 오뎅바를 찾을 수 있었다.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는 취객을 태우기 위한 택시를 제외하면 차가 거의 없어서 천천히 차를 몰면서 오뎅바를 찾았는데 큰길에 있어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제이는 자꾸 차에 네비게이션을 달라고 권했지만 나는 지도를 볼 수 있는 내 능력을 고집스럽게 믿었다.
월요일 출근을 위해 다들 잠들었을 시간이라 오뎅바 안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제이는 양손을 깍지 낀 채 입가를 가리고 앉아 있었다.
“어서 와.”
제이는 나를 맞으며 따뜻한 사케 두 잔을 시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종을 마셨고 제이는 끓고 있는 오뎅을 하나 집어 조곤조곤 씹었다.
“요즘 말야, ‘철도 여행의 역사’를 읽고 있어.”
“볼프강 쉬벨부쉬?”
“맞아. 너도 읽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과 유럽의 철도에 대한 발상 자체가 달랐다는 언급 기억 나?”
“응”
제이는 다 먹은 오뎅 꼬치를 테이블에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던힐을 입에 물고 말을 이어나갔다.
“철도가 생긴 유럽에서는 이미 마차를 비롯한 육상 교통이 발달되어 있었지만 아무런 교통 수단이 없는 황무지에 철도를 통해 개척해야 했던 미국은 유럽과 입장이 달랐지. 미국인들은 철도를 증기선과 같은 개념의 일부로 보아 차 안에서 이동하고 잠잘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 말야. 철도에 대한 인식은 유럽보다 나중에 생긴 미국이 앞서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미국보다는 유럽이 철도 교통의 비중이 더 높지. 미국은 철도보다 비행기에 더욱 의존하는 추세이고 말야. 아마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비교해도 미국보다 국내선 비행기가 발달한 나라는 없을 거야.”
나는 제이의 장광설을 건성으로 들으며 오뎅에는 손도 대지 않고 묵묵히 사케만 죽이고 있었다. 제이도 눈치를 채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제이는 말없이 담배를 한 모금 맛있게 빨았다.
“다들 그런가?”
나는 따뜻한 사케가 서서히 위에서 흡수되어 혈관을 거쳐 머리로 올라오는 기분을 느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자신이 슈퍼맨이나 사이보그라는 생각 말야. 자신에게 숨겨진 초능력이 있는데 스스로 모르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우연히 깨닫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
“멋지게?”
“멋지게. 정의를 위해 악당을 물리친다든가...”
“맞아. 다들 그런 생각하지.”
“그렇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지?”
“그럼. 다들 어릴 땐 그렇지. 넌 아직도 그런 생각 해? 나이가 몇 살이냐?”
“술 때문인가... 그렇게 많이 취한 것 같지 않은데.”
나는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려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사케 잔 너머로 제이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어릴 적에 그런 생각 안 해봤어? 그러니까 TV, 냉장고, 책상, 의자, 프라모델... 뭐 그런 것들이 내가 자고 있을 때에는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움직이다가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면 제자리를 찾고 근엄하게 움직이지 않는 거야.”
“역시 넌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해. 그래서 걱정돼.”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사랑해. 함께 영원히 살고 싶어.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농담 마. 진지하게 묻는 거야. 회사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아버지는 자네를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해.”
또 아버지. 고약한 코드 네임이다.
“자네의 가장 큰 장점은 언제나 묵묵히 일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일에 개입시키지 않아. 주어진 일은 불평이나 변명 없이 반드시 매끄럽게 처리해. 술, 담배는커녕 커피도 안 마셔. 성실하지. 그래서 최고 수준이라 하는 거야. 아버지도 만족스러워 하고 있어.”
“그런데 왜 부인과 개에 대한 자료가 없었지?”
“아, 미안해. 회사에서 실수했어.”
제이는 내가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일말의 거리낌이나 머뭇거림 없이 실수라고 받아넘겼다.
“걱정 마. 거물이기는 했지만 알아서 잘 처리될 거야. 죽은 사람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잖아? 정말 무서운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야.”
제이는 호언장담하며 나에게 건배를 권유했다. 나는 어정쩡하게 잔을 들었고 제이는 내 잔에 자신의 잔을 강하게 부딪치고 작은 눈을 일그러뜨리며 낄낄거렸다. 만족스런 모양이다.
“잘 했어.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 잘 알아. 당분간 푹 쉬어. 일거리 안 줄 테니.”
제이가 총잡이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나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제이는 태워주겠다는 내 제안을 거절하고 절룩거리며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하긴 나는 제이가 어느 동네에 사는지조차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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