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SF, 판타지, 무협 등 다양한 장르의 창작 소설이나 개인의 세계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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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라는 큰 제목 하에 여러 단편을 묶은 이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은 삶에 관한 것들입니다.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전의 작품들은 자살이라든지, 시체의 영혼같은 삶의 반대편에 위치한 죽음에 관한 것들을 소재로 삼았었습니다.
찰리라는 이 작품은 그것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한 인간. 정확하게는 한 여성의 삶의 시작부터 마지막 가까이까지를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들을 쓴 이후로 저는 매번 아침에 눈을 뜰때마다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연속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인간의 어제와 오늘, 내일의 연속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참으로 경이적인 기적의 연속이라고 봅니다.
오늘 눈을 감았는데, 내일은 두 번 다시 눈을 못 뜰 수도 있습니다. 천지지변같은 외부적인 환경 위협도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알 수 없는 붕괴로 인하는 경우도 비일 비재하지요. 이것은 단순히 노화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고, 그래서 대비하기도 어려운 순간들입니다.
소설을 쓸 때 저는 이런 인간의 연속성을 담고 싶었습니다. 어린 치기로 너무 큰 영역에 손을 댔다는데에는 적지 않게 부끄럽기도 합니다. 너무 좁은 시각으로만 볼 수 밖에 없고, 실제로도 작품에서는 그대로 나타났으니까요.
한 소녀가 태어나 자라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그 평범하고 당연한듯한 일상사가 아마도 이후에 제가 담고 싶었던 소설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동성애자들, 리틀 맘, 싱글 맘, 문제아들에 대한 소재들을 자주 쓰고, 지속적으로 쓰려고 생각중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현재 상황이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공통적으로 가지는 일상사를 담고 싶으니까요.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만, 이러한 글 쓰기는 아마도 계속 될 것 같습니다.
1인칭 서술자인 찰리는 마지막에 보셨듯이 의자입니다. 영어로 의자라는 단어인 체어(chair)와 찰리(charlie)라는 사람 이름과의 스펠링 유사성에서 기인한 서술자입니다. 작품 내내 독자들에게 찰리가 사실은 의자라는 무생물이라는 걸 최대한 감추고 싶었던 의도였습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독자들이 "아, 의자였던 거야?"라는 다소 허탈 할 수도 있는 느낌을 드리는게 배치 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군요.^^;
찰리라는 의자를 서술자로 선택한 것은 아마도 제가 전형적인 한국인이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이 부정은 하지만, 결국 한국이라는 땅과 문화 토양에서 자란 이상 그런 면이 가릴래야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해외의 작품들에서도 무생물이 이런식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찰리는 말하자면 무당들이 흔히 말하는 몸주내지 집안 수호귀신 같은 존재입니다. 영국의 브라우니와는 또 다른데, 한국의 토속 무속상에서 수호신들은 그저 집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식구들을 지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모습을 드러내면 그 집안이 망한다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물론, 찰리는 의자라서 언제나 노출되어 있지만, 그가 아가씨에게 품은 연정이라든지 한 가족들의 비극과 그 극복 과정에서 말없이 힘이 되어 주는 면에서 묵묵히 지켜보다는 것이 그런면에서 저는 한국적인 면이라고 생각합니다.(우기는 건가...^^;)
예전에 로가디아님과 술을 주고 받으면서 이야기를 한 한국적인게 과연 무엇인가라는 이야기중에서도 아마 비슷한 말이 오고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국적인건 주인공이 한국 사람이거나, 의복등이 한국적인게 아니라, 그걸 쓰는 작가의 테마와 할려는 의도라고 말이지요.
아직은 멀지만 계속해서 가야 할 길이라면 지금은 잠시 쉬었다 갈 생각입니다. 아주 쉬는 건 아니고, 힘 차리면 다시 돌아올 생각입니다.^^; 이 소설처럼 말이지요.
찰리라는 이 작품은 그것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한 인간. 정확하게는 한 여성의 삶의 시작부터 마지막 가까이까지를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들을 쓴 이후로 저는 매번 아침에 눈을 뜰때마다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연속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인간의 어제와 오늘, 내일의 연속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참으로 경이적인 기적의 연속이라고 봅니다.
오늘 눈을 감았는데, 내일은 두 번 다시 눈을 못 뜰 수도 있습니다. 천지지변같은 외부적인 환경 위협도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알 수 없는 붕괴로 인하는 경우도 비일 비재하지요. 이것은 단순히 노화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고, 그래서 대비하기도 어려운 순간들입니다.
소설을 쓸 때 저는 이런 인간의 연속성을 담고 싶었습니다. 어린 치기로 너무 큰 영역에 손을 댔다는데에는 적지 않게 부끄럽기도 합니다. 너무 좁은 시각으로만 볼 수 밖에 없고, 실제로도 작품에서는 그대로 나타났으니까요.
한 소녀가 태어나 자라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그 평범하고 당연한듯한 일상사가 아마도 이후에 제가 담고 싶었던 소설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동성애자들, 리틀 맘, 싱글 맘, 문제아들에 대한 소재들을 자주 쓰고, 지속적으로 쓰려고 생각중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현재 상황이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공통적으로 가지는 일상사를 담고 싶으니까요.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만, 이러한 글 쓰기는 아마도 계속 될 것 같습니다.
1인칭 서술자인 찰리는 마지막에 보셨듯이 의자입니다. 영어로 의자라는 단어인 체어(chair)와 찰리(charlie)라는 사람 이름과의 스펠링 유사성에서 기인한 서술자입니다. 작품 내내 독자들에게 찰리가 사실은 의자라는 무생물이라는 걸 최대한 감추고 싶었던 의도였습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독자들이 "아, 의자였던 거야?"라는 다소 허탈 할 수도 있는 느낌을 드리는게 배치 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군요.^^;
찰리라는 의자를 서술자로 선택한 것은 아마도 제가 전형적인 한국인이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이 부정은 하지만, 결국 한국이라는 땅과 문화 토양에서 자란 이상 그런 면이 가릴래야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해외의 작품들에서도 무생물이 이런식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찰리는 말하자면 무당들이 흔히 말하는 몸주내지 집안 수호귀신 같은 존재입니다. 영국의 브라우니와는 또 다른데, 한국의 토속 무속상에서 수호신들은 그저 집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식구들을 지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모습을 드러내면 그 집안이 망한다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물론, 찰리는 의자라서 언제나 노출되어 있지만, 그가 아가씨에게 품은 연정이라든지 한 가족들의 비극과 그 극복 과정에서 말없이 힘이 되어 주는 면에서 묵묵히 지켜보다는 것이 그런면에서 저는 한국적인 면이라고 생각합니다.(우기는 건가...^^;)
예전에 로가디아님과 술을 주고 받으면서 이야기를 한 한국적인게 과연 무엇인가라는 이야기중에서도 아마 비슷한 말이 오고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국적인건 주인공이 한국 사람이거나, 의복등이 한국적인게 아니라, 그걸 쓰는 작가의 테마와 할려는 의도라고 말이지요.
아직은 멀지만 계속해서 가야 할 길이라면 지금은 잠시 쉬었다 갈 생각입니다. 아주 쉬는 건 아니고, 힘 차리면 다시 돌아올 생각입니다.^^; 이 소설처럼 말이지요.
분위기는 좋았고, 약간 기대하게 만드는 전개도 좋았는데 결말이 약간..허탈해지더군요.
조금 아쉬웠습니다.
한국적인 색채를 살릴 생각이셨다면 조금 다른 형태로 표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묵묵히 바라보는 존재로서의 위치에서 어느 순간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고 사라지는 결말은 좋지만 그것이 조금 다른 형태였다면 더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결말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예를 들면 죽어갈때 꿈에 나와서 데려간다든가. 찰리가 때가 되었다는 걸 알고 걸어와서는 아씨, 이제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말한다든가. (호러인가요. 빈 의자가 또각 또각 오는 식이라면 호러일지도 모르겠군요. 나이 든 노인이 아씨, 저에요. 모시러 왔습니다. 하니까 여주인공이 아, 찰리, 데리러 와 줬구나.)
유언을 할때 찰리를 같이 묻어줘 같은 식도 나쁘지 않을 듯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