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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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완벽하지 않은 사람은 싫습니다."
출국길에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소란스러운 주위의 소음이, 음소거 버튼을 누른 텔레비젼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대답없이,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쓰디쓴 액체는 마치 내 기분처럼 떨떠름하게 목을 넘어갔다.
"조금의 결점도 없는 인공생명체를, 언젠가, 만들어 볼 테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나요, 하고 그녀는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행 전광판의 글자가 붉은색에서 녹색으로 바뀐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나는 여행가방을 쥐고,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그녀의 질문은, 대답할 이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었으니까.
* * * * * * * *
─「The Horizon Of Memories」
◇레이커는 벽장을 열고, 언뜻 보기에는 장난감같은 기관총을 꺼내었다. 목표물과 목표물의 동반자는, 꼬이고 얽히고 미로같은 통로를 따라 이 곳으로 오고 있다. 당장 들이닥칠 것은 아니지만, 시간적 여유는 그리 많지 않았다.
"멜로리아. 기초적인 기관총류 조작법은 알고 있겠지."
휙 던져오는 그것을 간신히 잡은 그녀는 총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VZ-61 스콜피온이다. 탄약 무게를 합쳐도 2kg정도의 가벼운 무게에, 어린애라도 쏠 수 있다고 할 정도의 약한 반동을 자랑하는 스콜피온은, 여성이 다루기에는 최적의 기관단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령이라도 쥔 것처럼 한 손으로 총을 쥐고 굽혔다 폈다 하던 멜로리아는 탄약통을 챙기면서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나로는 안 되는데. 이거, 연사속도가 너무 빠르니까 금방 재장전해야 할 거야. 적어도 2개, 많을 수록 다다익선."
"너 정도의 명중률이면 하나로도 충분할 거라고 판단했다."
레이커 자신은 그것보다 조금 큰 총을 꺼내쥐었다.
"허나 벽장 안에 3개 정도 여유분이 있으니까, 욕심나면 챙겨가도 괜찮다. 이 연구소는 방어용 총이 있으니까 편리하다만, 점거사태를 대비하여 탄약은 분산 저장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버리면 곤란하다."
"별 희한한 점을 걱정하네요."
뚜벅뚜벅 벽장으로 다가간 멜로리아는 허리춤에 두 정의 총을 끼웠다. 그리고 여분의 총알을 재어 넣으며 말했다.
"내가 너보다 이 연구소에 오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어차피, 시나리오의 끝은 여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총을 팍팍 숨겨두었던 거야. 상식적으로 과학목적 연구소에는 이런 게 없잖아?"
"과연, 듣고 보니 그렇군."
그는 납득이 갔는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러니까 레이커, 이제 어떡하지? 저들 둘이 여기에 온다면, 누가 누구를 공격해야 하는지 역할분담을 해야 할 것 아냐."
"나는 목표물을 노리겠다."
"그러면 나는 동반자를 공격하는가. 그렇다면, 너는 또 실망할텐데."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기름을 닦으며 그녀는 말했다.
"목표물은 평범한 소년이잖아."
"평범...하다고 말했는가, 멜로리아."
"응. 임무 브리핑에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엇, 아니면..."
손을 닦으면서 가벼운 대화를 하려다가 의외로 심각한 벽에 부딪힌 그녀는 시선을 레이커로 돌리면서 말했다.
"사실은-무지 강한데도, 일부러 브리핑에서 속였다는 거야?"
"그래. 역시 너는 이해력이 빠르군."
철컥 철컥, S&W M500 Revolver에 탄약을 장전하면서 레이커는 말했다.
"서클이 원하는 건 목표물의 '몸'이다. 지금까지는 산 채로 잡아들이라는 명령이었지만, 너무 실패를 거듭했는지 이젠 생사불문. 시체라도 가져가면 된다."
"사람을 죽인다는 거야?"
"뭐 단순하게 추려낸다면 그런 말이다."
M500을 어깨에 걸쳐매며 대답하는 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만약을 대비한 권총 하나를 품 안에 숨겨넣었다. 어떤 무기든지 예비가 있으면 좋다고, 좀 전의 라스와의 대결에서도 톡톡히 깨우치지 않았던가. 무사안일한 그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눈에 띄게 하얘졌다.
"너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동반자의 발을 묶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으...응?"
"그러니까, 살인의 죄를 짊어지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임무의 귀결은 목표물의 획득. 당신은 이미 임무에서 맡은 임무를 모두 해냈다. 지금부터 일어날 충돌은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하나의 여흥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신나게 싸우되, 시간만 끌면 된다."
빙빙 둘러서 말하고 있지만, 결국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그녀는 밝은 표정을 짓고 레이커의 등을 팡팡 쳤다.
"괜찮아-! 네 말은, 총을 쏘면서 싸우는 시늉만 해라는 거지?"
"그래. 너의 명중률이라면 빗나가게 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행여 실수라도 동반자가 맞는다 하더라고, 스콜피온의 화력이라면 가벼운 총상 정도겠지."
점점 가까워 오는 목표를 모니터로 보면서 레이커는 말했다.
"말이 복잡해 진 듯 하군. 나는 안서민을, 당신은 동반자를 각자 담당한다. 당신은 내가 목표물을 획득할 동안에 시간만 끌면 된다."
단순 명쾌한 결론에 그녀는 즐거운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연구소에는 우리 둘 뿐이니까 방해요인은 동반자 하나 뿐인거지?"
"라스도 고려해야지."
아무래도 꺼림칙한지 그는 아랫입술을 이로 뜯으며 말했다.
"우리가 만들어 냈지만, 전투능력은 나 레이커를 필적할 정도로 뛰어나다. 그리고 너-멜로리아-가 라스에게 내린 『능력』이 어디까지 발달한 지도 우리는 추측이라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어금니를 갈며 멜로리아는 말을 내뱉었다.
"걱정마, 그 따위 실패작은 무시해버려."
"어째서 라스를 그렇게 매도하는가. 지금껏 너와 몇 년동안 연구를 했지만, 네가 그렇게 '혐오한다'는 감정을 드러낸 것은 라스 뿐이었다."
"그래? 그거 참, 기묘한 일이군.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그냥, 생리적으로 기분나쁠 뿐이야. 생각을 해 봐라 생각을! 객관적으로 봐도 라스는 그다지..... 어라?"
말을 하는 도중 그녀는 말을 끊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레이커는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다지, 실패한 편은, 아니었는데...?"
"이제야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는가, 라스의 어머니."
이제 목표물은, 정말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레이커는 말했다.
"라스는 '아르모니코'를 통틀어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였고, 케이스이고, 케이스일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그처럼 완벽에 가깝게 기계를 포팅한 '사이보그'는 없었어. 그런데도 너는 항상 라스를 지독하게 미워했지. 다른 연구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나에게 말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네?"
멍 하니, 레이커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 멜로리아는 시선을 허공에 두고 다시 중얼거렸다.
"어째서 라스를, 내가 미워했던 걸까..."
◇미로를 헤매지 않고 탈출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바로, 한 쪽 벽을 손으로 짚고 끈기있게 걸어가는 것이다. 어떤 미로라도 출구는 뚫려있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단점이 있다면 엄청나게 끈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에 오른 쪽으로 한 번만 돌면 출구가 나온다고 해도, 왼손을 짚고 있었다면 엉뚱한 길을 엄청나게 방황한 뒤에야 미로에서 빠져나온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리고 우린 멋지게 방황해버렸다.
"빠져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삼촌은 드디어 땀이 나기 시작한 이마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이번 미로는, 답이 없는 줄 알았다."
"동감합니다. 이 연구소는 개성이 철철 넘치네요. 처음 온 직원이라면, 출근하다가 일 다 보겠어요."
그렇게 우린 재미도 없는 농담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어두침침한 통로를 걸어갔다. 바닥재나 벽재를 보면 최근에 지어진 연구소같다. 밝지는 않지만 시야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적당히 흐릿한 조명은, 오히려 바깥의 어둠보다 눈에 부담을 적게 준다.
부비트랩 하나 없는 통로를 따분하게 걸어가던 우리는, '쿵-!'거리는 소리를 신호탄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쿵쾅 거리는 소음은 커져만 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걱정도 비례해서 커지는 순간에 복도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왔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구간에서 나온 것을 보니, 위치적 어드밴티지를 얻으려고 때맞추어 나온 듯 했다. 적은, 총 같은 것을 우리에게 겨누었다. 실루엣을 보건대 저 총은, 딱 잘라서 이거다 말하기는 힘들지만 기관단총 같다.
거리는 25에서 30걸음. 원거리 무기가 없는 이쪽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게다가 정신없이 뛰어 온다고, 엄폐물이고 정찰이고 뭐고 없이, 마구 달려온 바람에 이제와서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가는 벌집이 될 것이다.
"윽─"
짧게, 삼촌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적은 부동 자세로 우리에게 총구를 내밀고 있다. 머리를 굴린다고 어떻게 될 상황이 아니다. 침을 꿀꺽 삼킨다. 방아쇠에 올린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나와 삼촌을 죽일 수도 있다.
탈출방법이 없다.
「쿠궁」 또다시 복도가 울리는 굉음.
뒤를 살짝 보던 적은 결심을 했는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어디, 그 특기인 잔머리를 굴려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 보시지? Mr.Tabris-."
뜻밖에도, 들려온 목소리는 가느다란 미성이었다.
"너는,"
설마. 말문이 막혔는지 삼촌이 제대로 말을 끝맺지도 못하는 사이, 적은 총을 든 채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10 걸음 떨어진 곳까지 금발을 찰랑거리며 다가온 적은, 마치 씨익하고 소리가 날 듯한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 설마야. 오랜만이야, 안영로 씨."
"9년 만의 재회이군, 멜로리아 슈테른."
믿을 수 없는지 놀라지도 못하고 삼촌은 말을 이었다.
"어째서 네가 이런데서, 총을 쥐고 있는거지?"
"글쎄요, 과연 그 이유가 뭘까요?"
꼬맹이가 '난 몰라요'하는 것처럼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적은 총구를 돌려, 삼촌의 미간을 정확하게 겨냥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가끔은, 알 듯 모를 듯 한 게 재밌는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적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나에게 돌렸다.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는 여자의 눈은 결코 웃는 게 아니었다.
나 참, 이런 건 싫다.
"─억지로 그러지 말아요."
"무엇을, 말이야? 지금 나 보고 하는 말이야?"
"네. 저는, 당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심안(心眼)을 써서 볼 것도 없다. 저 여자는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애써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 속으로는 자신을 죽일 것처럼 혐오하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는 것처럼. 강한 척, 대담한 척, 무덤덤한 척.
한 두번도 아니고, 여자가 이러는 건 참을 수가 없다.
"억지로 그렇게, 감정을 속이지 말아요."
"웃기지마..."
너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라며 적은 웃어보일려고 애를 쓴다. 삼촌을 겨냥하고 있는 총구는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신, 사실은 짜증내고 싶은 것 아닙니까."
"웃기지마... 나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거야!"
소리를 지르면서 적은 다시 얼굴을 삼촌에게 돌렸다.
"그래... 9년 전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말을 했었지. 그때, 너를 없애야 했었어. 너와 대화하면서 내가 이렇게,"
적은, 방아쇠를 쥐고 있던 검지손가락을 꾸욱 누른다.
"이렇게, 변해버렸으니까."
「드르르르르르륵-!」
화려한 불꽃을 튀기며 탄피가 튄다.
삼촌 걱정할 여유는 없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적 앞까지 달려갔다. 어느새 짙게 낀 화약연기 사이로, 슬로모션처럼 총구가 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피이잉-」 "큿!"
살짝 머리를 스친 듯 한 기분. 왼쪽 귓볼이 날아갔다. 충격파로 귀가 상했는지 균형감각이 흐트러진다. 비틀거리면서 달려간 나는, 밑에서 위로 힘껏 적의 배를 올려찼다. 좋아, 제대로 들어갔다.
여자는 후욱─하는 버거운 숨을 쉬며 몇 미터를 날아갔다.
총을 걷어차기엔 상황이 긴박하다. 고개를 돌려서, "삼촌,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운이 좋았는건지 삼촌의 몸엔 직격으로 명중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적에게 달려든 타이밍이 썩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잠시 멈칫하던 나는 일단 쓰러져 있는 삼촌에게 걸어갔다.
걸어가서 1초도 안되어 후회했다.
"이이익...."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적은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런 복부의 충격에 바로 정신차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저래서야 총을 냅다 갈겨버릴지 모른다.
방금 전에 제압했을 때, 바로 무기를 빼앗아야 했다.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 땐 머리가 새하얗게 표백되어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단 말이야.
"목표물은 끼어들지 말란 말이야!"
"일어서요, 빨리!"
나와 적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삼촌과 적 사이에 어중간하게 있는 나는, 그나마 몇 걸음은 가까이에 있는 삼촌의 팔을 잡고 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공포라는 본능이 지배하고 있어서 고개가 돌아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처를 입긴 입었는지 삼촌의 호흡이 불안하다. 잠깐만 견디세요, 라는 격려의 말도 하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만 뛰어간다. 차가운 낫처럼 등골을 찌르는 사신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었다. 총을 쥔 사신은 어째서인지 추격하면서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방심해서 당했었지만 이젠 어림도 없다.' 라고 생각했을까.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인지 알 방법이 현재 없지만, 일단 우리의 등짝에 총을 쏘지 않았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강자의 여유감인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얄팍한 안도감. 0.5초 뒤에 죽어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기묘한 긴장감 속에서 나와 삼촌은, 다시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 ─나는, 처음으로 자신을 믿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도망칠 수 없도록 구속당했다. 딱히 해결책이 없는 지금, 천천히 기억을 탐색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일주일 뒤에는 강제소거 당하는 나의 두뇌는, 드러나지 않는 잠재의식에 백업(Backup)본을 예비로 놓아둔 모양이다.
떠오르지 말아야 할, 떠오를 수가 없는 기억들이 챠르르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기억의 페이지를 넘기며, 필요한 페이지에는 책갈피를 꽂았다.
쏟아지는 모래알 속에서, 값진 금가루를 찾아라.
도움이 되는 기억이 필요한 지금, 굵은 줄기만 찾아라.
곁가지는 베어버리고 무가치한 자료 망각의 늪으로 밀어라
". . . . . . . "
상처에서 밀려오는 고통이 정신을 맑게 한다.
10분인가 30분인가. 시간 감각이 흐트러지는 가운데에서, 라스는 유용한 페이지를 발견하였다. 그 단편을 자신의 능력으로 전이하는 것은 용이했다.
오랜 정신노동 끝의 소녀의 얼굴은 피로 젖어 있다.
피로 젖은 소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 "정말 신기한 일이지 않나, 멜로리아."
"그러게 말이네."
둘은 멍 하니, 굉음을 내며 벽을 뚫고 들어온 라스를 바라보았다.
서민의 집에서 얻어입은 티셔츠는 세로로 찢기어 단추없는 망토가 되었다. 이마부터 배까지, 빨간 매직으로 선을 그은 듯 상처가 벌어져있었고 탈출한다고 몸을 심하게 움직였는지 굳어버린 핏덩어리 위로 새로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손목에는 끊어진 수갑이 팔찌처럼 매달려 있다.
그런데 발이 이상했다.
천장에 단단히 매어두었던 발목이, 없어졌다.
복숭아뼈 아래로 발이 있어야 할 곳이, 수수깡처럼 평평한 기둥 모양으로 잘려나가있다. 라스가 '서 있는 곳'은 금새 붉은 웅덩이가 생겼다.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을 보는 멜로리아의 눈은 경악으로 떨렸지만 레이커에게는 앞으로 펼쳐질 시나리오가 더 중요했다.
"그 상처로는 5분도 견디지 못할 거다. 상처의 수준을 떠나서, 너는 이미 많은 양의 혈액을 유실했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몸으로 와 봤자 너는 나를 막을 가치가 없다."
냉정한 상황판단을 끝으로, 레이커는 완전히 라스에게 흥미를 잃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멜로리아를 밀면서, 어깨에 들러 맨 M500을 쥐고 방을 나서려는 때에 라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커 T. 슈비츠."
문을 열면서 그는 돌아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나에게는 너를 막을, 가치조차 없다고 했지?"
"그런 허언으로 시간을 끌려고 했다면 착각한 거다."
"그렇다면 그 가치를 만들어주마."
라스는 오른쪽 다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레이커는 소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잘려나간 발목의 단면에서 희미하게 먼지구름이 일어나면서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감고 있던 투명붕대를 푸는 모양으로 발이 「재생」되었다.
호오. 레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가치있다.
"멜로리아."
"으,응?"
"예정을 변경해야 겠다. 너는 일단 둘의 발을 묶어."
"잠깐만! 그 목표물 사실은 무지 강하다고-"
말을 하려던 멜로리아를 손짓으로 제지하였다. 철컥. 리볼버의 안전장치를 풀면서 레이커는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그 놈, 남에게 상처를 줄 사람이 아니니까 걱정마. 하지만 라스는 분명히 나를 방해한다. 여기서 대치하고 있으면 시나리오가 뒤틀려지는데, 그건 너도 바라는 것이 아니겠지."
"그러면 네가 라스를 없앨 때까지 나는 둘을 상대한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다. 저 건방진 사이보그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놓고, 금방 돌아오마."
더이상 할 말은 없다고 선언하듯이 일방적으로 시선을 거두고 레이커는 옆 방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두 발을 재생한 라스가 맨발로 뒤를 쫓아간다. 홀로 남겨진 멜로리아는 아무도 듣지 않을 말을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레이커는 안색의 변화 없이 빠르게 장소를 이동한다. 총에 장전된 500매그넘 탄을 사용하기엔, 지하실처럼 좁은 장소는 불리하다. 연구소의 주 기둥이라도 건드리면 꼼작없이 흙더미에 파묻히기 좋은 것이다.
이동하는 스피드로 치자면 레이커도 대단하지만, 그를 뒤쫓는 라스도 정말 대단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고도 남을 정도로 피를 흘렸지만 어차피 라스의 몸은 '뇌'를 제외하곤 그다지 피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자신을 유인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소녀는 레이커의 등만 바라보며 달렸다.
마침내 지상 위로 나와서야, 레이커는 천천히 멈춰섰다. 그리고 몸을 반바퀴 돌려서 50미터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라스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둡고 별빛은 빼곡하게 쏟아내려 오는 아름다운 여름의 밤하늘이다.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의 라스여."
말꼬리를 높이며 노래하듯이 말을 한다.
"자신의 『능력』에 눈을 뜨게 되었는가."
". . . . . . ."
아무 말 없이 노려보는 소녀를 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이런. 너에게는 결투 전의 운치를 다룰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깜박 했군. 나와 한 번 이상 겨룬 사람은 네가 세번째다. 그 점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이 번에는 지지 않겠습니다."
끈적거리는 이마에 달라붙은 소녀의 앞머리가, 시원한 산바람에 흩날린다.
떨어져 있어도 눈빛이 느껴진다.
"나는 당신에게 패배할, 이유가 없어."
"그런 기백은 마음에 든다. 자아─ 이번에는 누가 먼저 공격할까. 두 판 모두 내가 선제공격하면 비겁하니까, 양보해 주겠다."
손까지 벌리면서 여유있는 레이커와는 달리, 라스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방금 전의 허세를 레이커가 눈치채지 않기를 빌면서 소녀는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자신의 몸에 입은 상처를 재생하는 '능력'을 얻었지만, 어째서인지 이 능력은 획득 전에 입은 상처만은 재생되지 않았다. 즉, 그 전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는 낫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발목을 재생하면서도 느꼈듯이 재생의 속도가 느리다. 실전 전투에서는 썩 쓸모있는 스펙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씩. 레이커에게 다가가며 라스는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완전히 발휘한다면... 저 남자를 이기는 것은 힘들어도, 호각으로 싸우면서 서민 일행이 도망치도록 방해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라스의 마음을 다 읽고 있는지, 레이커는 말했다.
"설마 나와의 승부에서 이기겠다는 생각을 한 건가."
"싸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할 생각이지."
"그런가? 그건 미안하게 됐네. 너는 나를 공격할 수 없어."
레이커는 '진심으로 유감이다'라는 말을 지껄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거냐?"
"어째서긴. 너를 비롯한 '아르모니코'의 요원들의 두뇌는 모두 나와 멜로리아가 프로그래밍 한다는 사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이것도 알고 있는가. 모든 우선순위를 뒤엎는 최우선명령, 모든 요원들에게 =아르모니코 사람들은 공격하지 말라=라는 봇(Bot)이 삽입되었다는 것."
레이커는 즐겁게 읊조린다.
"멜로리아의 말에 따르자면, 사이보그는 살아있는 '로봇'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의 명령이면 무의식중에 따르게 되어 있다. 너가 서민을 만난 것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전 작전의 생존자가 너 혼자인 것도. 사실은,"
소리없이 입술을 비틀며 그는 웃었다.
"처음부터 내가 계획한 시나리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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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들이 '크크크크' 하면서 외치는 그 계획.
그러고 보면 저 남자는 악당이겠군요.
근데 무대가 되는 배경에 대해 질문 있습니다.
빙하기는 다 물러간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