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키란에게 말했다.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물에 젖은 자국과 원형의 문양은 당신의 불길이 타오르는 칼에 새겨진 삼각형의 문양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소론자들의 상징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불은 닿는 모든 것을 찌르는 꼭지점의 삼각형입니다. 반대로 물은 감촉이 부드럽고 아래를 향해서 '굴러내려갑니다'. 물의 상징은 모서리가 없는 원입니다. 아마도 당신의 칼은 원소론자들의 주구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파괴를 상징하는 칼이 불의 주물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뒤쫓는 상대는 물의 주물을 손에 넣었을테죠- 그리고 그 자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원소론자들의 주물을 다시 모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소론파는 암흑시대 이후 까지도 존속하던 자연철학파의 일부로, 암흑시대의 실전된 지식들과 연관된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순순히 전부 다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나 역시 어둠에 묻혀 있는 원소론자들을 통해 고대의 전승 지식에 접근하기 위해서다. 이건 아주 훌륭한 기회다! 그리고 무언가를 얻기위해서는 당연히 투자가 필요하지. 뛰어난 투자가는 어디에다가 투자해야하는지를 잘 알거든! ...아직 다른 주물들의 주인은 모르지만, 여기 이 아가씨와 그 누군지 모를 작자를 볼 때는 이 쪽이 훨씬 안전해 보인다. 상대가 마법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아마도 키란의 죽은 동료는 물의 주력을 마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눈으로만 보아서는 이것이 그냥 물이 예리하게 뭉쳐 선 것인지 구레스논의 물 칼날의 주문인지 분간할 수 없을테니) 일단은 마법사라고 보아두는 편이 낫다. 아, 거기다 원소론를 알고 있고 자신이 원소론자들의 주물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원소론도 금지된 학문이니 나와 비슷한 부류일테지. 그 뿐 아니라 상대는 원소론자들의 주물을 모아서 무언가를 하려 하고 있다. 뭐, 마법사라면 누구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 지식을 알려 주고 싶어하진 않을 것이다. 꼭 끌어안고서 어떻게든 자기 혼자 지키려고 끙끙거릴테고, 남이 기웃거리기라도 할라치면 바로 불덩어리를 던져대겠지. 아, 이건 나한테도 해당되는 이야기인가? 하하. 어찌되었든, 상대는 목표를 위해서 거금을 뿌리고 사람 여러명의 목숨을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그 쪽과 거래를 하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차라리 이 쪽이 훨씬 낫지.

키란은 나를 한동안 쳐다보다가 다시 품속을 뒤졌다.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다.

"뭐죠?"

키란은 아무런 말없이 읽어보라는 동작을 취했다. 학자 풍의 필체로 쓰여진 편지였다.

'불의 주인에게. 최근에 얻은 힘과 권위에 대해서 감축드리오나, 그로 인해 흘린 피에 조의를 표하는 바이오. 그러나 아마도 그대가 소유하게 된 힘과 권위는 그 누구라도 그 이상의 희생을 치르고서 얻고자 하는 것일 거외다. 비록 그대와 나의 영역은 다르나, 그대의 얻은 것에 대해서는 그대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 터이기에 더이상 많은 말을 하지는 않으려오. 이렇게 몇자 적는 것은 경축의 편지 이외에도 한가지 제안이 있어서요. 그대의 신민의 철천지원수를 지배하는 자는 무도하고 흉폭하여 타협의 여지가 없소. 그의 손에 이미 그대의 옛 동료들이 목숨을 잃은 것은 유감이오. 그 자의 목적은 위대한 네 힘을 모두 손에 넣어 더욱 더 위대한 힘에 이르는 것이오. 그 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다른 군주들을 강제로 *옥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신의 것으로 하려 하고 있소. 이는 무엇보다 막아야 할 일이오. 아직 대지의 *옥좌*는 주인을 얻지 못했소만, 그 자가 대지의 영역을 손에 넣으려 하는 것을 알게 되었소. 그 자가 *옥좌*를 차지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대와 내가 그의 야욕을 물리치는 것이 어떻겠소? 새로운 영역은 공평하게 분배될 것이오. 너무 머뭇거리다가는 늦게 될거요. 빠른 시일 내에 믿을만한 가신들과 병사들을 모으시오. 그대의 힘과 권위를 얕게 본 것은 아니니 너무 진노치 마시오. 그 자는 무언가 다른 수단을 취하고 있소. 그 자의 졸개들은 그대의 가신들이 맡게 하고, 그 자의 *옥좌*에서 그를 끌어내리는 것은 그대의 힘과 권위로 하도록 하시오. 준비가 되면 이 편지에 그대의 권위를 드러내어 내가 알게하시오. 눈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영광*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 그대와 내가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영광*에 이를 수 있기를. 신실히, 대기의 주인.'

그 아래에는 물이 얼룩져서 단 한 줄이 쓰여 있다. 옆에는 역시 물을 상징하는 원.

'불 따위야 꺼뜨려 버릴테다.'

나는 고개를 들어 키란을 흘깃 보았다. 글씨도 고서 냄새가 푹푹 나지만 문체는 더 심하다. 완전히 미쳐서 자기가 어느 왕국의 군주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미안합니다. 아직 완전히 당신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지만 이제 당신의 실력을 제가 너무 낮춰 보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을 얕본 것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별로 미안한 기색인 것 같지만, 진짜 모험가라면 아무렇게나 순순히 다 술술 불어대면 안 되지. 역시 상대도 가리고 있는 것이 있었군그래... 나로써는 이 쪽이 더 반가운 일이다. 이 정도로 조심성이 있다면, 한패거리가 되었을 때 더 유용한 법이거든. 그렇지 않나? 이런 조심성이야말로 그만큼의 경륜과 노련함을 드러낸다고. 뭐, 내가 별로 믿을만한 생김새가 아니라거나 하는 문제일 수도 있긴 하지만 말야.

"조심하는 건 좋은 일이죠. 미안할 것 까지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이 편지는 어떻게 받으셨나요? 심부름꾼에게서 뭐 알아낸 사실은 없었습니까?"

"열려진 창으로 바람에 날려 들어왔습니다."

"바람에 날려 들어왔다라... 대기의 주인이라는 서명에 어울리는 방식이군요. 이 편지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상당히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당신은 원소론자들의 주물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오, 저는 전혀 몰랐어요. 당신이 이야기해 주기 전까지는 원소론자에 대해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걸요."

"우선 이 편지를 쓴 작자는 대기의 주인이라는 걸로 보아 대기의 원소와 연관된 주물을 얻은 자일 것입니다. 당신이 이 칼을 얻은 것은 어느 마법사의 탑에서라고 했죠. 그 마법사는 주물을 알아보지 못했거나 혹은 불의 주력을 얻게 될 경우 자신의 연구에 어떤 차질이 생길 까봐 봉인을 뜯는 것을 망설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이 자가 편지에서 사용한 문체나 단어들을 살펴봅시다. 그가 조금 망상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화려한 문체를 사용해 준 덕에 더 많은 게 드러나는군요.
힘이니 권위니 하는 것은 주물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거겠죠. 당신은 그 칼의 불이 뜨겁지 않지만 당신의 동료들은 만지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한번 주물이 발동되어 자신의 소유자를 인식하게 되면, 당신은 그 주물의 힘에 영향받지 않게 될 겁니다. 이 주물들이 지닌 힘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소론자들은 원소의 주력으로 4대 원소를 다룰 수 있었으니 아마 비슷할테죠. 신민의 철천지 원수... 당신이 소유하게 된 불의 주력과 상반되는 것은 물일테니, 이 후의 문장에서도 당신의 동료들을 공격한 것은 물의 주물을 소유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네 힘을 얻어 더욱 더 위대한 힘에 이른다라. 네 힘이라면 우선 4원소가 떠오르는군요. 원소의 주물들을 얻은 것을 뜻하겠죠. '더욱 더 위대한'이라는 표현은 아주 흔하지는 않지만 암흑시대의 연금술 서적이나 신비학 관련 문헌들을 보면 간혹 '세 배 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나옵니다. 단순한 단어로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극존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원소론자들은 제 5원소로 빛을 꼽았으니, '더욱 더 위대한' 힘은 빛의 원소를 뜻하는 것일까요. 흠, 어쨌든 상대는 원소의 주물들로 제 5원소에 도달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최소한 놈의 목표는 알았군요.
또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은, '옥좌'라는 표현이 이상하게도 많이 쓰인 점입니다. 게다가 그 단어를 쓸 때마다 유달리 크고 굵은 글씨로 눌러썼군요.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무언가 나중에 연관이 있을 법합니다. 대지의 옥좌... 아직 대지의 원소의 주물을 차지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의 주물을 차지한 자가 대지의 주물을 노리고 있다. 아마 원소의 주물들의 힘은 넷이 거의 대등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 자가 당신에게 동맹을 제의해 온 것도, 물의 주물을 차지한 자가 대지의 주물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힘을 합쳐서 상대를 패퇴시키려는 게 됩니다.
눈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영광. 영광이란 단어도 힘주어 썼습니다. 뭐, 이건 제 5원소로써의 빛을 말한다고 보면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이 자도 비슷하게 제 5원소를 얻으려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니."

"그럼 이 자와 동맹하는 것이 유리하겠습니까?"

"물론 동맹이 유리할 겁니다. 하지만 이 자의 말투로 보아서 자신을 이미 한 군주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물의 주물을 소유한 자를 물리치고 난 다음에는 어쩌면 당신과 '영역' 그러니까 주물의 힘을 나누어서 차지하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있죠. 그 점은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물의 주물을 차지한 자가 이 두루마리에 자기 글을 남겨 놓은 걸로 봐서, 대기의 주물을 차지한 자가 당신에게 동맹을 제의해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된 이상 동맹 쪽이 좋겠죠. 편지에다가 당신의 힘을 사용하라는 것은, 편지를 불로 태운다거나 하라는 모양인데 동맹의 준비가 되면 하도록 하죠."

나는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아헨의 흐뜨러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가슴 속에 뜨끔한다. 너무 들떠 있었어! 이래서야 원 처음 모험을 시작할 때하고 전혀 달라진 게 없잖아! 상대는 아헨을 단검손잡이로 내려쳤다구-. 마법사로써의 본성이랄까, 그런 게 너무 튀어나왔다. 이게 뭘까? 뭘까? 뭘까? 하고 흥분하느라고 아헨이 얻어맞고 쓰러진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란 놈은 정말...
이 바닥에서는 절대로 자기편이나 적편이란 건 없어, 오직 서로에게 유용하거나 쓸모가 없거나 혹은 해가 되는 경우만이 있을 뿐이야. 숨을 들이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자. 내게는,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은 아헨 밖에 없어... 이 불꽃이빨이라는 자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 내게 접근한 거지. 내가 빈민의 구원자니 의적마법사니 하는 어울리지 않는 별명을 얻지 못했더라면 이 자를 만날 수나 있었을까?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게 우리들의 신이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굳이 모험가가 아니라고 해도,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다... 다만 나는 첫번째 모험에서 얻은 경험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 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 만큼 성당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일도 드물 것 같군 그래. 원소론자니 자연철학파니, 모험가들끼리 충돌하는데 굳이 교회의 근엄하신 성직자들께서 법의자락을 더럽히고 싶진 않겠지.
열중하고 있다가 마음 속에서야 뒤늦게 아헨을 떠올리고 죄책감이 떠오른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마음은 더 차가워졌다. 감정적으로 나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저 마음 속으로, 아헨을 기습한 일만 기억해두자. 상대도 그런 자라는 거다. 내게야 그, 물의 군주인지 뭔지 하는 작자와 다를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필요에 맞다면, 뒤통수만 조심해 두고 있으면 되겠지. 물의 군주라는 작자와 함께라면 갑자기 물줄기가 코로 기어들어오는 것도 조심해야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동맹으로 따지자면 이쪽이 안전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침착을 가장하고, 최대한 호의어린 미소를 지어보이려 애쓰면서(어쩌면 어색하게 이러는 것보다는 그냥 말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말했다.

"저는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 이번 건에는 별다른 보상은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원소론자들의 전승지식을 얻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일 겁니다. 이틀이나 사흘 정도, 주점에서 다른 모험가들과 접촉해서 실력있는 자들을 추리세요. 그동안 저는 제 나름대로 적을 상대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흘 후면 놈은 공증인을 불러서 자기 목을 누가 돌려받아야할지 증서를 작성해야 할 겁니다."

편지를 뒤집자, 낡아서 닳은 양피지의 뒷면에 희미하게 흔적이 보였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것은 거의 다 지워져서 알아볼 수 없는 글씨였다. 책을 뜯어서 편지를 쓴 건가? 위쪽에 화려한 테두리 선 아래에, 굵은 선으로 단호하게 그려진 오망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나는 두루마리를 돌려주기 전에, 오망성의 한가운데에 굵은 점이 찍혀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설정--------------------------------------------------------
구레스논의 물 칼날
시전자는 일정한 부피의 액체에 주문을 걸어서 자신의 의지대로 무기의 형태로 뽑아낼 수 있다. 다룰 수 있는 액체의 부피 및 주문으로 제어할 수 있는 표면장력의 강도는 시전자의 수준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와 비슷한 주문으로 피돈의 예리한 결정이 있으나, 구레스논의 물 칼날은 훨씬 더 자유롭게 무기의 형태를 변형할 수 있는 편이며 피돈의 예리한 결정은 손 끝에 접촉한 액체가 응고하면서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강도로 결정화 되어 비교적 단순한 무기의 형태가 된다.

잡설-----------------------------------------------------------
이걸로 다섯편...-_- 일단은 필요하다는 다섯편만 올렸습니다. 아, 제일 처음에 본편은 해당 안 되려나?=_=; 굳이 이렇게 딱 맞춰 올린 건 비축분이 이제 7편정도 더 있긴 하지만 쓰는 속도가 있는데다가 또 방학 시작하고 일 생기고 하면 금방금방 못 쓸 것 같은지라-_-;
티끌 같은 세상속에 작은 모래알 하나, 한바탕 미친 바람 불고 나면 그 간 곳을 모르온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