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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에게 압도당하고, 기계를 신으로 떠받드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SF 설정과 기계의 발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바늘과 실처럼, 휴지와 화장실처럼, 풀빵과 팥소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SF 창작물은 대부분 논리적으로 미래를 다루고, 따라서 미래에는 온갖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현대 인류는 끊임없이 기술 개발에 매진하기 때문에 미래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효율적인 기술들이 등장하리라고 예측할 수 있죠. 그래서 SF 창작물에는 그런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계들이 즐비합니다. 로봇, 사이보그, 인공지능, 광선총, 소형 컴퓨터, 보행 전차, 우주선, 인공 거주지까지…. 온갖 장비와 설비를 제외하면, SF 설정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발달된 기계가 SF 설정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 사실을 부인할 수 없죠. 하긴 초기 SF 작품들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쥘 베른, 허버트 웰즈, 휴고 건즈백 등은 잠수함, 육상 전함(전차), 외계 보행 전차, 최첨단 공장, 으리으리한 발전소 등을 묘사했습니다. 심지어 기계에 매료된 인간까지 묘사했습니다.


허버트 웰즈의 단편소설을 보면, 인류를 압도하는 기계가 나옵니다. 과학 지식이 부족한 노동자가 기계를 보고 경탄합니다. 사실 그 기계는 고작 발전기에 불과하지만, 노동자에게는 신에 준하는 존재였습니다. 그토록 엄청난 에너지를 생산하는 존재라니! 어찌 놀랍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소위 21세기 문명인이니까 발전기 따위가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지 몰라요. 하지만 발전기는 19세기의 빈곤한 노동자의 눈에 고작 기계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인류는 고대부터 효율적인 에너지를 얻기 위해 애썼고, 그 결과 각종 엔진이 등장했습니다. 전력을 생산하는 기계는 (아직 봉건적인 세계관이 남아있는) 노동자 입장에서 굉장히 놀랍게 보이겠죠. 그리하여 이 노동자는 기계를 신으로 섬깁니다. 딱히 소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원시적으로 살아가는 부족들은 항공기를 신으로 생각한다고 하니까요. 이런 초기 SF 작품은 이후 스페이스 오페라 등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워해머 40K>에는 일명 기계신이 나오죠. 이 설정의 기계는 진짜 신격으로 대접을 받고, 사람들은 기계신을 숭상하기 위해 체계적인 교단까지 세웠습니다. 그래서 장비를 멋대로 개조하면 큰일나죠.


허버트 웰즈의 소설처럼 SF 창작물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인류가 현명하게 기계를 다루면 좋겠지만, 소설처럼 인간은 기계에게 제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기계들을 다수 소유한 자본가는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어요. 기계는 인간보다 효율적으로 노동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를 만들 이유가 없죠. 아니, 비단 인간만 아니라 여타 생명체도 기계의 효율성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는 트랙터에게 밀려났고, 말은 전차에게 밀려났습니다. 지금 산업 및 군대에 남아있는 사역 동물은 탐지견이 고작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탐지견도 탐지 기계에 밀려날 수 있죠. 지금은 탐지견과 금속 탐지기가 서로를 보완하지만, 급속한 기술 발달은 탐지견의 선천적인 후각 능력을 앞지를 수 있어요. 뭐, 어쩌면 먼 미래의 탐지견은 유전자 조작 견종일지 모르죠. <스타십 트루퍼스>의 네오독처럼요. 하지만 인간이 탐지견을 개조하지 않는다면, 발달된 금속 탐지기가 군견을 군대에서 밀어낼지 모릅니다. 금속 탐지기는 군견처럼 적에게 달려들지 못하지만, 그렇다면 아예 기계 군견을 만들 수도 있겠죠. <화씨 451>처럼요.


인간이든 동물이든 기계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기계의 존재 목적은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인간과 동물 같은 생명체의 목적은 존재 그 자체입니다. 생명체는 존재하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반면, 기계는 작업을 위해 탄생했습니다. 기계의 존재는 선천적이지 않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는 인간(생명체)이 세상에 내팽개처졌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생명체의 앞길은 막막하지만, 대신 생명체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주로 사슴을 잡아먹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랑이는 사슴을 잡아먹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백상아리는 물개를 좋아하지만, 물개 학살은 백상아리의 존재 목적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백상아리는 어디까지나 유전자를 잇기 위해 태어났고, 그 동물들의 유전자는 계속 존재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존재 그 자체가 생명의 목적이라는 겁니다. 사실 목적이라는 표현을 쓰면 좀 거시기하지만, 학술적으로 철학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니까 대충 넘어가겠습니다. (이런 부분을 잘 아시는 분이 수정해주시면 더 좋고요.)


이런 이유로 기계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보다 효율적입니다. 그래서 자본가는 자꾸 기계에게 욕심을 냅니다. 좋은 기계가 많이 있으면, 더 많은 이윤을 챙길 수 있으니까요. 알고 보면, 자본가도 꽤나 괴로운 사람입니다. 자유 경쟁 시장에서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철수라는 자본가가 시장에서 닭을 1000원에 판다고 가정하죠. 영희라는 자본가가 그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철수와 영희의 닭은 무게, 영양분, 맛, 생김새 등이 엇비슷합니다. 서로 별 차이가 없는 '상품'입니다. 따라서 영희가 닭을 900원에 판다면, 철수의 닭은 안 팔릴 겁니다. 그러면 철수는 망하겠죠. 당연히 철수는 닭을 800원에 팝니다. 영희는 700원에 팔고, 이렇게 가격 경쟁이 계속 발생합니다. 하지만 판매 가격을 깎으면, 그만큼 자본가의 이윤도 손해를 봅니다. 따라서 철수와 영희는 가격 경쟁 속에서 이윤을 높이려고 궁리하겠죠.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설비 증대입니다. 어느 정도 설비를 늘린다면,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생산 속도를 높일 수 있어요.


이런 현상이 과열되면, 기계 설비는 늘어나고, 인간 노동자들은 닭공장을 나가야 합니다. 허버트 웰즈의 단편 소설처럼 인간이 기계에게 압도를 당하죠. 정확히 말하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쫓아냈지만, 겉보기에 기계가 인간을 제압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그 기계도 노동자가 만들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노동자가 만든 기계가 노동자를 쫓아냅니다. 칼 마르크스는 이걸 보고, 죽은 노동(기계)이 산 노동(인간)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노동자가 계속 쫓겨나면, 노동자들은 돈을 벌지 못합니다. 노동자가 돈을 벌지 못하면, 시장에서 물건을 살 수 없습니다. 물건이 시장에서 팔리지 않으면, 자본가는 이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본가가 이윤을 얻지 못하면 투자를 하지 못할 테고, 자본가도 망합니다. 이미 투자할 여력(자본)이 없는 자본가는 자본가가 아니죠.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경제 공황이 벌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전에 양산형 로봇과 금융 거품을 논의하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건 단순한 요약이고 실상은 훨씬 복잡하지만, SF 이야기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거기까지 논하지 않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기계 설비를 불변 자본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인간 노동자는 가변 자본입니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불변 자본이 가변 자본보다 훨씬 많아지면, 체계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꽤 중요하고, 그래서 마르크스 경제학자와 전문가들은 끊임없이 논쟁을 벌입니다. 기계 설비 때문에 이윤율이 떨어졌느냐, 과잉 생산과 이윤율 저하 중 뭐가 중요하느냐…. 학자와 전문가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어쨌든 불변 자본의 증가는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덕분에 여러 <자본론> 개론서들은 기계 이야기를 빼먹지 않습니다. 기계가 인간을 압도하면, 그 상황은 노동자를 위협하고, 동시에 체계도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갈수록 더 뛰어나고 효율적인 기계를 만듭니다. 결국 자동 로봇과 인공지능의 앞날을 논의하기에 이르렀죠. 그래서 저는 <자본론>을 읽으면, 꼭 SF 설정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니, 뭐, <자본론> 원작은 너무 어렵죠. 저는 그저 개론서나 해설을 보는 수준이지만, 여하튼 SF 감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생태학 서적이나 철학 서적에서 SF 감흥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생태학 서적들은 생태계 파괴를 경고하기 위해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을 언급하거든요. 이상 기후 때문에 해수면이 상승하고 작물이 시들고 갈등이 심화되고 전쟁이 벌어지고…. 이런 상황이 정말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그야말로 사이언스 픽션이 따로 없습니다. 소설보다 훨씬 실감이 나죠. 생태학자들이나 환경 전문 기자들의 주장이니까요. 그리고 철학 서적들은 인간의 위상과 기계의 발달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닉 보스트롬 같은 인공지능 철학자도 있지만, (이미 이야기했듯) 19세기 철학자들도 기계의 발달을 말했습니다. <자본론>도 그 중 하나입니다. <자본론>은 기본적으로 정치경제학 책이지만, 철학적인 면모도 풍부하죠. 사실 여러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책들이 미래를 논하지만, <자본론>처럼 SF 느낌이 생생한 책도 드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 경제학이 그리 인기가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