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가 기본적으로 공간적 확산이라는 벡터를 내포했다는 점은 존 클루트를 위시한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했다. 그리고 공간적 확산의 중심에 자리잡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비일상적인 '모험' 충동이다. 이러한 모험의 자각은 정주지를 마련한 인류가 생활공간의 확충을 꾀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도시-황야의 경계선을 의식적으로 넘을 때 발생한다. 이것이 원시적인 수렵 채취 행위의 연장선이든, 개척정신을 앞세운 제국주의적인 착취든, 우주 개발이든, 혹은 지적인 탐구이든 간에, 미지의 영역을 '발견'한다는 점은 필요 조건으로서 모험 행위 자체에 선행한다. 이런 연유로 발견과 모험 그리고 제국주의적 착취를 한데 통합한 '탐험' 행위는 19세기 유럽인들의 낭만주의적 문학사조와 결합하면서 비경 탐험 소설이라는 대중 문학의 한 장르를 탄생시켰다. 이 분야는 환상과 사실이 뒤섞인 일종의 프로토 모험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프로토 SF는 프로토 모험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하 생략)




위 문단은 소설 <잃어버린 세계> 해설에서 발췌했습니다. 행책 번역본으로 김상훈님이 해설을 맡았죠. 비경 탐험 소설의 탄생 경위를 설명하는 대목인데, SF 장르가 확산이라는 주제를 내세운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인류는 예전부터 아프리카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인류는 걸어서, 말을 타고, 배를 짓고, 비행기를 날려서 끊임없이 다른 장소로 이동합니다. 오죽하면 탐험 유전자가 작동하기 때문에 인류에게 방랑벽이 생겼다는 가설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그런 가설이 옳든 틀리든 인류가 바다 건너 대륙부터 심해를 거쳐 우주까지 진출한 역사는 사실입니다. 위 문단에서 설명하는 공간적 확산이란 바로 이런 진출을 가리킵니다. 낯선 땅에 들어선 이방인은 위험을 겪는 법이고, 이렇게 위기를 겪는 과정이 바로 모험입니다. 그 장소가 밀림이든, 극지든, 심해든, 우주든 간에 문명 지역을 떠나 오지를 탐험하는 과정에서 모험이 발생합니다. 역사적으로 숱한 탐험가들이 위기를 겪었고, 지금도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류가 그렇게 외부로 뻗어가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위 문단에서 나온 것처럼 학술 탐사, 자원 채취, 영토 정복, 교역 항로 개설 등 여러 이유가 존재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탐험가들이 학술 탐사를 나섰다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는 군인과 상인도 많았습니다. 제임스 쿡이나 찰스 다윈처럼 순수하게 학술적으로 떠난 사람이 오히려 적지 않나 싶네요. 지금도 천연 자원 때문에 탐사 활동이 활발한 편이니까요. 이유가 어쨌든 인류는 낯선 땅으로 떠나고, 기이한 모험을 겪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SF 소설은, 그 중에서도 비경 탐험 소설은 모험 소설과 맥이 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수많은 초기 SF 소설은 모험 소설의 이웃사촌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20세기 후반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우주 탐사물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사실 넓게 보자면, 우주 탐사물은 비경 탐험 소설의 하위 장르로 들어갑니다. 비경의 뜻은 인류가 닿기 힘든 지역을 가리키니까요. 오늘날에는 우주만큼 인류가 닿기 힘든 지역이 없죠. 심해도 탐험하기에 험난한 공간이지만, 우주만큼 뭔가 원대하고 아득하다는 이미지가 없죠. 21세기의 우주는 19세기의 열대 밀림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우주 탐사물도 모험 소설의 이웃사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비경 탐험 소설이 모험 소설의 친구니까 비경 탐험물의 자식인 우주 탐사물도 그러합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우주 탐사물을 모험 소설로 부르는 평론가나 독자는 없습니다. <잃어버린 세계>를 모험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언정, <라마와의 랑데부>를 모험 소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마 없겠죠.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모험 소설은 대략 이렇습니다. 알란 쿼터메인이나 챌린저 교수 같은 주인공이 등장해야 합니다. 탐험 장소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열대 밀림이나 유적이어야 합니다. 주인공들은 잘난 백인의 제국주의 사상을 순화시켜 퍼뜨리고, 야만인들을 몰아내고, 때때로 고대의 판타지와도 싸웁니다. 그래서 우주 탐사대가 외계 우주선에서 학술적인 발견을 거듭하는 모습은 어디로 보나 '모험'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험이라는 단어를 꼭 백인 탐험가와 아프리카 유적과 야만스러운 원주민으로 국한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우주도 분명히 비경에 속하고, 여기에서 탐사를 통한 모험이 비롯할 수 있겠죠. 우주는 낯선 장소고, 가혹하고 알 수 없는 환경은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 탐사물은 비경 탐험물의 연장선이자 현대 문명의 모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통속적인 모험 소설의 쾌락과 궤도가 다른 편이죠. 아프리카 밀림을 탐험하는 행위도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최소한 거기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입니다. 이와 달리 우주와 외계 행성은 생명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맨몸으로 아마존 밀림에서 생존할 수 있지만, 맨몸으로 대기권 밖이나 달에서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가혹한 환경을 견디려면 그만큼 비싸고 뛰어난 장비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거리도 굉장히 멀죠.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우주 모험은 상당히 기술 집약적인 행위이고, 전통적인 모험 소설의 쾌감이 부족합니다. 차라리 전통적인 모험 소설의 쾌락을 우주로 계승하는 쪽은 스페이스 오페라와 행성 로망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탐험의 의미를 확장했듯이 모험이라는 범주도 이제 확장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21세기에 다다랐으니, 구태의연한 밀림 여행만 모험이 아니라는 겁니다. 탐험의 역사를 다룬 몇몇 책을 읽어보면, 17세기의 항해사들과 21세기의 우주 탐사 로봇을 동일한 시선에서 바라봅니다.


혜성을 관측하려는 로제타 탐사선의 위기나 화성을 배회하다가 작동을 멈출 뻔한 스피릿의 행로는 충분히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단지,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고, 그래서 인간의 도전만큼 눈물 겨운 감성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 뿐…. 실제로 오퍼튜니티나 바이킹의 행적을 살펴보면, 여느 탐험가 못지않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들은 인간은 아니지만, 우주 탐사는 전통적인 탐험과 전혀 다르지만, 21세기의 모험이란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19세기든 21세기든 결국 탐험이라는 행위가 제국주의 위험을 내포한다는 사실은 주의할 부분입니다. 과거 비경 탐험 소설의 주인공들이 죄다 유럽인과 미국인인 것처럼 미래 우주 탐사물의 주인공은 대부분 미국과 소련, 중국, 기타 강대국들입니다. 설사 그 주인공들이 인간이 아닌 로봇이라고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물론 이는 미국이나 러시아, 유럽의 SF 소설들이 그만큼 유행하기 때문입니다. 저 나라들의 소설이 SF 문화를 선도하고, 그래서 미국인과 러시아인과 유럽인이 우주 탐사물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극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현재의 편파적인 양극화 세계를 고려한다면, 정말 강대국들만 22세기나 23세기의 우주 탐사를 독차지할지 모릅니다. 탐험과 모험은 언제까지나 매력적인 SF 소재이지만, 그만큼 제국주의 꼬리표는 떨치기 힘들 듯합니다.


따지고 보면, <킹콩>처럼 케케묵은 비경 탐험물이든, <붉은 화성>처럼 최신예 기술로 무장한 하드 SF 소설이든, 모두 제국주의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킹콩>은 소위 제3세계를 비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피터 잭슨은 2005년 영화에서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아 보입니다. <붉은 화성>은 아예 노골적으로 강대국들의 극지 자원 수탈부터 화성을 둘러싼 갈등까지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은 현재의 자유주의와 자유 시장이 제국주의까지 확대되고, 결국 지구의 인류와 화성의 인류 모두 비참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자유 경쟁 시장이 제국주의까지 확장되었다는 사고 방식은 진보 좌파의 사고 방식이죠.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자유 경쟁 시장이 제국주의 수탈을 부추키는 원인 중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킹콩이 하필 돈 때문에 잡혀갔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래도 의미심장하죠. 우리가 정말 우주를 바라본다면, 우주 시대에 걸맞는 사고 방식과 사회 체계가 필요할지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