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b1.jpg
[우주 함대전은 종종 과거 전열함 시대를 오마쥬할 때가 있습니다.]


소설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은 <혼블로워>에게 바치는 오마쥬입니다. 두 소설 모두 함대전을 다루지만, 전자는 우주 시대이고, 후자는 나폴레옹 전쟁 시대입니다. 은하계에서 전투를 벌이는 소설이 범선들끼리 싸우는 소설에게 오마쥬를 바치는 셈입니다. 자고로 오래 전부터 우주 탐사물이나 스페이스 오페라 등은 대항해시대와 제국주의 시대에게서 힌트를 얻었으니까요. 예전에도 말했지만, <창백한 푸른 점>을 쓴 칼 세이건은 우주 진출의 로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백경>의 대사를 인용했습니다. 아서 클라크는 <라마와의 랑데부>에서 제임스 쿡 선장의 탐험선 인데버와 외계 탐사선 인데버를 비교했죠. 간혹 대항해시대와 우주 탐사물을 비교하는 중에 제국주의에 빠지기 쉽지만, 바다와 우주는 정말 궁합이 딱 맞는 관계입니다. <바실리스크 스테이션> 또한 그런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군과 우주군은 엄연히 다른 집단이지만, 수많은 SF 창작물이 주장하듯 두 집단에게는 공통점 또한 많습니다. 일단 바다와 우주는 똑같이 인류에게 낯선 환경이고, 인류는 여기에서 활동하기 위해 거대 교통 수단, 그러니까 함선을 이용합니다.


수상 함선과 우주 함선은 공통적으로 다량의 승무원이 탑승합니다. 그리고 덩치가 크기 때문에 장기간 항해가 가능하죠. 항상 양력을 받기 위해 연료를 소모하는 항공기와 달리 수상 함선은 부력을 이용하기 위해 구태여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우주에 떠있는 우주선도 마찬가지입니다. 함선 내부에는 수많은 인원이 상주하고, 당연히 그들은 계급과 역할 등이 갈립니다. 그리고 장기간 항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수상이든 우주 공간이든) 함선은 초계, 구축, 호위, 대량 운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죠. 육군과 공군에는 이러한 병기 및 분담 체계가 없고, 그래서 창작가들은 가상의 우주군을 실제 해군과 비슷하게 묘사합니다. 비단 우주 군대만 아니라 우주 탐사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임스 쿡과 찰스 다윈이 인데버와 비글을 타고 탐사한 것처럼 과학자들은 우주 탐사선에 타고 낯선 외계 행성을 조사하죠. 탐사선이든 군함이든 우주 시대를 이야기하는 SF 창작물은 원양 항해를 본뜨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는 함선끼리의 전투 역시 그렇습니다. 창작가들은 가상의 우주 함대전을 표현하기 위해 역사적인 해전을 참고합니다.


해군은 고대부터 존재했고, 초기 범선들은 여러 해전을 치렀습니다. 지금 시각에서 본다면 그 당시 범선들은 초라한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강력한 함선은 강대국의 상징입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강력한 해군의 존재가 도시 국가를 수호했죠. 하지만 고대와 중세 해전을 우주 시대에 대입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고대 범선은 워낙 구닥다리니까요. 우주선이 고대 해양 전술을 모방한다면, 고증이나 설정은 둘째치고 뭔가 폼이 안 날 겁니다. 고대 해전을 모방하는 우주 전투가 없지 않겠지만, 소위 대세는 아닙니다. 우주선끼리 치고 받으려면, 적어도 나폴레옹 시대~대영제국 시대의 해전이 어울리죠. 나폴레옹 시대의 범선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범선들이 대열을 이루고, 함포를 장비한 측면을 적에게 향하고, 지휘자의 외침에 따라 범선 측면에서 매캐한 연기를 뿜고, 각종 포탄이 날아간 후 돛대와 갑판과 뱃전을 파괴하고 등등…. 당장 위에서 언급한 <바실리스크 스테이션> 역시 <혼블로워>에게 찬사를 보냈으니까요. 거대 범선들이 전열을 이룬 채 싸우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죠.


ssb12.jpg
[2차 대전 역시 우주 함대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입니다.]


제국주의 시대가 지나면, 2차 세계 대전이 도래합니다. 1차 대전 역시 전쟁사에서 꽤나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지만, 아무래도 2차 대전에 비해서 유명세가 밀립니다. 게다가 해전을 묘사하고 싶은 SF 창작가라면, 1차 대전보다 2차 대전에 더 관심이 많을 겁니다. 2차 대전에는 비로소 항공모험이 등장하고, 함재기들이 상대 구축함이나 순양함과 치열하게 싸웠으니까요. 항공모함은 기존의 해전 양상을 크게 바꿨죠. 현재 스페이스 오페라 등에서 나오는 우주 함대전 역시 2차 대전의 모습에서 그렇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고속정, 호위함, 구축함, 순양함 등이 출동하고, 거함거포를 자랑하는 전함이 위세를 떨치고, 거대 항모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스웜 전술로 함선을 에워싸고, 에이스 파일럿의 전투기가 거대 전함의 심장을 강타하고…. 달리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작가 지망생의 풋풋한 초기작부터 각종 드라마와 영화를 거쳐 숱한 게임에 이르기까지 2차 대전은 앞으로 두고두고 사랑을 받을 겁니다. 우주 전투기의 로망은 영원하겠죠.


하지만 명색이 우주 시대입니다. 21세기 함선들도 장거리에서 미사일을 쏘며 싸웁니다. 하물며 우주 시대의 함선들이 우주 전투기랑 투닥투닥거리면, 이거 어디 체면이 살겠습니까. 최첨단 시대에 걸맞게 우주선들은 초장거리 타격으로 싸워야죠. 이전에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소설 <영원한 전쟁>의 함선 전투가 참 마음에 듭니다. 여기서 전투를 담당하는 주체는 승무원이 아니라 전술 컴퓨터입니다. 탐지기가 적함을 포착하면, 승무원들은 일찌감치 수면 캡슐에 들어갑니다. 막대한 중력을 견디기 위해서입니다. 승무원들이 몸을 숨기면, 그때부터 전술 컴퓨터가 우주선을 조종합니다. 우주선은 급격한 회피 기동을 시작하며, 동시에 적함에게 미사일을 발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두 함선의 거리는 그야말로 까마득하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미사일은 적 우주선에 직격하지 않습니다. 적 우주선 근방 수 십 km 이내에서 폭파해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탄두에 전략 병기가 들었거든요. 우주는 넓고 넓기 때문에 함선 전투 역시 까마득하게 먼 거리에서 발생합니다. 그야말로 우주 시대에 걸맞은 전투 모습이지만, 볼거리 자체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아마 개인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우주 함대전 양상이 다를 겁니다. 누군가는 전열함처럼 우주선들끼리 마주 보고 싸우는 걸 좋아하겠죠. 또 누군가는 재빠르게 달려든 우주 전투기가 거대 전함을 타격한 후 쏜살같이 달아나는 걸 좋아하겠죠. 아니면 초장거리에서 서로 미사일을 주고 받는 전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초장거리 전투가 비교적 고증을 살린 편이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전투가 과거 해전의 복사판에 불과한 건 아닙니다. 나폴레옹 시대와 2차 대전을 참고하는 창작가 역시 나름대로 하드한 설정을 집어넣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실리스크 스테이션>만 해도 우주선을 과거 범선에 대입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하는 걸요. 그런 노력을 보는 것도 우주 함대전 소설을 읽는 재미입니다. 개인적으로 <영원한 전쟁>처럼 초장거리 전투를 훨씬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홈월드>에 나오는 애로우 파이터의 로망을 무시할 수 없더군요. 뭐든지 다양한 게 좋은 거고, 우주 함대전 묘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설도 읽고, 저런 게임도 하고, 그런 거죠. 만약 실제 함대전 양상이 바뀌면, 창작물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네요.


ssb13.jpg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우주 시대의 고증을 살린 전투는 이런 쪽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