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창작물에는 인간과 닮은 로봇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건 거대 로봇도 마찬가지라서 용자물부터 리얼 로봇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인간형이죠. 덕분에 SF 동호회에서는 왜 하필 인간형 로봇이어야 하는지 곧잘 토론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사실 사람처럼 생긴 기계가 전차나 전투기, 전함보다 딱히 효율적인 건 아니거든요. 피탄면적이 넓어지고, 내구성이 약해지고, 조종이 까다롭고, 무장이 힘들고 등등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클럽에서도 숱하게 벌어졌던 논쟁이죠. 그리고 논쟁의 끝은 대부분비효율적이지만 멋있으니까라는 이유로 마무리 됩니다. 독자나 시청자가 주인공 로봇에 감정이입 하려면 아무래도 인간형이 친숙할 테니까요.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무언가에 더 쉽게 끌리는 법이죠. 이건 비단 로봇에 해당하는 현상만이 아니라서 신이나 미지의 존재도 인간다운 모습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사람의 본능인가 봅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이를 역이용할 때도 있습니다. 징그러운 생명체가 만든 로봇이, 그 조종사만큼이나 기괴하게 생겼다면 어떨까요. 아마 극심한 공포를 자아내겠죠. H.G.웰즈가 쓴 <우주전쟁>은 바로 이런 감성을 풍기는 작품입니다.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해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간다는 우울한 침공물입니다. 웰즈는 책을 쓰면서 화성인의 전투 병기를 삼발이(트라이포드)라고 하는 희한한 기계로 설정했습니다. 다른 병기는 거의 언급하지 않으며, 화성인은 대부분 삼발이를 타고 싸우는 것으로 나옵니다. 워낙 우월한 병기라서 지구인이 총이며 대포를 동원해도 탈탈 털리기만 하고요. 그런데 이 삼발이는 작중 등장하는 화성인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화성인은 부풀어오른 머리(몸뚱이)에 눈과 입이 달리고, 주변에 촉수가 있으며 이것으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삼발이의 생김새나 이동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통형 본체에 눈이 달렸고, 길다란 촉수를 뻗어서 활동합니다.


여기서 소설 본문에서는 화성인과 삼발이의 전체적인 윤곽을 어떻게 그리는지 잠시 인용해보겠습니다. 편의상 중요하지 않은 문장은 생략했습니다.



몸집이 곰 정도 되는 회색의 거대한 둥근 물체가 고통스러운 듯 로켓에서 천천히 기어나왔다. 두 눈이 있는 괴물의 머리는 둥그렇게 생겼는데, 얼굴인 것 같았다. 그 생물은 괴성을 지르면서 온 몸뚱이를 발작적으로 요동쳤다. 호리호리한 촉수 한 개가 로켓 가장자리를 움켜쥐더니 또 다른 촉수를 허공에 휘저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고르곤과 같은 촉수들.


화성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장 소름 끼치는 생물체이다. 각 화성인들은 전면에 지름이 1m 이상 되는 거대한 육체가 있는데, 아마 얼굴인 듯했다. 머리인지 몸통인지 분간하기 힘든 신체 뒤에는 단단해 보이는 고막처럼 생긴 부위가 돌출해있다. 입 양쪽으로 가느다란 채찍과 같은 촉수 8개가 양쪽으로 16개 있다. 저명한 해부학자 호웨스 교수는 그 촉수를 손이라고 불렀다. 화성인의 내장 기관은 단순해 보였다. 가장 큰 부분은 두뇌로 엄청난 신경이 눈, , 촉각 기관으로 여겨지는 촉수와 연결되었다. 그들은 머리만 있을 뿐 내장이 없었다.



이상의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화성인은 커다랗고 부푼 머리가 있으며, 머리가 곧 신체를 대신합니다. 내장기관이 거의 없으므로 몸이 있다 해도 상당히 작을 테고요. (머리) 주위에 수많은 촉수가 있으며, 이것으로 물건을 움켜쥐거나 걷습니다. 화성인의 생김새를 단순화시키면, 큰 머리와 거기에 붙은 일련의 다리, 촉수가 될 겁니다. 그런데 이는 삼발이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다음은 책에 나오는 삼발이와 기타 기계들의 묘사입니다.



그것이 보였다! 어떻게 그 물체를 설명할 수 있을까? 어느 집보다도 더 높은 곳에 괴기스러운 삼각대가 어린 소나무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 다니면서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관목 숲을 헤치고 지나가는 번쩍번쩍한 금속 엔진. 그것에 매달린 강철로 된 관절. 기울어진 채 땅바닥을 사정없이 구르는 우유통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괴물 삼각대에서 받은 인상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삼각대 위에 매달린 거대한 기계 몸통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가까이에서 본 괴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기괴했다. 기다랗고 유연한 반짝이는 촉수는 괴상한 몸체 근처에서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놈의 몸체 위에 올려진 놋쇠 빛 후드가 좌우로 움직이며 사방을 둘러보는 것 같았다.


이제 그 기계는 내 눈을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그것은 일종의 금속성 거미 같았다. 다섯 개의 관절이 있는 민첩한 다리, 엄청나게 많은 수의 연결 레버, 그리고 몸통에 붙은 촉수 세 개가 있었다. 촉수는 무엇이라도 잡을 수 있는 듯했다. 세 개의 촉수로 많은 막대와 금속판을 끄집어냈다. 번쩍거리는 게처럼 생긴 생물이라는 것이 인상에 남는다.



딱 보면 느낌이 오겠지만, 삼발이와 다른 기계는 커다란 몸체에 길다란 다리와 촉수가 붙어있습니다. 화성인의 단면적인 형태와 비슷하죠. 몸통이 없이 머리(후드) 하나만 있고, 머리에서 곧바로 다리 혹은 촉수가 뻗어나옵니다. 다리는 여러 개의 관절이 달렸으며, 흔들거리는 촉수는 손이나 다리 역할을 대신합니다. 우유통에 비유한 걸 보면 머리는 둥그스름하게 생겼거나 원통형이거나 혹은 곡선미가 두드러진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웰즈의 설정은 후대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리메이크 작품에서도 화성인과 삼발이는 비슷한 모양으로 나옵니다. 후대 창작가들의 재해석이나 개성이 들어가서 원작과는 형태가 달라졌지만, 전반적인 모습은 변함이 없습니다. 화성인은 언제나 머리통이 크고, 거기에 곧바로 여러 개의 수족이 달렸습니다. 삼발이 역시 커다란 후드에서 여러 개의 다리나 촉수가 뻗어 나와 이동하는 방식이고요. <우주전쟁>은 하도 유명한지라 리메이크 작품도 많지만, 그 중에서 원작 묘사와 제일 가까운 것이 <젠틀맨 리그>라고 생각합니다. 만화에 나오는 화성인과 삼발이는 소설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합니다. 화성인은 머리통 밖에 없고, 거기에 수많은 촉수가 달렸다는 설명과 일치합니다. 삼발이는 후드가 삼각형에 가깝긴 하나, 둥근 조종석에 직접 연결되는 촉수들로 화성인과의 연관성을 강조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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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젠틀맨 리그>에선 둥근 머리(몸통)에 촉수가 달린 것이  공통점입니다.]


 

요즘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버전은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판일 겁니다. 영화판은 소설과 차이가 좀 있는데, 우선 화성인은 촉수 괴물이 아닙니다. 머리가 크긴 하지만 삼각형을 이루는데다 몸뚱이도 있죠. 촉수 대신 3개의 긴 다리와 몸통 한 가운데 짧은 부속지가 있습니다. 다리에는 각각 3개의 발가락이 달렸고요. 비록 화성인의 모습이 원작과 다르긴 하나, 화성인과 삼발이가 닮았다는 설정은 그대로 따라갑니다. 영화판 삼발이는 사실상 화성인의 뻥튀기 번전으로 후드가 길쭉한 삼각형입니다. 삼각 후드 아래로 작은 몸통이 달렸고, 여기에 다리와 촉수가 매달렸습니다. 다리는 3개이며, 몸통 한가운데 부속지(촉수)가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죠. 다리에 발가락이 3개씩 달렸다는 것도 똑같고요. 제 생각인데, 영화판은 화성인 모습에 삼발이를 맞춘 게 아니라 거꾸로 삼발이 모양에 따라 화성인을 디자인한 것 같습니다. 뭐든 간에 중요한 건 조종사와 거대 보행 병기가 닮았다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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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판 컨셉아트. 삼각형 머리와 작은 몸, 3개의 다리와 작은 부속지가 서로 닮았습니다.]



인간이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전차를 조종하듯, 화성인이 꼭 촉수 로봇을 조종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화성인과 삼발이를 닮은꼴로 만든 이유는 전투 병기의 기괴함을 극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작가는 화성인을 징그러운 촉수 괴물로 만들었는데, 그들이 조종하는 기계 역시 무섭게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삼발이 역시 커다란 머리에 촉수 가득한 형태가 되었겠죠. 이는 용자 로봇이 사람처럼 생긴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로망이냐, 공포냐의 감성 차이만 있을 뿐, 조종사와 기계가 닮았다는 근본적인 취지가 상통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조종사와 닮은 거대 보행 병기를 논할 때, 마징가 Z나 기동전사 건담을 언급합니다만. 이런 아이디어는 H.G.웰즈가 시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인간이 아니라 (흉측한) 외계인이란 게 결정적 차이점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