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네드리님이 올려주신 SF 단편집을 탐독하는 중입니다. 예전에 읽은 것들도 많지만, 분량이 분량이다보니 처음 보는 것들이 대다수네요. 덕분에 짬짬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단편집 중의 첫번째 작품이 바로 아서 C. 클라크의 '90억 가지 신의 이름'입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고, 저도 예전에 몇 번인가 읽은 기억이 나는 작품입니다. 대략 내용은 히말라야 고산 지대의 라마 수도원에서 90억 가지에 달하는 신의 이름을 기록하기 위해 현대 문명의 총아 컴퓨터를 들여오고, 그 컴퓨터를 관리하기 위해 기술자 두명이 따라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컴퓨터 하나 관리하는데 왠 기술자가 두 명이나?'라고 생각하셨다면 이 소설이 쓰인게 1967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컴퓨터 발달사를 살펴보면 60년대 후반에는 이미 집적회로(IC)를 사용한 컴퓨터가 개발되었던 시기이긴 합니다만, 작가는 이전 시대의(40년대 말~50년대 중반) 진공관을 사용한 컴퓨터를 모델로 한 듯합니다. 


실제로 세계 최초의 전기기계식 컴퓨터라 할수 있는 Mark-I은 1944년에 건설(이 시기의 컴퓨터는 조립이 아니라 건설입니다. 부피가 대략 교실하나는 우습게 넘어서던...^^;)된 이후 무려 15년이나 현역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60년대 후반 당시 일부 컴퓨터 전문가들에게나 알려져 있던 IBM360같은 최신 집적회로 컴퓨터를 등장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작가를 비판할 이유는 별로 없는 셈이지요. 하버드 대학과 IBM 공동으로 건설된 Mark-I은 이후 Mark-II, Mark-III에 이어 1952년 Mark-IV가 건설된 후로 후속작은 나오지 않게 됩니다. 


 Mark-I.jpg

<이 분이 MARK-I 선대인. 물론, 일부분만 화면에 잡힌것.>


 

작가는 여기에 상상력을 동원해 소설 속에 Mark-V 컴퓨터를 등장시킵니다. 자, 이쯤했으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컴퓨터가 진공관을 사용한데다, 부피도 거대하고 관리하기 위해 기술자가 두 명이나 붙어야 한다는데 이견은 없으실 겁니다. 


ENIAC.jpg 

<이 분은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 ENIAC. 당연히 방전체가 단일 컴퓨터.>


소설의 내용을 조금 더 소개하자면, 라마의 승려들은 자신들만의 문자로 9글자로 이루어진 모든 신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소설 속의 예를 그대로 인용하자면 AAAAAAAAA 부터 시작해서 ZZZZZZZZZ까지 종이에 기록하면 모든 작업은 끝이 나는 것이지요. 물론, 알파벳이 아니라 자기네들 고유의 문자로 말이지요. 이 작업에 하루 20시간씩 컴퓨터를 돌려 무려 석달이라는 작업시간과 일주일간의 태업까지 포함해 대략 100일 정도의 시간을 소비합니다. 


네, 이해합니다. 이쯤되면 콧웃음이 절로 나오시겠지요. '훗, 그 까짓 작업에 100일이라니... 선사시대가 따로없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 초당 수천번에 불과했던 계산 속도는 현재 초당 수천억번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으니 컴퓨터가 저 정도 목록을 계산해내는건 100일은 커녕 몇분에서 몇 십분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소설에서는 석달의 시간이 흐른 후 이 작업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챈 기술자들이 일주일간 태업을 벌이다가 작업종료 직전에 도망치듯 하산하는 것이 주요한 이야기의 뼈대가 되는데, 만약 현대의 컴퓨터라면...? 현대 컴퓨터의 엄청난 속도로 인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할 수 없지 않을까요?


과연 기술자들은 현대의 컴퓨터를 사용해 동일한 작업을 하면서 작업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채고 하산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을까?


네, 그래서 계산해봤습니다. 


우선, 신의 이름은 정확히 몇 가지나 될 것인가? 신의 이름은 라마의 고유한 문자를 사용해 9글자의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니 분명 고유 문자 갯수의 9승이 될 것입니다. 소설을 다 뒤져봐도 고유 문자의 갯수는 나오지 않으므로 대략 '90억 가지는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는 소설의 내용을 참고해 역산해 보면 13의 9승이 106억 정도 되므로 고유 문자의 갯수는 13개. 90억 가지는 조금 넘지만, 뭐 생각보다 몇 개 안되는 군요. 26개의 알파벳을 사용하는 영어였다면 5조 가지는 가볍게 넘겨줄텐데 말이죠.


위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현대 컴퓨터의 계산 속도로는 106억개 정도의 목록을 만들어내는건 그야말로 순식간입니다. 이건 굳이 계산해 볼 필요가 없는게 목록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목록을 프린트 해내는데 시간이 더 걸릴 것은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목록을 프린트 하는데는 얼마나 걸릴까? 까짓거 하는 김에 현대의 최신형 디지털 복합기까지 들고 가 봅시다. 제X스 사의 홈페이지에서 살펴본 바 최신형 디지털 복합기의 출력 속도는 대략 50ppm. 분당 50장이란 소립니다. 아래아 한글에서 대충 계산해 본 결과 A4 용지 한 장에 10포인트 크기로 아래위 양쪽 여백 최소한으로 잡으니 한 페이지에 270단어 정도 들어가는 군요.


106억 4백50만 가지의 9글자 단어를 A4용지에 출력하게 되면 총 39,275,923장. 대략 4천만 장이 되는군요. 흠... 뭐 그정도야... 응? 4천만 장? 자...자...잠깐!!!  최신형 복합기로 분당 50장 출력이니까 한시간에 3,000장, 하루에 72,000장? 4천만장 나누기 7만2천장하면 헉!!!

555일!!!  1년반!!!  거기에다가 용지보급 시간에다가 토너 교체 시간, 유지관리 시간이 필수적으로 소요되는 것이 프린터라는 놈이므로 분명 24시간, 1년 365일 풀로 가동할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실제로는 2년은 커녕 3년 안에 끝내기도 어렵다는 사실!!!


네. 결론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컴퓨터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결과물을 출력하는 프린터는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진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분명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라고 신이 내려준 것이거나, 신의 이름을 사칭하던 외계인이 내려준 것이겠지요. 설마 그 라마인?

안녕하세요. SF라면 사족을 못쓰지만 별로 머리에 든건 없는 베호기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스페이스 판타지로 이야기를 끝내는 좀 허망한 스타일이므로 주의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