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역사 포럼
밀리터리, 군사 과학, 그리고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게시판.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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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531
저는 조공체제에 대해서 쓸 실력은 못됩니다.
(뭐야 너 지금 그럼 나 낚은거야? 응?)
자자. 진정하시고 대신에 조공체제를 간접적으로 이해할만한 사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출처는 ' (또 하나의 일본)오끼나와 이야기 ' 입니다.
저자는 오키나와인이라 자부하는 분으로 아라사끼 모리테루 교수로 오키나오 대학교 교수 시랍니다.
저도 참 이상했던것이 아무로 나메에나 키타노 다케시 이야기가 인조이재팬에 나오면.
일본인들은 거의 대부분 '오키나와 출신이라 이국적이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거참 이상하죠. 확실히 이 책을 읽으면 오키나와인들의 일본에 대한 애증을 알겠더군요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저~리 휙 보내 버리고
시작합니다.
오키나와는 원래 독립왕국이었습니다. 나라의 이름은 유구琉球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제체제에서도 인정받는 편이어서 당나라 때부터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습니다.
조공왕래가 잦은 편은 아니었지요.
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입니다.
당시 명은 당연히 일본에 대하여 굉장히 감정이 나빠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이 조선침략의 원흉은 죄가 많아 제거되었다.
그러니 이제 어제의 일본이 아니다. 조공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지만
명은 끝내 들어주지 않습니다. 조공길이 막힌거죠.
조공이 왜 일본에 중요했나... 그것은 일본 뿐아니라 동아시아국가라면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조공체제는 어떻게 유지되었냐하면
예를 들어 몽고가 중국에 화페로 환산해서 은1000냥의 토산품을 중국에 조공합니다.
그러면 중국은 그것에 3~4배에 해당하는 즉, 은 3000냥에서 4000냥에 해당하는 사치품을 대신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계산상으로도 이익이지만 또 다른 큰 숨은 사실이 있습니다.
일전에 미국이 북한에 제제조치를 취하며 한 것이 '사치품 금수'였습니다.
당시 언론분석을 기억하신다면 체제유지를 위해서 당고위층, 지배층을 관리하기 위해서 사치품이 절실하고 따라서 북한은 큰 압박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되었고, 결과적으로 북한의 반응도 매우 격렬하고 즉각적인 것이었습니다.
일전에 소개해드린 '맨얼굴의 중국사'에서 보충하자면, 조공은 중국입장에서는 계산상 분명 손해였습니다. 따라서 조공품의 상한액을 정하고 그에 지나치게 초과하면 상한액까지만 받아줬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티벳에 사는 강족이 약속을 어기고 10배의 조공품을 가져옵니다. 중국은 이에 놀라 나머지 9할을 돌려보냅니다. 강족은 이에 분개하여 중국변경을 침략합니다. 그러자 중국조정은 이들을 달래 조공상한액을 2배로 해주기로 해서 큰 분쟁없이 돌려보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돌아가서,
조공길이 막히자 일본막부는 큰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나! 역시 일본인들은 잔머리의 대가였던 것입니다!!!!(오 존경스러워라! (진심임))
당시 유구 왕국의 왕은 귀신이들렸는지 미쳤는지 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왕명을 내려 살상도구를 모두 파기하고 군선을 불태우고 군대를 없애버립니다.
(와~ 군대가 없대~ 평화다 ~ 만세~ 인류애의 승리야~)
일본은 막바로 유구왕국을 침략하여 피크닉하듯이 유구왕국을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떠납니다.
원래 유구왕국은 작고 변방의 나라라 명과 그리 자주 조공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유구 점령이후 바로 유구는 명에 조공 사신을 보냅니다.
하지만, 당연히 보고되어야할 유구 침략사실은 철저히 숨기고 마치 유구에 어떤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명을 속입니다. 명은 이에 속아 한참을 유구가 건재하며 점령당한 사실은 까맣게 모르게 됩니다. 되려 까마득한 바다 끝의 나라에서 가상하게 요새 조공을 자주 한다며 칭찬을 하기도 하죠.
이제 아시겠죠?
조공길이 막힌 일본은 유구를 점령한뒤 거짓으로 유구의 이름을 빌려 중국에 조공하여 경제적 이득과 사치품의 수입을 도모했던 것이지요.
이후 오키나와의 파라만장한 역사는 이 주제와 맞지 않으므로 넘어갑니다.
어떻게, 조공체제에 대하여 감이 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뭐야 너 지금 그럼 나 낚은거야? 응?)
자자. 진정하시고 대신에 조공체제를 간접적으로 이해할만한 사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출처는 ' (또 하나의 일본)오끼나와 이야기 ' 입니다.
저자는 오키나와인이라 자부하는 분으로 아라사끼 모리테루 교수로 오키나오 대학교 교수 시랍니다.
저도 참 이상했던것이 아무로 나메에나 키타노 다케시 이야기가 인조이재팬에 나오면.
일본인들은 거의 대부분 '오키나와 출신이라 이국적이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거참 이상하죠. 확실히 이 책을 읽으면 오키나와인들의 일본에 대한 애증을 알겠더군요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저~리 휙 보내 버리고
시작합니다.
오키나와는 원래 독립왕국이었습니다. 나라의 이름은 유구琉球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제체제에서도 인정받는 편이어서 당나라 때부터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습니다.
조공왕래가 잦은 편은 아니었지요.
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입니다.
당시 명은 당연히 일본에 대하여 굉장히 감정이 나빠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이 조선침략의 원흉은 죄가 많아 제거되었다.
그러니 이제 어제의 일본이 아니다. 조공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지만
명은 끝내 들어주지 않습니다. 조공길이 막힌거죠.
조공이 왜 일본에 중요했나... 그것은 일본 뿐아니라 동아시아국가라면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조공체제는 어떻게 유지되었냐하면
예를 들어 몽고가 중국에 화페로 환산해서 은1000냥의 토산품을 중국에 조공합니다.
그러면 중국은 그것에 3~4배에 해당하는 즉, 은 3000냥에서 4000냥에 해당하는 사치품을 대신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계산상으로도 이익이지만 또 다른 큰 숨은 사실이 있습니다.
일전에 미국이 북한에 제제조치를 취하며 한 것이 '사치품 금수'였습니다.
당시 언론분석을 기억하신다면 체제유지를 위해서 당고위층, 지배층을 관리하기 위해서 사치품이 절실하고 따라서 북한은 큰 압박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되었고, 결과적으로 북한의 반응도 매우 격렬하고 즉각적인 것이었습니다.
일전에 소개해드린 '맨얼굴의 중국사'에서 보충하자면, 조공은 중국입장에서는 계산상 분명 손해였습니다. 따라서 조공품의 상한액을 정하고 그에 지나치게 초과하면 상한액까지만 받아줬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티벳에 사는 강족이 약속을 어기고 10배의 조공품을 가져옵니다. 중국은 이에 놀라 나머지 9할을 돌려보냅니다. 강족은 이에 분개하여 중국변경을 침략합니다. 그러자 중국조정은 이들을 달래 조공상한액을 2배로 해주기로 해서 큰 분쟁없이 돌려보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돌아가서,
조공길이 막히자 일본막부는 큰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나! 역시 일본인들은 잔머리의 대가였던 것입니다!!!!(오 존경스러워라! (진심임))
당시 유구 왕국의 왕은 귀신이들렸는지 미쳤는지 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왕명을 내려 살상도구를 모두 파기하고 군선을 불태우고 군대를 없애버립니다.
(와~ 군대가 없대~ 평화다 ~ 만세~ 인류애의 승리야~)
일본은 막바로 유구왕국을 침략하여 피크닉하듯이 유구왕국을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떠납니다.
원래 유구왕국은 작고 변방의 나라라 명과 그리 자주 조공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유구 점령이후 바로 유구는 명에 조공 사신을 보냅니다.
하지만, 당연히 보고되어야할 유구 침략사실은 철저히 숨기고 마치 유구에 어떤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명을 속입니다. 명은 이에 속아 한참을 유구가 건재하며 점령당한 사실은 까맣게 모르게 됩니다. 되려 까마득한 바다 끝의 나라에서 가상하게 요새 조공을 자주 한다며 칭찬을 하기도 하죠.
이제 아시겠죠?
조공길이 막힌 일본은 유구를 점령한뒤 거짓으로 유구의 이름을 빌려 중국에 조공하여 경제적 이득과 사치품의 수입을 도모했던 것이지요.
이후 오키나와의 파라만장한 역사는 이 주제와 맞지 않으므로 넘어갑니다.
어떻게, 조공체제에 대하여 감이 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명말청초의 상황은 참 희한해서 남방 및 유럽과의 무역으로 벌어들인 은을 북방의 금나라를 비롯한 이민족에게 퍼다주는.... (은본위제가 도입된 거 자체가 북방유목민족과의 전쟁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본 적 있습니다. 북방에서 계속되는 분쟁에 병사들의 봉급과 병기와 보급물자를 일일이 수송할 수 없어 현지에서 은을 주고 조달하도록 했고 그 은이 주로 만주족 등으로 흘러들어갑니다.) 만성적인 적자상태가 돼버리죠.
다른것보다 조공이라는 게 주변국가에서는 자꾸 가려고 하고 중국 정부에서는 자주 오지는 않았으면
하는 거라는 건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납니다.
얻는게 많으니까 자주 가는 거였겠지요.?
하는 거라는 건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납니다.
얻는게 많으니까 자주 가는 거였겠지요.?
조공은 겉으로야 신하와 군주의 관계 어쩌고저쩌고, 서양 측에서 보면 중국이 동양을 말 그대로 지배하고 있는 듯이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세레모니의 성격이 짙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일단 중국과는 조공 관계 없이는 외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기에..... 또한 전통적으로 청말대에 이르러 조선에 대한 점유권을 주장하기 전까지 중국은 군신의 예를 맺은 나라에 대한 내정 간섭은, 예컨대 어른된 도리가 아니라며 터부시 했습니다. 더군다나 조공국이 국방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종주국인 중국은 이를 도와주어야 할 의무(혹은 체면??)이 있었고, 거기다 플러스로 경제적인 노림수까지 따랐죠. 진상에 따른 선물은 진상품 자체보다 진귀한 것이 많았고, 회시를 통해서 선진 문물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본문에서 정정할 부분은 류큐를 점령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1609년 시마즈 가문, 그러니까 사츠마한에 의한 것이고, 나하에 부교쇼를 두어서 감시, 조세를 행한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막부는 1636년에 류큐를 사츠마 한의 소유로 인정하였으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외국 취급을 한 것이죠. 새로운 장군의 취임시에 경하사를 보낸다던지..... 막부 측에서는 지배자인 시마즈씨와 류큐왕가를 같은 로쥬 레벨로 보았고, 외국 취급을 하면서도 국서는 한문이 아니라 화문으로 보내는 등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죠.
정작 일본에 편입된 것은 폐번치현이 이뤄지고 나서인데 이번에는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하질 않나...;;
본문에서 정정할 부분은 류큐를 점령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1609년 시마즈 가문, 그러니까 사츠마한에 의한 것이고, 나하에 부교쇼를 두어서 감시, 조세를 행한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막부는 1636년에 류큐를 사츠마 한의 소유로 인정하였으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외국 취급을 한 것이죠. 새로운 장군의 취임시에 경하사를 보낸다던지..... 막부 측에서는 지배자인 시마즈씨와 류큐왕가를 같은 로쥬 레벨로 보았고, 외국 취급을 하면서도 국서는 한문이 아니라 화문으로 보내는 등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죠.
정작 일본에 편입된 것은 폐번치현이 이뤄지고 나서인데 이번에는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하질 않나...;;
원정을 위한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던 당 때는 그런 거 없었죠. 개기면 바로 주먹 날아갔죠.
하지만 명 대부터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조공댓가를 주변국에 퍼준 건 '평화를 돈주고 산다'는 개념이었던 걸로 알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