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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핀천이라는 작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은 1990 년 무렵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고, 중학교 시절 열심히 읽던 학원사 세계문학전집이 절판되는 상황이어서

아직 재고가 남아 있었던 동네 서점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한 권씩 들고 나오던 시절이었습니다.

  

학원사 세계문학전집 중에는 전설로 남게 되는 책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는 토머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야사르 케말의 <메메드>같은 책들은

희귀본이 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다니지만 쉽게 구할 수 없게 되기도 했습니다. 
싱클레어 루이스의 <메인 스트리트>, 야로슬로프 하셰크의 <병사 슈베이크> 등도 희귀본이 되었죠.

  

학원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두 권 분책되어 나왔던 토머스 핀천의 <브이>가 눈길을 끌었던 것은...
미국의 SF 드라마 시리즈 <브이>와 제목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 1985년 한국을 강타했던 여운이 남아 있었죠.

서점에서 무턱대고 사들고 집에 와서 보니, 외계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책이었고, 일종의 추리소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추리소설로 생각하고 읽기에는... 너무 난삽했습니다. 뭔 얘기를 하려는지조차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죠.

한창 수험공부에 열중해야 할 고교생이 아무리 독서에 익숙하다고 해도 머리 식히기 위해 읽을 책은 아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토머스 핀천의 <브이>같은 책이 희귀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학원사의 책이 시장에서 들어갈 무렵 민음사 이데아총서로 <브이를 찾아서>가 번역되었고,

당시 서점가를 돌아다녀 보니 <제 49호 품목의 경매>도 이미 출간되어서 여러 해 팔리고 있었습니다.

1980 년대 중반에 나와서 1990 년대 초에 중판도 찍고, 아주 많이는 안팔려도 절판되지 않고 있었죠.

다시 말해 토머스 핀천의 작품들은 한국에서도 은근히 중판이나 재번역되면서 살아남고 있었습니다.

   

그런 정도로 작가에 대해서 알고, 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이런 류의 책들을 붙잡고 있었던 시절...

박상준님의 <멋진 신세계> SF 해설서를 사서 들고 다니게 되었는데, 위 사진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도리스 레싱, 마거릿 애트우드, 토머스 핀천을 언급하고 있었고, 특히 <중력의 무지개>에 대한 소개가 특기할만 했죠.

   

실은 학원사(주우)의 <브이>라든지 지학사(벽호)에서 나온 <제 49호 품목의 경매>를 보면

이미 <중력의 무지개>를 토머스 핀천 최대 걸작이라고 칭송하는 작가 소개 글이 무수했더랬습니다.

<중력의 무지개>는 무려 전미도서상을 받은 책이었고, 퓰리처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작으로 선정되고도
퓰리처 재단에서 "난해하고 외설적"이라며 시상을 반대하여 해당년도에 "퓰리처상 수상작 없음"으로 발표되면서
오히려 더 큰 화제를 낳았던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 작가는 전미도서상이고 뭐고 상 받으러 나온 적이 없지만서도...

  

1990년대 초반에는 토머스 핀천의 책이 구하기 쉬웠고 계속 번역되어 나오는 추세여서,

<중력의 무지개>> 역시 쉽게 접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무려 20 년을 기다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20년 만에 새로 번역된 핀천의 세 번째 장편 <중력의 무지개> 번역본은  어이없는 가격으로도 유명하죠.

두 권으로 분책되어 나온 중력의 무지개 번역본은 용어해설을 포함하여 총 1450 페이지 정도 분량이었고,

무조건 두 권 합쳐 판매하면서 가격은 9만 9천원 - 작년에 해당 가격을 듣고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왔습니다.

그것도 700 부 한정 인쇄하고, 더 안팔릴 것 같으니까 엄청난 가격을 때려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번역본 나오고 1년 후인 지금 반값 할인판매를 합니다. 700 부 한정인데도 안팔렸나 봅니다.

반값 할인판매를 해야 겨우 상식적으로 책 분량에 걸맞는 적당한 가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원...

  

최근들어 반값으로 떨이 처분한다고 해서 즉각 사들여왔습니다.

어제부터 약 10 시간을 나름 집중하고 읽었는데, 50 페이지 진도를 나갈 수가 없네요.

본래 핀천의 책들이 대개 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미 핀천의 작품에 면역이 있는 제가 이렇게 헤매면

과연 누가 그렇게 순조롭게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비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중력의 무지개>가 더 정신사나운 것 같습니다.

작년에 나온 초역본을 읽은 분들이 번역이 너무 이상하다고 하여 욕을 좀 먹고 있던데..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과연 번역의 문제일런지... 그냥 원문이 그모양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여겨지더군요.

   

1974년 전미도서상 및 퓰리처상 시상 여부를 둘러싼 소동이 벌어질 때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지만, 

 <중력의 무지개>는 확실히 성적인 소재를 자유분방하게 취하여 담아내고 있는 면이 상당히 강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나도 어지럽게 서술되어 있어서 별로 야한 줄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더 크지만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도 챕터 하나가 주인공 와이프의 바람피운 회고담에 침대 밑 요강에 대한 찬사인데,

너무 난삽하게 묘사되어 도대체 야한 이야기인지 뭔지 분간이 잘 되지 않기로는 <중력의 무지개>와 막상막하입니다.

  

<중력의 무지개>는 메인 테마 자체가 V2 로켓에 대한 책이고, 2차 대전 당시 영국과 독일을 다루고 있으며,
부글부글 끓는 아수라장을 조각조각 나누어 제멋대로 묘사해서 전체가 이루어지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 조각 하나하나를 읽어내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 과거 <브이>는 차라리 읽기 쉬웠어요.
<중력의 무지개>가 V2 로켓을 다루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컨셉은 그리 크지 않은 데, 
가끔씩 번뜩이는 과학기술에 대한 묘사는 제법 작가가 이 바닥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곤 합니다.
작가가 코넬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인지 원....
더 읽어 봐야 이 책이 SF로 분류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어 번역본 표지도 자세히 보면 꽤 대담한데,
얼핏 보면 그게 뭔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작품 자체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