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이곳은 무엇이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 게시판입니다. (댓글 기능을 다시 활성화시켰습니다.)
오버마인드님의 글을 보고 글을 하나 써봅니다. 해당 글은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 - 국가우선 - 을 당연시 여기는 분들을
비판하는 내용이였죠. 대의를 위해서 누군가 희생해야 된다고 말한다면 굉장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소수가 희생하지 않고서 다수의 이익이 증가할 수 있는가?"라고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그렇다 라고 자신있게 대답하진 못하겠더군요. (대의=다수의 이익이라고 설정했으니 출발부터 공리주의 관점이군요.)
우리동네에 들어서는 혐오시설은 어딘가에는 지어져야 하지만, 그 지역주민들의 희생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소수의 희생없이 국가의 이익은 증가할 수가 없게 되어버리죠.
여기서 떠오른 것이.....
경제학에서 거론하는 자원최적분배에 대한 이론으로 파레토최적과 칼도어힉스의 최적입니다.
(.... 경제학 조금만 건드려보셨으면 충분히 아실 내용인데 왠지 잘난척하는 느낌이네요......)
파레토최적은 파이가 단 한조각도 남김없이 분배된 상태를 최고의 효율을 낸 상태로 보는 이론입니다.
누구에게 얼마나 가는지는 관심이 없어요. 남김없이 배분되면 그만이죠. 또한 기존 배분상태에서 전체효율을 증가시키기 위해
누군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면 파레토 최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기존에 파이가 A에게 5조각 B에게 5조각 나눠져 있는 상태고 남은 파이가 1조각 있다면 파레토 최적이 아닙니다.
이걸 A또는 B에게 나눠주면 파레토 최적이 되지요. 이때 B가 부양가족이 많다는 이유로 A것을 뺏어서 B에게
나눠주면 파레토최적에 어긋납니다.
이 이론은 파이가 기존에 (A4, B20)로 분배되어 있는 상태가 있으면 (10,15)이나 (3,30)인 상태는 전체량이 더 크든 작든,
분배가 공정하든 아니든 더 좋은 상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로지 기존 분배상태에 비해서 A와 B 둘다 모두 더 많은 재화를
가지는 상태 즉(4,28)라든지 (14,20) 혹은 (25,25) 같은 상태만을 더 효율적인 상태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누구도 현상태보다는 손해를 감수하지는 않지만 상대적박탈감이라던지, 정당한 노동의 대가같은 개념은 완전히
무시되어버리죠.
칼도어힉스는 이와는 달리 A의 파이를 뺏어서 B에게 주더라해도 B가 파이를 가져서 얻는 효용이 A가 파이를 가져서 얻는
효용보다 크다면 더 효율적인 상태라고 생각하는 이론입니다. 즉 자원 배분의 형평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요.
형평성 측면에서 손을 들어주고 싶겠지만, 자칫 공리주의라는 비판을 받을수도 있는 이론입니다.
기초적인 경제학 내용을 운운하며 뻘짓했는데.....
두 이론은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만, 제가 거론한 이유는 꼭 경제학이 아니라 하더라도 시사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죠.
아직 사회에 남아 있는 파이가 있다던가, 파이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파레토최적을 만족하면서 사회효용을 증가시키는 방법은 없습니다. 즉, 누군가는 지금 현재 그 사람이 누리고 있는 부분을
일정량 희생해야만 사회전체 이득이 증가하는 칼도어힉스최적의 상태를 고려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게 사실은 현실적이라는 거에요. 어떤 상황에서든 소수가 전혀 희생하지 않고 다수의 이득을 늘리는 방법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없을 겁니다.
저는 소수의 희생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봐요. 다만 어떤 상황에서 누가 희생을 하고 양보를 하는지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룰이 필요한거죠. 예를들어서 지역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삶의 터전을 빼앗아버리는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지만, 전체 시민의 건강을 위해서 흡연권을 제한하거나 소득분배의 형평성을
위해 누진세를 적용하는 것은 힉스이론을 적용해도 무리가 없겠죠.
그런 룰이 제대로 서있지 않거나 시민들이 거기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거겠지요. 그런 점에서 많은
시민들이 국회를 비난하기도 합니다만, 국민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참 많다는 것을 많이 느끼곤 하네요.
어렴풋이 기억을 따라가본걸 토대로 보자면, 가면쓴 상태 - 저걸 무지의 베일이라고 했죠 - 에서는 원시공산상태를 가정한 걸로 기억합니다. 이건 실증적인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롤스가 그럴것이라고 가정하고 논지전개를 위해 깔아둔 전제죠. 그리고 약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무의식 공감 때문에 의도적으로 약자를 보호했다기 보다는 인력이 최우선의 자원인 시점에서 조직의 생존에 가장 합리적인 전략으로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약자가 보호되는 사회인거죠.
누가 소수인지 구분하는 것도 문제일 것 같습니다. 상위 1%도 소수이긴 소수죠. 윗대가리들 희생하면 안 되는 건지.
소수가 아니라 그냥 약자라고 가리키는 게 맞는 말 같아요.
퇴마록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지만, 다수를 위한다고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추악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문제가 되는 일이 존재합니다.
먼저 희생하는 자가 계속 희생을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100명의 구성원이 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100명이 한번씩은 희생을 하게 된다면 상관없죠. 하지만 100명의 구성원들 중 90명만이 돌아가며 희생을 하게 된다면, 문제가 됩니다.
둘째로 정말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냐는 점도 봐야 할 것입니다. 100명의 구성원들 중 10명이 희생을 했는데 그 이득이 5명의 구성원들에게만 돌아가고 나머자 85명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면, 결과적으로 5명을 위해 10명이 희생한 -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한 - 결과가 되는 것이죠.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점 두가지가 고스란히 나타나는군요. 전쟁이 나도 희생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만의 이익을 온 국민의 이익으로 포장해서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희생하는 다수'들은 '절대 희생하려 하지 않는 소수'에게 표를 몰아주는 '이상한 국민'들입니다.
절대 희생하려 하지 않는 그 소수가 생각하는사람에 따라 국회의원 전체일수도 있겟죠? 그리고 만약 그 소수를 아무도 안할려고 할때 그리고 결단해야만 할때가 존재 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신안염전 사건 같은경우에도 사실상 그 동네주민 모두가 관여하고 있지만 결국 경찰과 몇명만 처벌외엔 없지요. 또 한가지 예로 커피나 중국산 공산품이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과 대우 덕에 현대 소비자들이 싼가격에 제품을 사용할수있지요. 가격을 올려도 되니 그 노동자들 처우를 계선하라고 하는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결국 제 생각에는 사회라는것도 결국 개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모인것이기 때문에 다수가 소수를 압박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고 보입니다. 그 것을 최소한의 발란스를 유지 하기위해서 법치국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것이구요.
개인적으로 희생의 논리에 약자라거나 강자라거나 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의적으로 다수를 위해 특정 소수나 개인이 희생하는 것은 몰라도, 어찌되었건 희생을 강요당하고 그로 인해 누군가 타의로 희생하게 된다면 그 소수는 '약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희생을 '당연시'하는 것이죠.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데에 '전체'라는 대의를 내세우건 어쨌던 어떤 숭고함도 당연함도 없습니다. 일말의 죄책감도 책임감도 감사함도 없이 '어쩔 수 없잖아'로 치부되는 것은 단순한 폭력이죠.
기본적으로 '일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소수의 희생'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 일부씩의 희생'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의 희생이 거룩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죠.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10명이 조금씩 모으면 한 그릇의 밥을 만들 수 있다라는 점에서 다수가 조금씩 희생하여 소수를 살리는 사례입니다.
반대로 보면, '일반십시'가 되겠군요. "한사람이 '굶으면' 10명이 조금 더 먹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다지 소수의 희생이 고귀하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하는 반면, 다수는 고작해야 한 숫가락을 더 먹을 뿐이거든요.
일반적으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대부분 그렇습니다. 소수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처지에 빠지게 되는 반면, 다수가 얻는 이익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겁니다. 결국 소수의 희생조차 사실은 '개죽음'인 경우가 많죠.
소수가 희생하여 다수가 이익을 보는 경우는 대개 영화 속의 영웅담에서나 나올만한 상황입니다.
앞서 쓰레기 하치장을 이야기해 볼까요? 사실 이것도 비슷합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생활 환경이 엄청나게 나빠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절대적인 이익을 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소수의 사람들이 희생하여 만들어지는 하치장의 크기 따위야 그다지 대단한게 아니어서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또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많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장소들은 훗날 더 큰 위협으로서 수많은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장래의 위협을 줄이고 싶다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기보다는 소수조차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생각해 볼까요? 원자력 발전소는 많은 이에게 이익을 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소수의 희생'은 아니지요. 원자력 발전소로 인해서 일어날 수 있는 위협은 국민 절대 다수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설사 사고가 나거나 하지 않더라도 원자력 발전소가 설치된 지역의 면적은 사실 작지 않다는 것을 볼때 '소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사실 그 '소수'라는 것이 생각만큼 작은 수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절대 다수는 아닐지라도 꽤 많은 비율의 다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수가 얻는 이익이 엄청나게 큰 것도 아닙니다. '일반십시'의 사례죠.
하지만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가 이익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없는건 아닙니다. 바로, 희생하는 1명이 10명을 충분히 먹이고도 남을 만큼을 가진 사람인 경우입니다. 본래 20그릇의 밥을 가진 사람이 10그릇을 나누어 준다면 10명이 밥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이 경우에도 1명은 자신이 가진 것이 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희생'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가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는건 아니죠. 그냥 조금 아쉬운 정도로 끝납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것은 사실은 이러한 형태가 되어야만 타당함에도, 대개는 '일반십시'라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착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말이지요.
여담) "아루스란 전기"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쟁 중에 병사가 굶주리는 것을 안타까워한 왕이 자신의 식사를 나누어 주었을 때, 이는 고결한 행동인가? 이에 대한 군사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그 왕은 전쟁 준비를 충실하지 못하게 하여 병사를 굶주리게 했기 때문에 무능하며, 얼마 안 되는 식사를 일부 병사에게만 나누어주어 나머지 병사를 굶어죽게 했기 때문에 무능하며, 얼마 안 되는 병사를 구하는 것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려했기에 비겁하다."
사실 우리가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얘기하는 건 사실 이러한 형태인 경우가 많죠. 20그릇의 밥을 가진 사람이 2그릇 쯤 나누어주면서 "나는 자상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느낌...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이것이 좀더 가면 전세계에서 딱 2곳만 성공한것으로 보이는 경제구조가 되지 않나요? 그 성공햇다고 보는 노르웨이와 카타르도 결국 석유라는 희소자원이 많고 인구수는 적기 때문에 가능하고 전 봅니다만 거기다가 그 반사적 효과는 다른나라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채워지는것이구요.
사실상 전세계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국민 은 소수이고 대다수는 잘사는 축에 속하는데 그러면 우리나라의 국부의 반이상을 외국에 줘야됩니다. 그걸 찬성하는 국민이 1%라도 될까요? 이렇기 때문에 일반십시만 거의 이루어 지는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욕먹는 경우는 간단 합니다.
그 소수가 약자 거든요.
EBS 법학철학 3부작 시리즈인가... 룰스의 정의론을 설명하면서 제시하더군요.
각자의 입장을 베제한 상태에서 (가면의 쓴 상태에서)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약자를 배려를 합니다.
왜?
그 약자가 내가 될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공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를 배려한 선택을 내립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의 위치가 존재하면 그 이익을
내세우기 마련입니다.
그 상황에서.
그 희생과 양보의 대상이 약자이고 약자가 멸시 받는 사회가 좋은 세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