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속의 상상 과학과 그 실현 가능성, 그리고 과학 이야기.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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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는 일찍이 역사를 몇 단계로 나눴습니다. 생산 양식에 따라 원시 공산 사회, 고대 노예 사회, 봉건 사회, 자본주의 사회 등으로 나눴죠.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극단에 다다르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시대가 도래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 시대는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두고두고 사회주의자들을 괴롭혔죠. 적극적으로 혁명에 나설 것이냐,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기다릴 것이냐…. 이런 논의를 보니까 문득 사이언스 픽션의 탄생이 궁금하더군요. 사이언스 픽션은 19세기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출현했고, 20세기 동안 미국과 일본에서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수많은 매체에 퍼졌고, 절대 빠질 수 없는 장르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이언스 픽션은 너무 당연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정말 필연적인가?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나지 않을 확률이 있을까? 사이언스 픽션이 등장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무엇인가?
사이언스 픽션이 이미 넘쳐나는 마당에 이렇게 질문하면 좀 웃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예 가치가 없는 질문은 아닐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의 성향을 한 번 더 살펴볼 기회가 되니까요. 자, 사이언스 픽션이 인류 문화에 등장한 건 정말 필연적이었나? 사이언스 픽션은 필연적으로 인류 문화에 나타나야 했나? 이 물음에 확답할 수 없지만, 거의 필연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사이언스 픽션은 언젠가 반드시 나타나야 할 운명이라는 뜻이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인간은 끊임없이 이상 사회를 꿈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이성적이라고 해도 인간 사회에는 수많은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배 계급은 언제나 피지배 계급을 착취했습니다. 노동자, 빈민, 여자, 아이, 노인, 외국인, 장애인, 종교인, 기타 등등의 이유로 여러 사람들이 차별을 받았고, 지금도 차별을 받는 중입니다. 당대의 지식인과 철학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고, 그걸 어떻게 고쳐야 하고, 그걸 고치면 어떤 사회가 등장할지…. 그리고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상상한 이상 사회를 설파했죠.
즉, 인류는 예전부터 이상 사회, 유토피아를 꿈꿨습니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사이언스 픽션의 출발점입니다.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철학자가 대충 평등한 세상이 올 거라고 떠들어봤자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듣지 않겠죠. 뭔가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고, 사회의 발전 양상과 시민들의 과제를 그럴 듯하게 제시해야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겠죠. 이상 사회는 세상에 나타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논리적인 상상력 없이 그걸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하죠. 그리고 논리적인 상상력은 사이언스 픽션의 밑바탕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이언스 픽션의 역사는 상당히 유구합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고대 시대부터 철학자들은 지도자와 시민들에게 인류의 미래와 이상을 제시했으니까요. 물론 과거의 어떤 철학자가 유토피아를 묘사했다고 해도 현대인들은 그걸 곧장 사이언스 픽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논리적인 상상력일 뿐 그 자체로 SF가 될 수 없어요. 일단 그런 사상은 어디까지나 사상일 뿐, 소설이나 만화, 영화, 게임 같은 매체가 아니죠. 게다가 자연 과학도 빠졌고요.
논리적인 상상력은 모두 사이언스 픽션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SF의 기본은 자연 과학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19세기 유럽에서 출발했는데, 그 당시의 과학 기술은 유럽에서 정점을 찍었죠. 기계 거부 운동도 벌어지고, 산업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마르크스 역시 그런 산업 발달과 과학 발전을 목격했고, 그래서 공산주의 사상을 창시했죠. 산업 발달은 각종 기계를 양산하고, 기계가 잉여 가치를 생산하고, 잉여 가치가 인간(노동자)을 소외시킬 테고, 소외된 인간들이 끝내 혁명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산업/과학 발달에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SF 작가들도 그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놀라운 발전은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작가들은 온갖 과학적/기술적 요소를 소설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유토피아>나 <걸리버 여행기>보다 <프랑켄슈타인>을 SF의 시초로 꼽습니다. 그 이후 쥘 베른, 휴고 건즈백, 허버트 웰즈 등이 출현했고, SF 소설은 20세기로 향하는 급물살을 항해합니다.
논리적인 상상력 자체는 예전에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이전의 사람들은 과학 기술과 산업 발달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인류 사회와 자연 환경과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고대 철학자들과 현대의 SF 작가들의 차이는 바로 그겁니다. 자연 과학의 급격하고 충격적인 변화, 고전 물리학, 다윈의 진화론, 스티븐슨의 증기 기관, 패러데이의 전자기 법칙 등을 보거나 듣지 못했죠. 과학 기술이 어떻게 산업을 부흥시키고, 어떻게 사람들의 이성을 깨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로 그게 본격적인 SF의 출발선이죠. 음, 이렇게 본다면, 사이언스 픽션과 마르크스주의는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원인으로 탄생한 셈입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마르크스주의 모두 과학 때문에 탄생했고, 현재의 문제를 경고하고 미래 사회를 꿈꿨죠. 아마 SF 소설들이 사회주의를 자주 이야기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흠, 그리고 보면, 사이언스 픽션의 필연적인 도래처럼 (마르크스가 아니라도) 공산주의 역시 필연적으로 나타났을 것 같네요. 인간은 논리적으로 상상하기 마련이고, 과학 기술은 상상력을 자극할 테니까요.
만약 산업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자연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맥스웰이 전자기학을 주장하지 않고, 다윈이 비글 호를 타지 않고, 영국 런던에서 과학 엑스포가 열리지 않았다면? 글쎄요, 어쩌면 19세기의 산업 혁명과 과학 혁명이 우연일 수 있겠죠. 저는 자연 과학의 역사는 잘 모르기 때문에 다윈의 진화론이 19세기에 필연적으로 등장했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쨌든 맥스웰이 웬 이상한 악마를 주장하지 않고,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지 않았다면, 사이언스 픽션 역시 등장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유토피아 문학은 존재했을 겁니다. 고대부터 시작된 철학 그 자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없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인간이 아예 이성 자체를 잃어버린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유토피아 문학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유토피아 문학은 우리가 아는 SF 소설과 많이 다르겠죠. 아시모프의 우주 이야기나 하인라인의 미래 역사 대신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같은 소설이 대세가 되었을 테고, SF 세상은 좀 심심해졌을 겁니다.
19세기 유럽에서 SF 소설이 탄생하지 않은 대체 역사. 그것도 나름대로 흥미로운 상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대체 역사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산업 혁명과 런던 엑스포와 다윈과 패러데이부터 없애야 할 겁니다. 이런 사건과 인물들이 인류 역사에 존재하는 이상, SF의 탄생 역시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렇게 SF 소설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음, 어쩌면 마르크스도 그냥 저냥 기자 양반으로 머물렀을지 모르겠어요. 엥겔스랑 만나지도 않았을 듯.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소설로 표현한다면, SF 소설이 가장 잘 어울리겠죠. 마르크스주의 사회는 아직 등장한 적이 없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회를 논리적으로 상상하기 위해서는 SF적 외삽법이 꼭 필요하니까요. 유토피아/디스토피아 문학이 대체적으로 SF 계열에 속하는 만큼, 이상 사회를 꿈꾸는 마르크스주의 역시 SF 계열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저는 마르크스나 엥겔스 영감이 SF 소설을 썼다면 어땠을지 참 궁금합니다.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메리 셀리나 쥘 베른과 동시대 사람이고 똑같은 유럽인이었습니다. 본인이 상상 과학을 원했다면, 얼마든지 SF를 연구할 수 있었죠. 엥겔스가 마음만 먹었다면, <해저 2만리>를 읽고 폭력 혁명과 미래 사회의 대안을 외칠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네모 선장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입니다만.)
2016.04.11 19:24:44
저는 과학 소설을 (일반적으로 '장르 문학'이라고 부르는) 비현실 문학의 한 갈래라고 봅니다. 과학이 발전하니까 그걸 소재로 하는 소설도 나온 것일 뿐, 예술적인 가치, 표현과 주제의 문제에 있어서는 '비현실 문학'이라는 하나의 큰 계열에 속할 뿐이라는 거죠.
제가 말하는 비현실 문학은 판타지, 무협, 호러, 닌자술, 가젯 첩보물 (007이나 미션 임파서블 등, 실제로 없는 첩보 도구를 사용하는 것들) 등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존재한다고 설정함으로써만 표현이 가능한 장르인 거죠.
예를 들어 홍길동전이나 전우치전은 현대 관점에서 굳이 분류하자면 판타지입니다만, 도술이 실재한다고 믿고 도가나 불가가 세상 이치를 '실제로 설명하는' 주요 학문 중 하나이던 당시로서는 SF와 구분이 모호합니다. '주역'이 지금의 상대성 이론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고 국가 공식 관청에서 풍수지리를 살피며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던 시대에, 홍길동의 도술을 판타지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 시대 관점에서 축지법과 분신술은 오늘날의 워프 항법이나 클론과 다를 게 없습니다.
즉 과학 소설은 과학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긴 한데, 이것은 과학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이후의 모든 학문 발달이 비현실 소설이라는 큰 장르와 결합한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도교 소설과 현대의 과학 소설은 소재만 다를 뿐 크게 보아 같은 장르이고, 후대에 과학을 뛰어 넘은 통섭학 같은 게 나온다면 그 시대에 맞춰 통섭 소설이라는 분파도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죠.
새로운 발견물, 기술적인 경이, 신기한 과학 현상에 관한 관심에서 근원을 찾는다면 훨씬 이전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죠. 서구권에서 자연과학과 관련된 문화 활동의 등장은 시기가 르네상스까지 거슬러 갑니다. 그런 문화 활동의 한 가지 특징은 논리나 정립된 이론에만 기반을 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역으로 새롭고 신비한 것에 대한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이죠.
19세기에 와서는 그런 문화 활동의 저변이 뒷받침해줄 여러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넓어지게 됩니다. 인쇄 기술의 발전 등으로 문화 보급이 용이해졌을뿐만 아니라 인류 스스로의 손으로 자연물이 아닌 경이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죠. 예를 들면 환등 공연, 파노라마, 디오라마 같은 시각을 교란하는 전시물처럼 말입니다. sf소설도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에 기반해서 나타난 문화 활동의 한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