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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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태 소설은 식민주의와 자연 환경, 원주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클럽에서 <듄>, <작은 친구들의 행성>,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비교한 적 있습니다. 세 소설은 모두 설정과 줄거리, 주제가 비슷합니다. 각각 외딴 외계행성(아라키스, 자라 13, 애스시)가 등장하며, 그 행성에 원주민(프레멘, 복숭이, 애스시인)이 삽니다. 그런데 이 행성에는 굉장히 중요한 자원(멜란지, 선스톤, 목재)이 존재하기 때문에 외부인(랜드스라드, 자라코프, 헤인 인류)가 침범합니다. 외부 세력은 원주민을 핍박하고, 자원을 수탈합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외부 세력과 원주민들의 갈등이 깊어지고, 결국 원주민들은 외부 세력을 고행 행성에서 몰아내기에 이릅니다. 제국주의, 식민지 수탈, 자본주의적 횡포, 소수 약자를 묘사하기 좋은 줄거리입니다. 평론가와 독자는 이들 세 소설을 흔히 생태 소설로 분류합니다. 특히, <듄>과 <세상 숲>은 생태 소설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작은 친구들의 행성>은 재미가 충만하지만, 작품성은 좀 딸리는 편이죠.) 그런데 <세상 숲>은 나머지 두 소설과 좀 다릅니다.
생태 소설은 말 그대로 생태계를 주요 소재로 삼은 문학입니다. 그리고 생태계는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고, 다른 생명체와 협동하거나 적대하는 체계입니다. 먹이 사슬은 생태계의 유명한 얼굴 마담인데, 태양이 지구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식물이 양분을 생산하고, 각 단계의 소비자가 양분을 흡수하고, 죽은 소비자를 청소부가 치우고… 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먹이 사슬이 곧 생태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먹이 사슬은 환경과 각 생명체의 연결 고리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저 사슬 안에는 인간 문명도 당연히 들어갑니다. 실제로 인간 역시 각종 동식물과 자연 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반대로 엄청난 영향을 받는 편이니까요. 아무리 쌀국의 과학 기술이 뛰어나도 가뭄과 산불과 사막화와 해충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잖아요. 그런 고로 생태 소설은 인간을 중심으로 각종 야생 환경과 생명체가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묘사합니다. 생태 소설이라고 해도 범위가 꽤 넓어서 우주 전쟁부터 포스트 아포카립스까지 각종 하위 장르와 결합합니다.
SF 생태 소설은 일반 생태 문학과 소재나 구조가 비슷하기도 합니다. 상상 과학 여부가 다를 뿐, 주제와 대립 구조가 흡사할 때도 있습니다. <수달 타카의 일생>을 보면, 수달 가족을 중심으로 하천 생태계를 세세하게 표현합니다. 물고기, 양서류, 수달, 물새, 사냥개, 사냥꾼, 어부와 농부, 계절 변화와 식생 등을 그림처럼 묘사하죠. <늑대왕 로보>에서는 늑대 떼와 가축과 농부와 사냥꾼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농부들이 소를 키우고, 소를 키우느라 초원을 방목지로 바꾸고, 늑대들은 먹을 게 없어지고, 그래서 늑대들이 가축을 습격하고, 사냥꾼들이 늑대 떼를 죽이고 등등의 순환이 이루어집니다. 늑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늑대 토템>도 그렇죠. 중국이 몽골 평야를 공략하고, 몽골인들은 중국식 관습을 따르고, 유목 생활이 어려워지고, 평야 식생이 바뀌니까 동물들도 살기 힘들고, 그래서 결국 늑대도 생존하기 어려워집니다. 여기서 언급한 소설들은 일부 사례일 뿐이지만, 대다수 생태 문학들이 대개 저런 구조입니다. 인간과 자연 환경과 야생 동물들의 관계를 집중해서 다룹니다.
[고래 생태계를 자세히 다룬 책인데, 과연 생태 문학에 속할까요.]
위에서 말한 작품들은 순문학 쪽이지만, SF 장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습니다. <듄>도 인간과 자연 환경과 야생 동물을 다루는 것은 <수달 타카의 일생>이나 <늑대 토템>과 비슷합니다. 랜드스라드와 프레멘, 메마른 사막과 스파이스, 거기서 힘겹게 살아가는 독수리와 들쥐 그리고 거대 순환계의 주역인 샤이-훌루드까지. 규모가 커지고 상상력이 덧붙였지만, 기본적인 골격은 순문학 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프레멘을 몽골인으로, 랜드스라드를 중국으로, 몽골 평야를 멜란지로, 늑대를 샤이-훌루드로 비교하면, <듄>과 <늑대 토템>은 꽤 비슷한 소설로 보입니다. 외부인 주인공이 원주민과 동행하며 삶의 지혜를 배운다는 내용도 똑같죠. <작은 친구들의 행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이 소설에서는 야생 동물의 비중이 수달이나 늑대, 모래벌레만큼 중점적이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각종 야생 동물들이 등장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런 짐승들 때문에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크나큰 곤경에 처합니다. 이런 동물들은 그냥 무서운 짐승을 떠나 사건 해결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반면, <세상이 가리키는 말은 숲>은 지금껏 언급한 작품들과 좀 다릅니다. 왜냐하면 야생 환경의 비중이 그렇게까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문학이든 SF 소설이든 여타 생태 문학들은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야생 환경이 등장합니다. 죽지 않는 나무든, 무시무시한 최고 포식자든, 어쨌든 야생 환경이 주인공의 행태에 밀접한 영향을 끼칩니다. 하지만 <세상 숲>에는 그런 영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중의 갈등은 어디까지나 헤인 인류와 애스시인의 억압과 착취에서 비롯할 뿐입니다. 그리고 작가가 묘사하는 행성 생태계도 어디까지나 애스시인의 문화에 그칠 따름입니다. 행성에 뭔가 중요한 동물이나 식생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헤인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서술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애스시인의 언어와 행동 양식, 꿈을 바라보는 의미를 주로 설명합니다. 막판에 헤인 착취자와 애스시인들이 싸울 때도 동물이나 식물들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생태 소설치고 <세상 숲>에서 야생 환경의 역할은 미미합니다. 그저 지구가 환경 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애스시의 풍부한 목재가 지구의 유용한 자원이라는 배경 설정이 전부입니다.
물론 야생 환경만 등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생태 소설인 건 아닙니다. 그리고 야생 동물과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그린다고 해서 평론가와 독자가 생태 소설로 평가하는 것도 아니죠. 순문학 쪽에서 <백경>은 고래의 생태를 굉장히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아예 백과 사전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허먼 멜빌 평론가들은 '고래학장'이라고 해서 이런 부분들만 따로 추려서 연구합니다. 그래서 <백경>을 해양 생태 소설로 보는 문예 학자도 있지만, 모든 평론가와 독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아마 <백경>이 생태학 소설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독자도 많을 듯해요. 왜냐하면 멜빌이 정말 생태 연구만 할 목적으로 모비 딕을 등장시켰는지 해석이 불분명하니까요. SF 쪽에서 예시를 들자면, <해저 2만리>나 <잃어버린 세계>는 해저 생태계와 고립된 밀림 생태계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소설들은 비경 탐험물이라고 하지, 생태 소설로 간주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쥘 베른과 코난 도일이 의도한 건 탐험이었지, 환경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지만, 이런 쪽은 생태주의로 평가하지 않죠.]
본문과 살짝 괴리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거론하고 싶은 영화가 2014년 <고지라>입니다. 이걸 생태주의 영화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이 영화는 인류와 전략 병기와 환경 오염과 야생 동물을 다뤘습니다. 고지라와 무토를 둘러싼 고대 생태계 설정이 중심 사건으로 나옵니다. 영화는 주로 전략 병기의 공포를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 자연 정화력과 자연의 위력 또한 빼놓지 않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고지라는 방사능 돌연변이 괴수가 아니라 고대 최고 포식자로 나오죠.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괴수물 영역에 머물 뿐입니다. 이걸 생태주의 시각으로 보는 관객은 드뭅니다. 고지라라는 캐릭터 자체가 워낙 괴수물 영역에서만 놀았으니까요. 새삼스럽게 이런 영화가 나왔다고 해서 곧장 생태주의 영역으로 건너오지 못하죠. 즉, 생태 소설이란 것도 창작가의 의도와 평론가 및 소비자의 시선에 따라 평가가 엇갈린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생태 장르만 그런 게 아니라 장르라는 게 명확한 기준을 세우기 어렵죠.
르 귄 여사가 쓴 <세상 숲>은 야생 환경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지구가 자원이 부족해 위기라고 나오니까 환경 문제를 논하는 것 같지만, 막상 소설 줄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나 환경 보호나 자원 절약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할 클레멘트의 <질소 고정>이나 와드 무어의 <생각보다 싱싱해>, 바치갈루피의 <와인드업 걸> 같은 소설과는 분위기가 퍽 다릅니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애스시인의 문화입니다. 르 귄 여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소수 약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죠. 그러니 이 작품을 생태 소설이라고 지칭하는 건…. 좀 메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세상 숲>은 차라리 제국주의적 폭력을 고발하는 작품에 가깝습니다. <어둠의 심연>과 <아귀레: 신의 분노>, <붉은 브라질> 같은 작품처럼요. 이들 소설은 강대국이 원주민을 핍박하고, 그 결과 벌어지는 참상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어둠의 심연>과 <붉은 브라질>을 생태주의 문학이라고 하는 경우는… 음, 제가 알기로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숲>은 겉보기에 생태주의 문학 같지만, 사실 알맹이는 식민지의 폭력을 외치는 셈입니다.
여러 장르가 그렇듯 생태 문학 역시 정확한 정의는 없습니다. 설사 정의가 있다고 해도 작가와 독자와 평론가 개개인이 생각하는 바가 다를 겁니다. 그러니 제가 이 게시물에서 설명한 내용이 틀릴 수 있죠. 사실 <세상 숲> 이외에도 야생 환경보다 사회 구조에 더 신경 쓰는 생태 문학은 흔할 테고요.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설정의 풍성함 때문입니다. <세상 숲>에 뭔가 신비한 야생 동물이 좀 나왔으면, 소설 내용이 더욱 풍성했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헤인 인류 대 애스시인의 적대 구도 이외에 다른 면모도 살필 수 있으니까요. 뭐, 르 귄 여사는 애초에 그렇게까지 넓은 주제를 다루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책 자체도 두께가 얇고, 헤인 인류는 3류 악당 냄새를 풀풀 풍기고, 애스시인은 더없이 선한 존재로 나오니까요. 르 귄 여사도 이런 설정이 너무 단순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짧은 이야기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일부러 저렇게 설정했겠죠. 야생 동물도 일부러 빼버리고요. 게센인들의 생태처럼 애스시의 야생 설정을 기대한 독자로서는 좀 아쉽습니다.
[르 귄 여사의 소설은 생태 문학보다 이런 쪽에 가깝지 않을지….]
애초에 르귄선생 관심사가 생태학보다는 인류학에 있다는걸 생각하면 생태학 소설이 될 수가 없죠(...)
사실 이분 소설 대부분이 외부적인 사건보다는 그 사건으로 인해 시련을 거친 개인의 내면적 성장과 성찰에 포인트를 맞추는 걸 생각하면 살인과 폭력이라는 낯선 개념을 수용하여 동족을 위해 손을 더럽힌 셀버의 변화가 더 중요하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인물들은 다 1차원인데 셀버 혼자 한 4차원 수준의 갈등을 겪고 있는 느낌(...)